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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우의 역사소설 - 김시습의 수락잔조(水落殘照)(3)
황천우의 역사소설 - 김시습의 수락잔조(水落殘照)(3)
  • 황천우 작가
  • 승인 2012.08.07 1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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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스승님은 스님이고 설준 스님은 스승님의 스승님이시니 제게는……”

“웬 스님이시오?”

노인의 반응에 그곳에 있는 다른 노인들이 고개를 돌려 시습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노인들의 표정이 야릇했다. 마치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듯 주뼛거렸다. 그 중에는 경계의 눈빛도 섞여 있었다.“소승 설잠이라 하옵니다. 이 절의 주지는 뉘신지요?”

“주지는 다른 절로 가고 없소.”“다른 스님들은요?”
“마찬가지요. 그래서 우리가 접수했다오.”심드렁하니 답을 하는 노인의 모습을 살피고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대웅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도 역시 스님은 물론 사람의 자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허름한 대웅전을 둘러보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주변을 살피러 갔던 만득이 다가왔다.
“어째 좀 이상한데요, 스님.”“그러게 말이다. 절에 중은 보이지 않고 노인네들만 득실대니.”
“절에 중이 없다니요?”

만득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만득을 쳐다보는 순간 문득 학림사 주지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혹시나 모를 일이었다. 한때 번성했던 절이 이리된 데에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싶었다. 우려했던 일들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였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님?”
“왜 그러냐?”“절 뒤 벽에 이상한 글이 쓰여 있어서 말입니다요.”
“어디 말이냐?”

근심 어린 생각에 빠져있어서인지 시습의 목소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를 의식하며 곧바로 만득이 이야기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도착하자 만득의 말대로 벽에 글이 쓰여 있었다.


水落寺
수락사에서

산속 옛 절 오래 전에 찾아간 적 있었는데
손꼽아 헤어보니 삼십 년이 지났구나
나막신 신고 많은 시간 손과 함께 걸었고
한가함이 좋아 긴긴날 스님과 머물렀었네
고운 꽃 가는 대는 그윽한 경계로 잇닿았고
고목과 바위는 작은 절을 호위했었지
다시 한 번 스님 손잡고 돌아가고 싶건만
어릴 적 옛일이 꿈처럼 아득하구려

山中古寺昔曾遊(산중고사석증유)
屈指如今三十秋(굴지여금삼십추)
步?多時携客去(보극다시휴객거)
愛閑長日爲僧留(애한장일위승유)
花濃竹細連幽境(화농죽세연유경)
木古巖回擁小樓(목고암회옹소루)
更欲携師一歸去(갱욕휴사일귀거)
少年往事夢悠悠(소년왕사몽유유)

……

총림 가까이에 불암산이 있고
그 산 밑에 두서너 칸 내 집 있었지
도잠의 세 오솔길처럼 적막했지만
양로의 집 한 채는 지을만했지
순채 찾고 죽순 삶는 건 예사로운 일이고
국화 지고 매화 피면 절로 한가로웠지
다시 한 번 스님 손잡고 돌아가서
늘그막의 신세 의탁하고 싶구나

叢林 叢林(총림) : 특히 선종 사원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선승(禪僧)이 좌선을 수행하는 도장을 가리킨다. 선림(禪林) 또는 선원(禪苑)이라고도 한다. 많은 수행승들이 한곳에 머문 것을 나무가 우거진 숲에 비유한 것이다. 또는 승려들이 화합하여 한곳에 모인 것이 마치 숲의 수목처럼 고요하다는 의미도 있다.
近在佛巖山 (총림근재불암산)
山下吾廬屋數間 (산하오려옥수간)
三徑 三徑(삼경) : 세 오솔길이란 뜻으로, 한(漢)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가 자기 집 대나무 밑에 세 오솔길을 내고 구중(求仲)과 양중(羊仲) 두 사람하고만 종유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곧 은자의 처소를 가리킨다.
陶潛雖寂寞 (삼경도잠수적막)
一區揚老 一區揚老(일구양로) : 양로는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이고, 일구는 주택 한 채를 지을 만한 땅을 말한다.
可盤桓 (일구양로가반환)
討蓴燒筍尋常事 (토순소순심상사)
送菊迎梅自在閑 (송국영매자재한)
更欲携師一歸去 (갱욕휴사일귀거)
暮年身世共追攀 (모년신세공추반)

四佳(사가)


읽기를 마친 시습이 이내 바랑을 풀더니 그 옆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題壁
벽에 제하다

