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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우의 역사소설 - 김시습의 수락잔조(水落殘照)(11)
황천우의 역사소설 - 김시습의 수락잔조(水落殘照)(11)
  • 황천우 작가
  • 승인 2012.10.16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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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게 있기 때문에 세상살이가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있고 없고의 차이


시습이 정업원에서 돌아온 후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나 깨나 안 씨 여인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그리움이었다. 잠자리에 들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밤을 새기 일쑤고 무언가를 하다가도 세상이 정지된 듯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불경을 낭송하기도 하고 시 쓰기에도 전념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안 씨 여인의 환영만 더욱 강렬해질 뿐이었다. 술을 마시면 벗어날까 진탕 취해보기도 했다. 허사였다. 깨고 나면 그리움의 실체만 더욱 또렷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지려니 했으나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환영에 사로잡히는 강도요 그리움이었다.

그날도 잠이 오지 않아 촛불을 밝히고 불경을 읽는 중이었다. 희미했지만 분명 인기척이 느껴졌다. 읽던 책을 덮고 혹시나 하여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리 오너라!”

순간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온 몸이 무너져 내릴 듯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밖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설잠, 안에 있는가?”

분명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어젖혔다. 서거정이 하인까지 대동하고 서있었다.

“선배께서 이 시간에 예까지 어인 일입니까?”
“반드시 일이 있어야 하는가?”
“아무 이유도 없이 오셨다는 말입니까?”

시습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자 서거정이 헛기침을 해댔다.

“사람하고는. 불암산 집에 들렀다가 자네 근황도 궁금하고 보고 싶기도 해서 들렀네. 이제 되었는가?”

시습이 표정을 바꾸고 은근한 미소를 보이자 서거정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 뒤따른 하인이 술과 보자기에 싸여 있던 각종 음식을 내어놓고는 물러났다.

“역시 고관대작의 먹거리가 다르긴 다릅니다.”
“예라, 이 사람아. 잔이나 챙겨오게.”

장난기 어린 시습의 우스갯소리를 서거정이 가볍게 웃어넘겼다.

“실토하시지요. 단순히 보고 싶다고 해서 찾아올 선배입니까?”

시습이 술을 따르며 먼저 운을 띄웠다.

“정말이래도 그러네.”
“믿을 수 있어야지요.”

서거정이 말없이 술병을 받아 시습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렇겠지. 개인적으로는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네. 그러나 전에도 말했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피하기 힘 드리라 보네.”
“도대체 스승님께 집착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 겐가?”
“선배님은 알고도 묻습니까?”
“허허, 사람하고는. 우선 한잔하세.”

둘 다 단숨에 비우고 동시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미운털이 박힌 거야.”
“미운털이라니요?”
“대신들 입장에서 볼 때 중 주제에 자신들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렸으니 박힌 가시가 아니었겠나, 이 말이네.”
“그럼 불교탄압은 아니란 말입니까?”
“그게 그거 아닌가?”

시습이 서거정의 말을 정리해보았다. 불교탄압이 가시화되었다고 볼 때 최우선 공략대상은 단연 당대의 고승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남다른 혜택을 누리고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스승님이라면 피하기 어려우리라 생각되었다.

“이보게, 설잠!”
“말씀하시지요.”
“설준 스님과 자네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당연히 제자와 스승이라는 차이지요.”

서거정이 소리 없이 웃었다.

“왜 그러세요?”“자네 얼마 전에 정업원에 다녀온 적 있는가?”

순간 시습이 움찔거렸다.

“선배께서 그걸 어찌 아십니까?”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나.”
“맞는 말입니다만, 어떻게 선배님 귀에까지……”
“자네 참 답답하구먼. 조정에서 자네를 처벌하자는 주장이 한동안 제기되었다네.”
“뭐라고요?”“불경을 가르친다는 핑계로 정업원에 출입한 일을 제기했네. 그것도 이틀이나 머물렀으니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거야.”
“망할 놈들. 불경 가르친 일이 뭐가 잘못이랍니까?”

짐짓 너스레를 떨고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게 골자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요?”
“자네가 여승들과 음란한 일을 벌였을지도 모르니 추포하여 조사해야 한다는 거야.”

순간 안 씨 여인을 떠올리며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는가. 진짜 그런 일이 있었는가?”
“대체 그런 일이 어떤 일입니까?”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단숨에 술을 비워냈다.
“정말로 음란한 일이 없었는가?”


서거정이 시습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쫓아왔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선배는 내가 그런 놈으로 보입니까?”
“아니지. 나도 일언지하에 차단해버렸네, 허튼 소리들 말라고.”
“먹히든가요?”
“그런데 나뿐만이 아니었네. 여러 대신들 특히 신숙주 대감이 적극 옹호했지.”

