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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 이야기] 5월, 광주의 봄날
[우리땅 이야기] 5월, 광주의 봄날
  • 이재윤 기자
  • 승인 2018.05.14 16: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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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주간=이재윤 기자] 5월이면 광주가 생각나고, 광주하면 5월이 떠오른다. 메마른 봄 가뭄에 지친 대지를 적시는 단비가 내리는 날, 광주를 찾았다. 빗줄기는 가늘게 흩날리다 갑자기 굵게 빗발치고, 방향을 짐작할 수 없는 바람과 함께 손에 든 우산을 무용지물로 만들기도 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먼저 국립 5·18묘지로 향했다.

◆ 민주화의 성지, 국립 5·18묘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희생자들을 모신 역사의 현장, 국립 5·18묘지는 매년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곳에는 434명 5·18 희생자들의 영령이 모셔져 있다.

“이 조그만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희생하겠습니다.”라는 메모 한 장 남겨놓은 채 의연히 세상을 등진 이들, 한 어머니의 아들이었던, 한 가정의 아버지였던 그들이 누워 잠든 곳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옷길을 여미며 입구에 서 있는 민주의 문을 넘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공원묘지 한쪽에 엄숙히 장례를 치르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 이곳에 안치되는 이는 5월의 어떤 아픔을 안고 가는 것일까? 먼 발치로나마 축원을 올리며 발길을 조심스레 옮겼다.

민주의 문을 지나면 민주광장, 추념문 등이 차례로 나오고, 5·18묘역 중앙에 높이 솟은 추모탑이 묘역 전체를 내려다보듯 서 있다. 추모탑은 우리나라 전통 석조물인 당간지주를 형상화해 놓았다. 추모탑을 지나면 민주화 영령들이 잠든 묘역이다. 참배를 마친 후 고인돌 형태를 응용한 유영봉안소에 들렀다. 유영봉안소는 5·18 희생자들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곳이다.

1997년 새롭게 조성된 신묘역에서 구묘역으로 가는 길에 역사의 문이 나온다. 전통 한옥 건물로 지하에는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전시관이 있다. 사진 한 장, 한 장을 따라가노라면 그날의 아픈 상처들이 하나, 둘 되살아난다.

1980년 5월 당시 산화한 영령들이 17년 동안 묻혀 있던 구묘역은 1997년 신묘역이 새롭게 조성되면서, 지금은 고 박종철, 민족시인 김남주 등 5·18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민족, 민주열사들이 안치되어 있다.

◆ 그해 5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웠던 봄날

1980년 군부독재정권의 군홧발과 총칼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빛고을 광주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산증인으로, 그날의 기억을 도심 곳곳에서 마주하게 된다. 상무신도심, 김대중컨벤션센터 건너편에 위치한 5·18 자유공원도 그 중 하나다.

5·18 자유공원은 광주민중항쟁 당시 정권찬탈을 기도하던 정치군인들의 강경진압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던 이들이 구금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던, 상무대 법정과 영창을 원형으로 복원, 재현한 곳이다.

비가 내려 더욱 을씨년스러운 건물들 사이로 들어갔다. 담장 위로 철조망을 둥글게 말아 올린 영창은 여섯 개의 넓지 않은 마루방이 반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 방에 150명까지 수감했다고 하는, 상처 입은 몸으로 무더위 속에 엉켜 있었을 그들의 모습이 겹쳐지며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미루어 짐자갛ㄹ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은 폭력 앞에 굴종을 강요받으며 간첩의 사주를 받은 폭도라는 누명이었을 것이다.

독거실은 0.8평, 한 평이 채 안 되는 공간이다. 하루 열여섯 시간의 장좌자세라는 엄격한 규칙에 가혹한 구타와 감시를 견뎌내야 했던 그들에게 창살에 내리던 햇살은 정녕 ‘내 목에 와 감기던 누이가 짜준 따스한 목도리’ 만큼의 위안이 돼 주었을까. 어느 봄날 들판에 노역 나왔다가 잠시 누어 바라본 하늘이, 창틀에 잘려 각지지 않는, 마냥 넓은 하늘이어서 그래서 마음껏 바라본 오늘은 행복했노라고 일기를 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다.

5·18 자유공원을 나와 옛 상무대 자리에 조성된 5·18 기념공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5·18의 명예회복과 시민들의 피로 얻은 값진 교훈을 계승하는 정신적 장소일 뿐만 아니라, 도심 속 쉼터로서 5·18이 시민들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 일상화 한 공간이기도 하다.

5·18 기념공원 중앙에는 5·18 현황조각 및 추모 승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입구에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시민군 조각상 뒤에 지하로 이어지는 추모공간이 있고, 추모공간 뒤편으로 ‘아! 광주여 영원한 빛이어라’라는 주제로 형상화한 태극모양의 현황조각이 있다.

지하 추모공간으로 내려가면 품에 쓰러진 자식을 안고 있는 모자상이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을 새긴 부조를 응시하고 있고, 그 뒤로 5·18 희생자와 관련자들의 이름을 새긴 대리석 벽면이 반원형으로 설치되어 있다.