수락산에 있는 옛 절 찾아
지난해 석장 올해 또 짚었네
머리 위 세월 빠르게 지나가고
눈앞의 세월 새처럼 떠나가네
허름한 집 모습이야 괴이한들 어떠랴
담백한 음식만 허락되면 천성대로 즐기리
흥에 겨워 작대기 짚고 거닐었던 길
풍수의 매미소리 현악기를 닮았구나

水落山中尋古寺(수락산중심고사)
前年街錫又今年(전년가석우금년)
頭邊日月跳丸過(두변일월도환과)
眼底星霜飛鳥遷(안저성상비조천)
破屋何妨容此幻(파옥하방용차환)
淡餐且可樂吾天(담찬차가락오천)
興來支杖經行處(흥래지장경행처)
風樹鳴?咽似絃(풍수명조인사현)

梅月堂(매월당)


“스님, 사가라는 분이 뉘시옵니까?”
시습이 글쓰기를 마치자 시종일관 진지한 모습으로 지켜보던 만득이 입을 열었다.
“나와 동문수학했던 서거정을 이름이다.”
“서거정이라면 고위관직인 우참찬인가 뭔가…… 여하튼 높은 분 아닙니까요?”
“내게는 그저 동문수학한 사이일 뿐이니라.”
“나이 차가 많은뎁쇼?”“이놈아, 배우는 일하고 나이 차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퉁명스레 내뱉고는 이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시습의 얼굴로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여차하면 이 절에 주저앉아야겠구나.”

조짐

날이 밝자마자 만득을 앞세우고 고양군에 있는 정인사로 길을 나섰다. 스승인 설준 스님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정인사는 세조 생전에 자신보다 앞서 죽은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절이었다. 그러나 서둘러 짓다보니 절의 외형이 영 볼품없었다. 그러던 차에 예종이 죽고 성종이 보위에 오르자 의경세자의 부인이며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절을 중창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설계 및 공사의 총책임을 설준 스님이 맡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이를 무렵 정인사에 도착했다. 초입에서 절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공사가 한창인 현장 복판에서 설준 스님이 웬 낯선 젊은이와 함께 바쁘게 움직이며 공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시습이 서둘러 설준 스님에게 다가갔다. 설준도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오는 시습을 바라보았다.

“어서 오게.”
“소승 설잠이 스승님을 뵈옵니다.”

설준 스님을 향해 공손히 예를 마친 시습이 곁에 있는 젊은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남효온이 스님을 뵈옵니다.”

남효온이라는 말에 시습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그대가 추강이란 말이오?”

말로만 들었던 남효온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그러합니다, 스님. 제가 남효온입니다.”

시습이 남효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을 잡았다.

“추강에 대해서는 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소.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이 보잘 것 없는 몸이 참으로 복도 많구려.”
“자, 예서 이러지들 말고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세.”

둘의 하는 양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설준이 공사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조그마한 건물을 향해 앞서 걷기 시작했다. 설준 스님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인 듯했다. 그곳 가까이 이를 즈음 만득이 서둘러 시습 곁으로 다가섰다.

“스승님께 인사 올리도록 해라.”

시습의 말에 설준과 남효온이 걸음을 멈추고 동시에 떠꺼머리총각에게 고개를 돌렸다.

“만득이 대 스승님을 뵈옵니다.”

만득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누구신가?”
“여러 해 동안 저와 함께한 만득이라 하옵니다. 스승님께 머리 깎는 일을 부탁드리려고 함께 찾아뵈었습니다.”

시습의 말이 끝나자 설준이 만득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네가 직접 깎아주지 않고.”“소승이 어찌 감히……”“무슨 말인가? 자네는 이미 그 단계에 올라섰으니 직접 깎아주게.”“저는 아직…… 스승님께서 깎아주셨으면 합니다.”
“정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만득이라 했는가? 잠시 이야기 좀 나누고 있을 터이니 그동안 저쪽에 있는 냇가에 가서 몸을 정갈하게 닦고 준비하고 있게.”

말을 마친 설준이 시습과 남효온을 방안으로 들이고는 다기를 준비했다.

“어쩐 일로 한양을 다 방문하였는가?”
“새로운 왕이 보위에 올랐다고 해서 겸사겸사 들려봤습니다.”
“겸사 겸사라니?”
“사실 얼마 전에 수락산에 터를 잡았습니다.”
“수락산에!”
“잘하셨습니다, 스님.”

남효온이 반색하며 미소 지었다.

“또 얼마나 갈지.”

