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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옥 칼럼] ‘함석헌 선생을 떠오르다’
[송기옥 칼럼] ‘함석헌 선생을 떠오르다’
  • 송기옥 칼럼니스트
  • 승인 2018.10.0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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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백성…정신적 거목을 반추하게’
송기옥 칼럼니스트
송기옥 칼럼니스트

[일요주간 = 송기옥 칼럼니스트] 한국의 간디라고 일컫는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선생을 만난 것은 5.16 군사정부가 들어서 민정 이양을 이행하라는 민중시위가 끊일 새 없었던 중학교 3학년 가을로 기억된다.

선생은 변산낙조를 보기 위해 부안을 찾았다는데 그 당시 부안읍 제일여관에 들었다. 집에서 8km나 되는 차도 끊긴 먼 길을 농민운동가 조병태, 이중석 선배를 따라 갔다. 여관 주변에는 의식 있는 젊은 청년들로 북적거렸다. 우리는 선생 방에 들어가 합배를 올렸다.

머리는 반백을 넘었고 늘어진 하얀 수염에, 흰 한복차림으로 무릎을 꿇어앉은 인자한 모습은 도인 아니면 신선(神仙)처럼 보였다. 좌중에 어느 분이 ‘선생님 편좌 하세요’ 말하니 “나는 무릎 꿇는 게 편해요” 라고 말끝마다 깍듯한 존댓말을 쓰셨다.

그 때 우리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한 가지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군인은 군인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말씀이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선생은 평안북도 용천이 고향으로 일제에게 강점당한 것은 우리 백성이 무지한 때문이라며 오직 교육을 통하여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의 평양고보 학생으로 3.1운동 때는 학업을 중단하고서 숭실학교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여 평양경찰서 앞에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부르짖었다.

정주의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선생과 조만식(오산학교장),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 같은 민족지도자 아래서 교육을 받고서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나온 후 오산학교 선생으로 민족교육에 힘썼다.

조국 해방과 더불어 6.25란 동족 수난과 5.16이란 군사쿠데타를 겪으며 1963년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학생들의 반대시위 때 선생은 단식투쟁을 하였고, 1970년에는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거침없는 바른 소리를 토해내니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1956년 고 장준하 선생이 설립한 ‘사상계(思想界)’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을 발표 한 후 선생은 더욱 존경을 받았고, 군사정부의 표적이 되어 숱한 고난을 당해야만 했다.

동경유학 중에 일본 기독교를 대표한 사상가 우찌무라 간조(1861-1930)의 무교회주의를 친구인 김교신(金敎臣, 1901-1945)과 함께 발전시켰는데, 김교신은 ‘바라보는 비로봉이 위대하였지만 나와 동행한 자중에 더욱 숭고한 자(함석헌)를 보았다’ 라고 칭송하였다.

기려 박사는 ‘한국 사람은 500년 후에나 함석헌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했으며 한완상 부총리는 ‘함석헌 선생은 싸우는 평화주의자다’라고 존경을 하였다. 최근에 일본에서 기독교 사상과 철학, 유불선(儒彿仙)과 기독교를 통달한 연구대상으로 함석헌의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 선생은 함석헌을 가장 아끼는 스승과 제자 사이다.

함석헌 선생은 동경유학시절에 일본의 사상가인 무교회주의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평생 평교사로 지낸 친구 김교신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신앙클럽’을 결성하여 동인지 ‘성서조선’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 일본 기독교 운동을 주창한 우찌무라 간조는 예수가 빈들이나 배위에서 설교했는데, 성전이라고 하는 거대한 교회건물과 성직자의 자격과 성찬 등의 의례도 기독교의 형식에 불과한 불가결(不可缺)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함석헌은 ‘신(神)앞에 홀로 서서 그를 직접체험 실천하는 신앙을 생활화해야 하는데도 교회에 나가면 늘 실망하고, 심령이 소생하는 것이 없고 낡아빠진 형식적인 껍데기만 맴도는 신앙의 자유를 구속하는 틀 속에 가둬버리는 것에 견딜 수가 없다.’라고 고백 했는데 기성교회에서는 ‘불순분자’ 이단자라고 매도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 감옥에 1년간 수감 중 ‘종교는 하나다. 이단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는 맘이 곧 이단이다’라고 선언을 하였다. 감옥에서 풀려나 농사를 지으며 부친의 의서를 공부하며 해방을 맞아 단신으로 월남해 YMCA에서 성서 강의를 하였다.

함석헌은 명동사건(1976), YMCA 위장결혼식 사건(1979), 월간 씨알의 소리 강제 폐간을 겪는 등 자유민주주를 위한 투쟁에서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

말년에는 평화사상을 내세워 비폭력 민주화운동과 퀘이커 교도로 개종했는데, 퀘이커교는 1647년 영국의 조지팍스(1624-1691)가 창설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의 한 교파다.

함석헌은 민주쟁취 국민운동 공동대표와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역임하였으며, 1987년 6월 항쟁을 쟁취해낸 거목으로 군사정부와 맞선 진정한 민주투사였다. 1979년,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1987년 인촌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스승 다석 유영모(1890-1981)의 1일 1식을 본받아 1일2식으로 89세란 장수를 하였다. 그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는 외세를 불러 반 토막으로 만든 신라통일을 깎아내렸고, 북방 발해사를 한국 역사로 인정하자고 했다.

그는 인생삼락(人生三樂)으로 첫째, 문명이 파산하고 세상 끝 날이 보이며, 두 번째, 내가 아닌 7년간 아내의 병수발 한 것과, 세 번째, 재판정에서 십자가를 보며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말 할 수 있는 것이 3락으로 삼았다. 어지러운 이 시대에 함석헌선생 같은 정신적인 거목을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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