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잊혀진 독립운동가들! 햇빛 비추일 날을 소망하며

노가연 기자 / 기사승인 : 2020-12-02 09:3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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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탄압 역사속 숨겨진 독립운동가 마음 아파
숨겨진 영웅들! ‘독립운동 보훈대상’ 사유 탈락

●  광복!  애국선열들 값진 희생의 피의 대가


삼일운동 100주년이 지난지도 이제 일 년이 다 돼가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숨겨진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조명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영향을 받아 혁명군에 가담한 의사 이태준 선생, 한국독립당 특파원으로 만주에서 피격당해 사망한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로 불리는 남자현 여사, “아리랑”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나운규 선생, 그리고 과학자였던 김용관 선생까지. 광복은 항일의병에서부터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흘린 피의 대가로 얻은 결과였고 거기에는 직업과 성별과 나이의 구분도 없었지만 일제에 의해 역사 속에 숨겨진 거룩한 독립운동의 혼이 희미해져만 간다.

▲ 김용관 선생

김용관 선생은 국민 계몽 운동에 앞장섰던 한국 현대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23년 민족 산업의 독립적 발전을 모도하기 위해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으며, ‘발명 학회’를 창립하고 1934년에는 ‘과학의 날’을 제정하는 등 과학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데 앞장섰다.

1938년 4월에는 ‘제5회 과학의 날’을 맞이하며 과학지식보급회와 발명학회가 친일파에 의해 잠식되던 현실을 개탄하는 강연을 한 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42년까지 옥살이를 한다. 석방 후에도 여전히 일제 경찰의 ‘인물 블랙리스트’에 올라 은둔 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

한때 숨겨진 영웅들에 대한 재조명 바람이 활발히 일기도 했지만 김용관 선생 등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증거자료 불충분’,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 등의 사유로 여전히 보훈처의 포상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김용관 선생은 1967년 작고 시까지 국가 발전 초석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하고도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 서훈 심사에서는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이라는 사유로 탈락하고 있다. 재판기록이나 수감기록 등 독립운동과 관련된 구체적인 서류가 없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각종 문서들이 소실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를 찾아내야 할 의무를 국가가 저버리고 있는 셈이다.

여성으로서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백신영 결사부장, 65세 나이로 폭탄을 던진 강우규,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 암살은 기도한 남자현, 윤동주의 사촌이며 독립 운동가이자 수필가로 활동한 비운의 천재 송몽규, 언론가이자 영화감독, 영화배우로 항일 예술혼의 상징이었던 심훈, 임신5개월 임산부의 몸으로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가 공개되기 전까지 친일파로 오해받은 정치가 이유필 등.

후손의 삶까지 괴롭혀온 변절자의 누명은 벗었지만 억울한 감정을 호소할 데가 없는 작고한 독립운동가들, 생존을 위해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울 수밖에 없었던 숨은 애국자들, 본인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독립투사의 혼을 알지도 못한 채 일본의 망언과 우경화에 무덤덤한 젊은이들, 그리고 아직도 친일파의 오명으로 괴로워하는 진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억울하고 서운하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의술로 도와야 한다는 인술(仁術)의 정신이 독립운동가로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는 신홍균 선생이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한의사가 군의관으로 참전했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하는 현실에서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한의사만도 총 7명이 된다.

이들도 다른 숨겨진 독립 유공자들과 마찬가지로 관련 자료가 부족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자신들의 뿌리를 찾고 국가유공자의 얼을 기리고자 하는 후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독립유공자 한의사가 탄생했을 것이다.

●  故 차형준 목사의 독립운동 비화

세계일보 국제부 동경 특파원 김동진 기자가 쓴 실전적 논픽션 소설 <1923년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에서(의열단, 경성의 심장을 쏘다)>에서 의열단 단원인 김시현, 홍종우와 일본경찰 간부이자 의열단 비밀단원인 종로서 황옥 경부가 안동 현을 거쳐 경성까지 폭탄의 밀반입을 시도하던 장면을 우리는 영화 ‘밀정’을 통해 보았다.

당시에 일제는 독립 운동가들을 매수하여 밀정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고, 독립운동가들 입장에서는 이들을 색출하여 처단하기도 했다. ‘김한’이라는 인물은 김원봉의 지시로 폭탄 운반을 맡았는데 김한이 밀정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의열단원들은 그를 의심하고 작전에서 배제시켰다.

하지만 실제로 김한은 매수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황옥이 폭탄 운반에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탄로 났을 때에도 일본 고위 간부는 의열단이 황옥을 제거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 차 형준 목사-뒷줄 중앙 흰옷 입은 분, 정읍교회, 연대 미상            ▲ 숨겨진 독립운동가 차형준 목사

 

이렇게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이었는지에 대한 진실은 시간이 충분히 많이 흐른 지금도 알 길이 없다. 대부분의 기록이 소실됐으며 각자의 이유로 누군가에 의해 삭제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안동 현의 조선인촌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독립 조직과 연락책으로 활약한 사람들 중에 차형준 목사가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차형준 목사의 업적을 독립운동가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후 정읍으로 이주해서 차학연, 차형준을 포함한 차씨 일족은 꾸준히 각종 독립조직에 금전적인 후원을 계속하는 것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이런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차병원 그룹의 창립자인 차광렬 연구소장은 여전히 국가와 민족을 위한 후원을 계속하고 있다.

숨겨진 독립운동가로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차형준 목사는 어둠에 갇힌 이 땅의 민중을 깨우고, 독립 운동가를 도우며 서북과 만주 벌판을 내달리던 선각자였다.

●  차형준 목사의 정신 후대에 이어져

차형준 목사의 막내아들 차경섭 박사는 전주 신흥고보 출신으로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한때 고향인 의주에서 개업하기도 했으나, 해방 후 큰 꿈을 가지고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옛 스카라 극장 앞에 차 산부인과를 개원하였다.

 

▲ 57년을 여성의학에 헌신한 차경섭 박사

 

1984년 아들인 차광렬 연구소장이 강남차병원 시대를 열며 현재 차병원그룹이 시작 되었다. 차광렬 회장은 난임 연구로 세계적인 명의가 되었고 할아버지 차형준 목사의 선교정신을 이어 받는 대신 활발한 의료 활동과 후학양성으로 유명한데, 1998년 IMF 시절에는 어려움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400억 상당의 개인재산을 기부하였고, 차의과대학교를 설립해 의대생들에게 전원, 전액, 전학년 장학금을 주며 후학 양성에 앞장 서 왔다.

차광렬 연구소장(차형준 목사의 손자)이 이끄는 차병원그룹은 이제 세계 바이오 의료산업의 선두에 서 있다. 차형준 목사 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후손에 의한 지속적인 노력으로 결실을 맺는다면 故 차형준 목사의 숨겨진 독립운동 비화가 인정받고 그의 노고를 기리는 일이 현실화될 것이다.

 

노가연 기자 < ngy9076@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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