설준이 심드렁하니 내뱉고는 슬그머니 남효온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번에는 그리하시면 아니 됩니다, 스님. 오래오래 머무시면서 부족한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주셔야합니다.”

남효온의 또박또박 짚어 말하는 투가 매우 간절했다.

“그 문제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하지요. 그러나저러나 내 듣기로는 요즈음 훌륭한 일을 시작했다고 하더이다.”

남효온이 주변 사람들과 함께 단종의 상왕복위운동을 하다 비명에 간 사람들에 관한 소상한 내용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들은 바 있었다.
시습의 말에 남효온이 쑥스러워하며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스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너무 치켜세우십니다.”
“당연한 일도 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하고 있으니 훌륭하다는 거 아닙니까.”

시습이 슬그머니 설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옳거니. 설잠의 말이 맞네. 사람들은 업적이라면 무조건하고 거창하게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정작 해야 하는 당연한 일에는 오히려 소홀하면서. 특히 그 당연한 일이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말이네. 그러니 추강의 일은 백번 칭찬 받아도 마땅하네.”
“옳습니다, 스승님.”

남효온을 바라보는 시습의 눈빛이 그윽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면 스님께서도 제게 주실 말씀이 있습니다.”“허허. 내가 아는 것이 무에 있다고 그러시오.”
“왜요, 스님이야말로 그 현장 한복판에 계셨던 분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말씀하지 않으셔도 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그 위험한 상황에서도 의인들의 수급을 모처에 안치했다는 사실을요.”

순간 시습이 나무관세음보살을 되뇌었다.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게.”
“스승님, 이 한 몸이 걱정되어서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그 사실이 알려지면 그분들의 수급이 잘못될까보아 그럽니다.”
“그 역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재로서는 스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추강은 어찌 나의 스승님과……”
“저뿐만 아닙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설준 스님께 도움과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스승님이 추강 같은 사람들의 후원자라는 말입니다.”“바로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님께 물심양면으로 지원받으며 연명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이지요.”

남효온의 말이 끝나자 문득 학림사 주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스승님이 한 여인네로부터 과도한 시주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구설수와 왠지 연관성이 있는 듯했다. 시습이 골똘히 생각하며 설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시습이 감히 대놓고 진위여부를 물을 수 없어 주저했다.

“스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들으신 모양입니다?”

마치 시습의 속내를 읽었다는 듯 남효온이 빙그레 웃으며 선수를 쳐주었다.

“무슨 이야기라니! 무슨 일인지 속 시원히 말해보게.”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스승님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항간에 떠돌고 있는데 혹시 그 사실을 아시고 계십니까?”
“나와 관련된 불미스런 일이라니. 그래 무슨 내용이던가?”
“한 여인과 정분을 통하고 그를 미끼로 과도한 시주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설준이나 남효온이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럼……”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가 정말 그랬으리라 생각하는가?”

설준의 은근한 다그침에 시습이 얼른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면?”
“이 왕조의 국정운영방침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옵니다.”

이번에는 설준이 나무관세음보살을 되뇌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무겁게 느껴졌다. 전에 없던 스승의 모습을 본 시습의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남효온 역시 근심스런 표정으로 설준을 바라보았다.

“잘 보았네.”
“그렇다면 제 생각이 기우가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유교국가에서 불교를 우대하던 세조임금과 아들인 예종임금마저 죽었으니 그동안 서슬에 눌려 있던 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네. 그동안에야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상황이 달라졌는데 그냥 둘 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설준이 말을 마치고는 차를 따라 시습과 남효온 앞에 놓았다.

“하오면 이제 시작이라는 말씀이신지요?”
“너무 걱정하지 말게, 지금 당장 큰 변고는 일어나지 않을 터이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2) 叢林(총림) : 특히 선종 사원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선승(禪僧)이 좌선을 수행하는 도장을 가리킨다. 선림(禪林) 또는 선원(禪苑)이라고도 한다. 많은 수행승들이 한곳에 머문 것을 나무가 우거진 숲에 비유한 것이다. 또는 승려들이 화합하여 한곳에 모인 것이 마치 숲의 수목처럼 고요하다는 의미도 있다.

3) 三徑(삼경) : 세 오솔길이란 뜻으로, 한(漢)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가 자기 집 대나무 밑에 세 오솔길을 내고 구중(求仲)과 양중(羊仲) 두 사람하고만 종유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곧 은자의 처소를 가리킨다.

4) 一區揚老(일구양로) : 양로는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이고, 일구는 주택 한 채를 지을 만한 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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