시습이 신숙주 대감을 떠올려보았다. 나름 고마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 양반, 조정에는 절대 들지 않겠다는데도 한사코……”
“알고 있네. 나보다도 그분이 더 자네를 아끼시더군.”
“선배도 저를 아낀다고요?”
“어허, 이 사람이.”

서거정이 섭섭하다는 표정을 짓자 시습이 호탕하게 웃었다.

“선배님과 저야 어제오늘 사이가 아니니 그렇다지만, 신숙주 그 양반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자네의 천재성을 인정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여하튼 그 양반 건강은 어떻습디까? 들리는 바로는 상당히 좋지 않다 하던데.”
“아마도 오래가지 못할 듯하네. 어쨌든 신숙주 대감이 사간들의 말문을 막아버리니까 모두가 바로 함구하더군.”
“그러면 된 거 아닙니까?”
“이 사람아, 본질을 보자 말일세.”“본질이라니요?”
“그래서 자네와 자네 스승의 차이를 물어본 걸세.”
“허면, 있고 없고의 차이!”
“맞네. 명성도 명성이지만, 자네는 가진 게 없는데 누가 적극적으로 덤벼들겠나. 그러나 자네 스승은 세조임금 때부터 남다른 성은을 입었지. 그러니 성은을 저버린 자네와는 확연히 다르지 않겠나.”
“실상과는 다른데도 말이지요?”
“그야 당연하지. 인간의 욕심이 물욕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시습이 서거정의 얼굴을 주시하다 다시 빈 잔을 채웠다.

“그건 그렇고, 자네 정령 이런 식으로 살다 세상 마감할 텐가?”
“이런 식이라니요. 선배님 말씀에 어폐가 있습니다.”
“그 무슨 소리인가?”
“가진 게 있기 때문에 세상살이가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내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자유롭게 살아가니, 이 삶 역시 가벼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허허, 듣고 보니 그럴듯하군. 여하튼 가끔 자네가 부러울 때가 있네.”
“선배도 훗날 그리 살려고 불암산에 집을 마련한 거 아닙니까?”
“허허, 이 사람. 술이나 드세.”

두 사람이 다정스럽게 비워내자 이번에는 서거정이 잔을 채웠다.

“그런데 말일세, 내 한 가지만 물어봄세.”
“한 가지 뿐이겠습니까?”
“정령 정업원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는가. 자네 같은 기인에게?”
서거정의 진지한 질문에 답은 하지 않고 술잔만 들여다보았다. 맑은 술 위에 안 씨 여인의 얼굴이 그려졌다.

파계

비가 내리는 날 오후였다. 정자 안에서 시를 쓰며 시름을 달래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빗소리인가 하고 심드렁하니 대했는데 다시 소리가, 그것도 분명 가녀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안 씨 여인이 도롱이를 쓴 채 서 있었다. 안 씨 여인을 보자마자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마당으로 내려갔다. 꿈에도 그리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다니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마른침만 넘어가고 자꾸 헛기침만 나왔다.

“어인 일이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무얼 그러느냐고 말하는 듯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일단 들어갑시다.”

안 씨 여인이 머뭇거리자 시습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먼저 정자로 올라서서는 내려다보았다. 안 씨 여인이 잠시 멈칫거리더니 천천히 도롱이를 벗어 내려놓고 시습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유난히 반짝였다. 아니 간절해보였다. 시습이 겸연쩍어 시선을 피한다는 것이 어느새 여인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도롱이를 쓰고 왔는데도 온몸이 거의 다 젖어있었다. 비에 젖어 투명해진 옷을 뚫고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빛에 조금만 닿아도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시습의 정신이 다시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어서 들어… 오시……”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떨려 말을 잇지 못했다. 그를 아는지 안 씨 여인이 사뿐사뿐 정자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물기 머금은 산수국 한 송이가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마음도 진정시킬 겸 정자 안을 대충 치우고 둘러보았다. 다기가 눈에 띄었다.

여인이 정자 안으로 들어선 모습을 확인하고는 마당으로 내려가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을 달래야 할 듯했다. 아니 비에 젖어 떨고 있는 안 씨의 몸을 따스하게 녹여주고 싶었다. 습해서인지 다른 때보다 물이 더디 끓었다. 마음이 급하면 급할수록 세상일은 그만큼 더디다는 생각을 하며 입김을 불어대자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사이로 안 씨 여인의 얼굴이 그려졌다가는 사라졌다. 시습이 연신 입김을 불어대자 드디어 물이 끓기 시작했다. 끓인 물을 들고 정자 안으로 들어갔다. 파리한 얼굴로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급히 차를 타서 건넸다.

