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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군에게 넘겨져 압송되는 전봉준 녹두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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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말라붙은 강가에서 징소리, 제금소리가 울려 퍼진다. 누가 병들어 죽었나 보다. 마을 사람들이 빙 둘러앉은 가운데 신복을 차려입은 무당이 굿을 하고 있다. 들어보니 못된 귀신들을 쫓아내는 축귀경(逐鬼經), 병굿이다.
마을마다 생떼 같은 젊은이들이 죽어가니 아예 마을사람들이 주관하여 굿판을 벌인 모양이었다. 푸닥거리를 하고 있는 곳은 얼마 전까지 탐관오리들이 모여 앉아 음주가무를 즐기던 곳이다. 탐관오리들이 지나간 자리에 병자(病者)만 남았단 말인가?
물이 말라붙은 강가에서 징소리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징소리와 제금소리가 뚝 그쳤다. 징소리와 제금소리가 멈춘 적요 속으로 희미하게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들판을 향해 일제히 시선을 보냈다.
들판 저 멀리 흰 옷 입은 무리들이 함성을 지르며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굿판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이 짚신을 꿰신고 일어나더니 너나 할 것 없이 무리들을 향해 달려갔다.
건너 마을 산자락 따비밭 옆에서 칡뿌리를 캐고 있던 남정네와 양지 쪽 검불 속에 돋아난 산나물을 캐고 있던 아낙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함성을 지른 사람들이 손에 뭔가를 움켜쥐고 우르르 어디론가 몰려가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오늘이 바로 그날, 고부(古阜) 관아(官衙)로 쳐들어가 군수와 담판을 짓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양력으로 2월 15일, 음력으로는 1월 10일이었다.
사람들이 헛갈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까지 써오던 음력 대신 1896년 1월부터 양력을 사용한다며 미리 시범 운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집안 행사나 약속을 할 때 여전히 음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불현듯 곤장을 맞던 부친 떠올려
지난 해 11월, 전봉준은 농민 몇 사람과 함께 관아를 찾아갔다. 만석보(萬石洑)의 수세(水稅)에 대한 진정을 하기 위해서였다. 백성들을 끌어다가 노역을 시키고도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가 하면, 게으름 피운다며 매질을 해대는 관리들의 시정을 요구하는 방문이었다.
하지만 군수는 너그럽지를 못했다. 모든 잘못을 노역 인부에게 돌렸다. 일을 하지 않고 관아를 찾아온 게 다 동학 패거리의 소행이라고 신경질을 부렸다. 전주 감영과 협력하여 동학 무리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소탕해 버릴 거라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리고 선량한 농민들은 동학 패거리와 어울렸다간 공연히 경칠거라며 고향으로 돌아가 관아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농사일에 전념하도록 했다. 그날 이후부터 고부관아에서는 ‘농민’이란 말 대신 ‘동학당’ 혹은 ‘동학군’이라거나 ‘동학 무리’, ‘동학 패거리’라고 바꿔 불렀다.
전봉준은 불현듯 곤장을 맞던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분노가 치솟았지만 충동을 억누르고 다시 한 번 간곡히 청했다. 하지만 군수는 완고했다. 굿을 한 곳이나 초상난 집 등 사람이 모이는 곳에 이정(里正, 조선시대 최말단 지방행정조직인 이(里)의 책임자)을 보내 동태를 살핀 뒤 즉시 관아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안 될 일이었다.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하여 집회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급기야 조병갑(趙秉甲)이 고부를 떠나 익산군수로 갔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떠나간 군수가 다시 고부군수로 재임명되어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백성들의 등소(等訴;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에 올려 호소함)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백성들은 관리들이 자신들을 우롱한 것이라며 분노했다. 군수가 부임하지 못하도록 거사를 약속하고 사발통문을 돌린 게 지난 해 11월, 그리고 오늘이 약속한 그날이었다.
누렁이조차 적의는커녕 꼬리 흔들며
“國穀偸食(국곡투식)한 무리들을 몰아내자!” 멀리서 분노에 찬 함성이 고부관아에까지 들려왔다. ‘국곡투식’이라니!’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음주가무를 일삼던 조병갑의 귀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단어가 파고들었다.
