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주간 선정 올해의 인물] 평화비 소녀·위안부할머니..

노정금 / 기사승인 : 2011-12-26 10: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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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덧 20여년… 위안부 할머니들의 외침
“평화비 소년 동상 ‘평화’의 씨앗 심은 것”


▲ 일본 대사관 맞은 편에 세워진 '위안부 평화비'
[일요주간=노정금 기자] 지난 21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 이끄는 일본군 ‘위안부’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1001번째를 맞이했다.

1992년 1월부터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작한 ‘수요시위’는 어린이, 청소년, 일반인 등 국내외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일본이 ‘위안부’ 범죄를 인정하고 이에 따른 배상과 사과할 것을 힘겹게 외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희망의 자리다.


1001번째 ‘수요시위’에는 지난 14일 1,000번째 시위 때 정대협에서 ‘위안부’ 문제가 역사에 남길 것을 기해 세운 ‘위안부 평화비’가 세워지고 첫 번째 시위였다. 또 최근 한·일 정상회담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소녀형상 ‘위안부 평화비’를 철거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번 1001번째 집회는 할머니들의 분노가 더욱 울려 펴졌다.


이 날 위안부 할머니들은 시민들이 기증한 ‘희망 승합차’를 타고 시위에 참여한 김복동(85)·길원옥(84)씨 등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영하의 추운 날씨 속, 내리는 눈을 맞으며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죄를 거듭 촉구했다.

‘위안부 평화비’소녀, 일본 대사관 응시

‘위안부 평화비’는 정대협 김판수 자원봉사자가 처음으로 안건을 내 걸고 정대협 회원들의 동의하에 만들어진 동상이다.


김판수 자원봉사자는 “평화비는 정의가 짓밟혔던 억울하고 아팠던 기억을 되새기며 꼭 오고야 말 ‘평화’의 씨앗을 심은 것이다”라며 “정의와 평화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당당하게 평화로를 지킬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동상은 지난 2010년 10월 13일 수요시위 때부터 모아진 모금으로 만들어졌다. 이름을 남긴 참여 시민은 1,402명으로 알려지고 익명의 모금을 해 준 사람도 이에 못지않은 수라고 한다.


김씨는 “평화비 건립을 기뻐하면서 ‘힘을 모으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 더 큰 성취가 아닌가 생각한다”라며 “불의를 역사에 묻어 버리고 정의를 바로 새운 평화로운 세상을 맞이한다”라고 앞으로 계속해서 이들을 위해 지켜나갈 것을 내비췄다.


‘위안부 평화비’는 전체적 형상은 작은 의자에 걸쳐 앉은 소녀가 일본 대사관을 조용히 응시하는 모습으로 일제시대 강제로 납치되었던 당시의 어린 소녀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평화비를 보면 왼쪽 어깨에 새 한 마리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정승과 이승의 영매로서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기다리다 먼저 가신 할머님들과 함께 하는 뜻을 지닌다.


또 동상이 세워진 뒤쪽 바닥을 보면 할머니 형상의 그림자가 있다. 이것은 쉽게 지워지거나 잊혀지지 않는 역사를 증거 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이번 평화비는 김운송 미술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김 선생님은 “가슴에 나비 한 마리를 새겼다. 이는 슬픔과 괴로움을 안고 돌아가신 할머님들의 영혼을 뜻한다.”라고 새를 상징하고 나비를 상징하는 것이 깊은 의미가 있음을 강조했다.


1001회 ‘수요집회’를 마친 다음날 한산한 거리에 ‘위안부 평화비’를 지나치는 37살 최모군은 “우리나라에는 안 좋은 일이다. 일본은 옛날이야기로 생각돼 사과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다.”며 “우리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한국인으로서의 마음을 보였다.


20여년 ‘수요집회’를 하며 지난 2006년 위안부 할머니들이 헌번재판소에 한국정부가 인권유린에 대한 부분을 책임져야 한다는 소송을 낸 것이 올 8월 헌법재판소의 정부의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면서 대중들도 이제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는 것을 안 것이다.


어느 덧 할머니들이 힘겹게 싸운 시간이 20여년이 훌쩍 넘었다. 위안부할머니들과 20여년을 같이해온 정대협 관계자는 “할머니들은 그냥 따뜻하게 살고 싶은데 아직까지 본인들이 나서야 알아주니 수요일 마다 힘든 몸을 추스르며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하고 있는 것이 가슴이 가장 아프다”라며 그들을 대변했다.


올 해가 가고 내 년에도 ‘수요시위’는 정오 12시에 ‘위안부 평화비’와 지나간 영혼들과 함께 일본대사관 앞에서 끊임없이 이어진다. 일본이 정당한 사과와 진상규명을 할 때 까지다.

위안부 할머니들, 한국 정부에서도 적극 진상규명 해명 촉구

정대협 관계자는 할머니들이 일본에 건너간 나이는 모두 다르지만 대부분 13~14살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는 제 2차 세계대전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여성 10~20만명을 국가제도로 기획 입안해 조직적으로 강제연행, 납치해 일본군의 성노예로 만든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범죄다.


처음 ‘위안부’에 대해 알기 시작한 것은 1991년 故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문제를 제기, 생존자들이 속속 등장 하면서다. 그의 용기 있는 증언에 세계 각국의 많은 피해여성들이 자신들의 피해를 증언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는 한, 일간의 문제가 아닌 국제적인 문제로 야기됐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는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재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은 대부분 80-90대 이르는 고령으로 2011년 현재 한국정부에 등록된 234명 할머니 중 70명만 생존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권을 유린당하고 여성폭력으로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한국정부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범죄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1992년 1월 24일 외무부내에 '정대협실무대책반'을 만들어, 정부 각처에서 문서자료를 조사하고 내무부와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정신대 피해자 신고'를 접수 받았다. 대부분 생존자들이 어려운 경제 상황이었기에 생활안정지원법(1993년) 제정을 촉구하여 임대아파트(11-18평)를 제공하고, 일본전범의 출입국금지법안(1997년)을 통과시키는데 적극 노력했다.


정대협은 “1998년 5월, 법적배상을 회피하기 쉬운 수단으로 일본정부가 민간차원의 위로금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Asian Women's Fund)을 지급하려는데 대응하여 민간차원에서 범국민모금을 두 차례(1997, 1998년)에 걸쳐 실시하여 위로금을 지급하였다.”며 “동시에 한국정부로 하여금 정대협 모금액에 정부예산을 추가해 4,300만원의 생활안정지원금을 지급토록 활동하여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밝혔다.

일본에서 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일본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어요. 일본사회 자체가 이 문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해요. 일본 측은 1965년 ‘한,일 협정’에서 다 해결을 했다고 하고 있는 입장 이예요.”


일본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한 여성이 이야기 한다. “일본은 이 문제에 대해 진심이 없는 것 같아요.”라며 “하지만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다른 의견을 내 놓고 있는데 이것은 해결된 것이 아니죠”라고 덧붙였다.


지난 1991년부터 한국, 필리핀, 대만, 중국, 네덜란드의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에 총 9건의 소송을 제기 했지만 모두 패소했다. 단 1998년 시모노셰키 지방재판소에서 일본 정부에게 입법부작위에 의한 배상을 명한바 있다. 하지만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와 최고재판소에서 기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의 지난 19일 정상회담에서 일본 ‘위안부’문제가 주요 안건으로 떠올라 이 문제를 거론 했지만 일본 측은 당장 ‘위안부 평화비’를 철거하라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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