“제가 무례한 행동 한 것은 아닌지요?”

그리도 그리던 사람을 마주하자 갑자기 숨이 멎는 듯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안 씨 여인이 애틋한 시선으로 시습의 표정을 살피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사적으로 시습도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시오?”
“아무래도 제가 결례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뭐요!"

순간적으로 시습의 목소리가 냉랭했다.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듣고 싶지 않은 무서운 말이었다.

“그럴 수는 없소!”

외마디 소리와 동시에 안 씨 여인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반사적으로 몸부림을 치자 팔에 힘을 주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모를 일이었다.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마치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행동으로 느껴졌다. 따스한 체온을 느끼자 더욱 그렇게 믿고 싶었다. 몸뿐만 아니라 향기로운 냄새까지 몸속 곳곳을 파고들어와 완전히 해체시키는 것만 같았다. 빗소리마저 잦아드는 듯했다.

“가지 마오!”

시습이 여인의 어깨를 감쌌던 팔을 허리께로 움직이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윽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린 꽃잎 같은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의 가녀린 몸에서도 눈물이 솟구치는 듯했다. 닦아주고 싶었다. 영원히 흐르지 않게 그녀의 몸에서 눈물 자체를 없애 줘야겠다는 욕구가 강렬하게 치솟았다. 시습의 손이 그녀의 몸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등잔 불 아래서 마치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안 씨 여인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이상했다. 그리던 사람이 스스로 다가와 몸과 마음을 의탁했다면 뿌듯한 느낌이 들어야 하건만 오히려 정반대였다. 가슴속으로부터 솟구치는 실체 없는 생각에 자꾸 불안했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로지 빗소리만이 캄캄한 밤에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천천히 개울로 걸음을 옮겼다. 나무뿌린지 돌인지 무언가가 자꾸 발에 걸렸다. 휘청거리고 넘어지면서 눈에 익은 길을 더듬어 간신히 개울에 도착했다. 빗소리와 함께 흐르는 물이 마치 자신의 추악한 행동을 질타하듯 굉음을 질러댔다. 시습이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늘 세상과 구별시켜주었던 옷이었다. 먼저 상의를 벗어 물속에 담갔다가 깜깜한 허공을 향해 있는 힘껏 돌리기 시작했다. 탄력을 받아 저절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손을 놓았다.

한바탕의 회오리가 지나간 듯 묘한 느낌이 찾아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고독감이 일거에 사라져버린 듯했다. 그것은 분명 환희였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지난 시간에 쌓았던 자신만의 성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데에 대한 허탈감과 견지했었던 원칙들이 사라진 뒤의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하의를 벗었다. 잠시 주저했다가 물속에 담갔다. 또 방금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날려버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솟구치는 격정을 부채질한 자신의 물건을 만져보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풀죽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혼자만의 세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흔히 남들이 이야기하는 반쪽, 자신과 하나 되어 줄 수 있는 존재를 마침내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그 반쪽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솟구쳤다. 더듬어 나뭇가지를 잡고 조심스레 개울에 발을 담갔다. 보이지는 않지만 물이 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깊이가 가늠되지 않자 발바닥이 자연스레 예민해졌다. 미끄러지지 않게 발의 위치를 움직여가며 균형을 잡고는 그대로 몸을 낮추었다. 차가우면서도 상큼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눈을 감고 머리까지 잠기도록 그대로 주저앉았다.

정신이 맑아지자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이상과는 반대로 돌아가던 현실. 유교의 교리는 의미 없어진지 이미 오래다. 또한 자비심이 가장 많이 돌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부처는 더 이상 자비롭지도 않았다. 세상에 넘쳐나는 것은 그저 자신의 명리만을 쫓아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부나방들뿐이었다.

유교의 교리로 가득한 현실에서 무장하기 위해 심취해보았지만 사는데 필요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해서 찾은 것이 불교였으나 그도 완전하지 않았다. 외형상으로는 중의 행색이었지만 철저한 불자도 되지 못했다. 오직 그 어떤 것에도 그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못하는 항상 자유로운 김시습이었을 뿐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드는 순간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리꽂혔다.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 미쳐 돌아가는 추악한 세상에서 꼴 같지 않게 유학자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비심도 인정도 사라진 병든 세상에서 중은 무슨 놈의 중. 그래, 파계다.”

마치 천둥소리에 대적이라도 하는 듯 힘껏 소리 질렀다.

“파계다, 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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