5·18 기념공원을 나와 1980년 5월 광주의 심장, 전남도청과 금남로를 향했다. 지금은 전남도청을 기점으로 금남로 1가~5가까지 금융기관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을 만큼, 광주 경제의 중심지로 활력이 넘치는 금남로에서 그날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충장로와 금남로를 중심으로 금융의 거리, 혁명의 거리, 청춘의 거리, 패션의 거리로 이어지며 번화가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1980년 5월 피로써 민주주의를 지켜낸 광주항쟁의 역사적 현장으로서 금남로는 광주의 상징으로 그 역사적 의미는 오늘에도 이어져오고 있다. 인도 곳곳에 세워진 각종 조형물들은 그러한 광주시민들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1980년 5월 당시 항쟁의 본부였던 전남도청과 각종 집회의 연단으로 쓰였던 분수대, 그리고 금남로, 1996년부터 이곳은 5·18민주광장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흑백 사진 속 매운 최루탄이 범벅이 되고, 머리에 피를 흘리며 끌려가는 젊은이들, 분노와 침묵, 그리고 한숨이 흐르던 금남로는 이제 광주 경제의 중심지로서 활력을 띄고 있지만, 역사의 현장인 전남도청 철거를 반대하는 검은 현수막과 구호들을 보며 아직 그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1980년 5월, 어떤 이는 금남로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 불렀다. 헌혈을 위해 모인 수많은 시민들의 행렬, 김밥과 주먹밥을 나눠주던 아주머니들, 바가지에 물을 떠먹여주던 할머니, 투사회보를 제작해 거리에 뿌리던 학생들, 자신의 형제들에게 총칼을 겨누던 계엄군에게 빵을 사주던 시민, 금남로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만든 이들은 바로 그 이름 없는 시민들이었다. 그래서 그해 5월 광주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 광주의 어미산, 무등산

무등산은 5월과 함께 광주의 또 다른 상징이다. 광주시 동쪽 가장자리와 담양군 남면, 화순군 이서면 등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전남의 명산이다. 해발 1,187m의 무등산은 봄철이면 만개하는 연분홍 철쭉과 진달래, 가을이면 단풍과 산등성이의 억새꽃, 그리고 겨울의 눈꽃으로 그 운치를 더하는 산이다.

무등산에서는 자연이 빚은 최고의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무등산의 3대 절경인 입석대, 서석대, 규봉암이 대표적인 곳으로 20~30m 높이로 솟은 거대한 기암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높이 20m가 넘는 40여개 남짓한 돌기둥이 사각, 육각, 원주 모양으로 높이 솟아있어 마치 그리스신전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입석대, 그 위쪽 산 정상 부근에 거대한 돌병풍처럼 솟은 바위절벽 서석대, 그리고 우거진 녹음 사이사이에 높이 솟아있는 돌기둥들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는 규봉 등, 마치 신화의 시대에 솜씨 좋은 석공의 다듬질을 받은 것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같은 주상절리는 용암이 식을 때 수축되어 생기는 절리 중에 단면의 형태가 오각형이나 육각형의 기둥모양인 것을 말한다. 무등산 주상절리는 약 7천만년 전(중생대)에 형성된 것으로 서석대, 입석대, 규봉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무등산 주상절리의 웅장함에 취해 잠시 땀을 식힌 후 광주의 대표적인 불교도량 증심사로 가보자. 무등산 중머리재로 향하는 왼쪽 가파른 길을 오르면 우거진 숲 속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증심사가 나온다. 통일신라시대 철감선사 도윤이 세운 절로,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석조보살입상, 삼층석탑, 그리고 오백전 등의 중요문화재들이 보존되어 있는 고찰이다.

그중에서도 표정이 저마다 다른 오백나한과 10대 제자를 모신 오백전은 무등산에 남아 있는 여러 사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증심사에 현존하는 건물 대부분이 한국전쟁 이후에 지어진 데 비해, 오백전만은 조선 초기에 세워진 건물이다.

오백나한과 10대 제자상은 1443년(세종 25년) 증심사를 삼창한 김방이 조성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흙으로 빚은 것이다. 이곳에 모셔진 오백나한상에는 개미와 관련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김방이 경양 방죽 대공사를 맡았는데 어느 날 공사현장에 커다란 개미집을 발견했다. 불심이 깊은 그는 개미집을 그대로 무등산 기슭에 옮겨 주었다. 그 무렵 김방의 가장 큰 고민은 공사에 동원된 수많은 일꾼들의 식량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그가 양식 창고에 가보니 개미들이 줄을 지어 쌀을 물고 창고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후 개미들의 행렬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김방은 개미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증심사에 오백전을 지어 오백나한상을 봉안하는 불사를 일으켰다고 전한다.

오백전과 함께 증심사의 중요한 보물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타원형의 얼굴에 살포시 웃는 듯한 표정, 가슴을 드러낸 채 양어깨 위로 흘러내린 법의,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균형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철부처로서는 매우 희귀한 작품이다.

그리고 오백전 앞뜰에 서 있는 높이 3.2m의 삼층석탑은 마치 한복의 우아한 곡선을 연상시키듯, 추녀 끝의 곡선이 아름다운 통일신라 말기의 탑이다. 높은 이중 기단에 3층으로 쌓은 이 탑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각 부분의 정제된 기법과 추녀 끝 곡선의 조화가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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