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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아직도 살아있는 11월 ‘소춘’
희망이 아직도 살아있는 11월 ‘소춘’
  • 작가 한상림
  • 승인 2018.10.2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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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상림 ‘11월은 키작은 봄’
▲ 작가 한상림
▲ 작가 한상림

인디언들은 계절 변화에 아주 민감했다. 계절의 순환과 이법에 따라 사람의 마음 상태를 빗대어 1월에서 12월까지 달(month)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불렀고, 정희성 시인도 11월은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는 달‘이라고 시를 통해 인생 늦가을의 정취를 노래하였다.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 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 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 정희성 시인의 ‘11월은 모두 다 사라지지 않는 달’ 전문

인생의 겨울이 되면 누구나 곧 혼자 우두커니 서 있을 준비를 해야 하지만, 11월은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을 그리면서 인생의 새로운 희망을 갖자는 거다. 1월에서 10월까지 봄, 여름, 가을을 보내고 다시 겨울로 들어서기 직전에 시작하는 간이역 같은 11월, 옛 선인들이 11월을 소춘(小春) 즉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키 작은 봄이라고도 불렀다.

봄에는 온갖 꽃들이 지난 겨울 동안 추위 속에서 오래 머물렀다가 새로운 희망을 갖고 피지만, 가을은 마지막 이승을 떠나기 전 인생이라는 꽃을 단풍으로 활짝 피울 수 있는 색다른 봄이 아닐까 싶다.

늦가을이자 초겨울로 접어드는 11월은 숫자 ‘1’이 나란히 서 있는 것으로서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어쩌면 인생을 12개월로 나누었을 때, 늦가을인 11월에는 그동안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반듯하게 다시 세워놓을 수 있는 남은 인생을 향한 마지막 도전을 의미하는 지도 모르겠다.

늦가을 단풍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누구나 지난 한 해의 시간을 돌아보며 회한에 잠기곤 한다. 정희성 시인의 빛 고운 사랑의 추억도 떠올려보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이 순간 11월의 달력과 물든 잎새들은 저만치 멀어지고 있지만 우리들 가슴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추억은 영원하다. 자, 가을이 멀어지기 전에 창문을 열고 붉게 물들어 떨어지고 있는 낙엽들의 신음을 들어도 좋겠다.

아니면 조용히 혼자 만추의 풍경을 바라보며 여행을 떠나도 좋다. 구순의 노인들이 칠순의 노인들을 보고 “젊은이들, 참 좋을 때다, 좋을 때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12월을 앞에 둔 11월은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살아있는 달이 아닐까?

12월이 되면 한 해를 마무리 한다고 여기저기서 자칭 평가대회나 송년회로 얼룩진 시간으로 채우면서 정신없이 바쁘게 마지막 달을 보내게 된다. 그나마 11월엔 빈 들판의 한적한 풍경처럼 한가로운 달이다.

희망이 아직도 살아있는 11월을 ‘키 작은 봄’이라고 하고 싶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1월은, 인생의 노년기를 맞이하기 전에 잠시 황혼을 맞이하기 전에 머물렀다 가는 봄이기에 조상들은 소춘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 아직은 내 인생의 11월은 아니지만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를 보면서 소춘을 떠올린다.
▲ 아직은 내 인생의 11월은 아니지만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를 보면서 소춘을 떠올린다.

아직은 내 인생의 11월은 아니지만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를 보면서 소춘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이미 11년 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셨지만, 스무 한 살에 결혼을 하고 내가 임신되자마자 논산훈련소에 입대를 하셨다.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사랑방에서 나를 낳고, 서모인 할머니와 고모 넷, 그리고 큰어머니와 사촌 형제들 오남매라는 대가족 속에서 몹시 고된 시집살이를 하면서 3년 동안 아버지를 기다리셨다.

그러면서 그 당시 스무 세살의 청년인 아버지가 훈련복을 입고 찍었던 흑백사진 한 장을 얼마나 애지중지 바라보면서 기다리셨을까? 여든 둘 생신이신 엊그제 자식들 오남매에게 그때 그 흑백사진을 확대해서 나눠주셨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우리에겐 아주 생소하면서도 젊었던 청년의 잘생긴 아버지가 군복을 입고 서 있다. 신혼의 부모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마치 다시 봄을 보는 듯하다.

주름진 어머니가 이제 황혼으로 기울어져가는 자신을 읽으면서 그때를 그리워하고 계시는 거 역시 다시 봄인 소춘(小春)이 아닐까? 점점 사그라져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작은 봄을 떠올리는 나 역시 스무 해를 더 보내고 나면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지금을 내 삶을 그리워하면서 소춘의 작은 봄을 읽게 될 것이다.

11월에는 수확을 마친 들판의 휑한 모습처럼 우리의 마음도 잠시 비워두면 좋겠다. 너무 정신없이 바삐 살고 있다가도 가끔 이렇게 앉아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 역시 나에게는 아주 짧게 스쳐가는 봄이 아닐까 한다.

사실 나의 11월은 봉사활동의 마무리 시간으로 무척이나 바쁘고 힘든 시간들이다. 김장 봉사만 해도 적어도 4군데는 다녀야 하고 1년 행사계획에서 못 다한 것들을 다 마무리하여야 하기 때문에 마음을 비울 시간조차 없이 보내곤 한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키 작은 봄처럼 11월에는 진정한 내 모습을 뒤돌아보면서 나를 생각해보고 싶다.

■ 프로필

한예총 전문위원

시인, 국제 펜클럽회원

시집 ‘따뜻한 쉼표’ ‘종이 물고기’

hsr5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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