‘국곡투식허는 놈과 부모불효허는 놈과 형제화목 못 하는 놈 차례로 잡어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버리고-. 노방사 께끼로 지은 치맛자락을 한들거리며 명창이 뽑아낸 ‘사철가’의 한 대목이었다. 옳거니-, 하고 추임새를 안주삼아 한잔 쭈욱 들이키던 미주(美酒) 향이 아직 코끝에 어른거리는데, 저런 고약한 뜻이 담겨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예상은 했지만 부임한 첫날부터 큰 낭패였다.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할 인간들 중 첫 번째로 ‘국곡투식헌 놈’이라 하고 있다. ‘국곡투식 한 무리’라면 ‘나라나 관청에서 소유하고 있는 돈이나 곡식을 훔쳐 먹은 자’란 뜻.
천하에 쥑일 놈들. 조병갑은 이를 갈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포졸들과 봄볕에 졸고 있는 누렁이까지 죄다 끌어다 관아 밖에 진을 치고 경계를 단단히 하도록 일렀다. 한 놈도 빠짐없이 모두 옥에 처넣어 물고를 낼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파는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고, 그 함성은 우레처럼 천지간을 뒤흔들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발뒷꿈치를 들고 담장 밖 너머를 바라다보았다. 흙먼지가 부옇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 사이로 흰옷 입은 무리들이 몰려오는데, 그 수효가 시야에서 넘쳐날 만큼 불어나 있었다. 족히 수만 명은 됨직했다.
“수만이라면…” 조병갑은 눈알이 화등잔만 해졌다. 한성부 보고에 따르면, 그러께 조선팔도 전국 호구수가 157만6622호에 인구수가 663만3166명이라 했다. 몰려오는 저 동학 무리가 3만이라고 치더라도…. 입이 딱 벌어질 상황이었다.
“정말 괘씸하고 고이현 놈들.” 부득부득 이를 갈았지만, 상황이 위급했다. 분노한 자들에게 자칫 잘못 걸려들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일단 자리를 피하고 볼 일이었다. 급하게 아전들을 불러 뒷문을 열도록 했다. 전주 감영으로 갈 작정이었다.
관아에 들어선 전봉준은 허탈했다. 관아 문은 쉽게 열 수 있었다. 그런데 군수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포졸을 잡아 물어보니 “급히 일이 생겨 아침 일찍 전주 감영에 행차하셨다”는 거였다. 상전에게 피해가 없게끔 은근슬쩍 둘러 댄 품이 과연 국록을 먹고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뻔한 수작이었지만 포졸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토끼뜀뛰기 이백 개를 시켰다. 그들도 따지고 보면 ‘을’이었다. 관아 문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포졸들도 그랬다.
처음에는 다소 대항한 듯하였으나, 대치하고 있는 쌍방관계가 형님 아우이거나 아저씨 조카, 오빠 동생, 사돈네 팔촌으로 뒤섞여 있었다. 누렁이조차 적의는커녕 꼬리를 흔들며 되레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때문에 문은 쉽게 열렸고,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청국은 서둘러 함대를 아산 앞바다로
한편 북접(北接)의 농민군들도 충청도 진잠(鎭岑)과 회덕(懷德) 관아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현령의 탐학에 못 이겨 강원도 금성(金城)에서 민란을 일으킨 농민들이 삼남지방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보고도 있었다.
또한 경상도 함안과 사천, 김해 등지에서 봉기한 농민들도 농민군에 가세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들은 관아를 점령한 뒤 창고 문을 열어 탐관오리들이 축재한 재물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재정비를 하고 있다 하였다. 고부 관아를 점거한 농민군 본진은 전북의 부안과 금구(지금의 김제군 금산면)를 점령하고 이어 황토현(黃土峴)으로 진군하였다.
황토현에는 전주 감영 관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관군들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농민군 역시 사냥꾼들에게 수집한 총과 죽창, 괭이와 쇠스랑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전주 감영 관군 250여 명은 농민군 수만 명에 비해 수적에서 열세했다. 관군이 아무리 총으로 무장을 했다지만 룰도 없이 사활 걸린 게임에서 승패는 이미 판가름 난 거나 진배없었다.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정읍을 거쳐 4월 27일 전주를 점령했다.
관군이 패배하고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보낸 관리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조정에서는 묘책을 궁리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청국에 농민군 진압을 위한 원병을 요청하기로 했다.
청국으로서는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잖아도 명분을 만들어 조선을 장악해야 하겠는데 일본과 맺은 조약 때문에 함부로 군사를 파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청국은 원병 요청에 따라 서둘러 함대를 아산 앞바다로 보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도 청국의 조약 위반에 항의하며 함대와 기병 등을 인천항으로 보냈다. 삼남지방, 특히 충청과 전라 지방의 농민군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서해안으로 진입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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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응순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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