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은 언제나 고통으로 책임져 왔다.”
“백성은 책임지는 자들이 아니라 보살펴야할 존재들이다.”
“백성은 어리석기 때문에 속일 수 없는 것이고 글자를 얻고 지혜를 가짐으로써 위정자들에게 더 많이 속게 될 것이다.”
[일요주간=박봉민 기자] 오늘날 정치인들이 가슴에 새겨야할 주옥같은 대사들을 남기고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드라마의 재미와 완성도를 떠나 <뿌리 깊은 나무>가 시청자들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백성이 있었다. 이를 동양에서는 ‘민심이 곧 천심’이라 하여 백성을 하늘로 여겼고 서양에서 역시 시민의 안녕과 평안을 위한 갖가지 이데올로기가 정립되었다. 민주주의가 그러하고 사회주의가 또한 그러하다.
특히 20세기 이후 인류는 민중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가치의 대립으로 끊임없이 서로 경쟁하고 투쟁해 왔다.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대립’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로 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가장 정치적으로 묘사한 작품이었다.
“그대 백성을 사랑하는가” 이도와 처음 마주한 정기준이 이도에게 말한다. “그대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백성이 귀찮을 뿐이다”
백성은 돌보아야할 존재이며 ‘재상총재제(宰相?宰制)’를 통해 지식을 가진 사대부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기준에게 글자를 만들려는 이도는 그를 통해 자신의 책임을 백성에게 떠넘기려는 사악한 군주로 비친다.
이도는 말한다. “수많은 왕조와 군왕들이 이 땅에서 명멸해 갔지만 백성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역사는 그렇게 움직여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움직여 갈 것이다”
역사의 중심에 백성이 있다는 생각. 그래서 그들이 힘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당연하지만 위험한 그의 생각이 정기준에게는 무책임으로 비친 것이다. 그래서 정기준은 ‘재상총재제’의 이상보다 글자의 폐혜를 막는 것이 더욱 시급했다. 자신의 이상보다 백성의 안녕이 더욱 중요했던 정기준.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는 분명 백성을 생각하는 지도층이었다.
이도 역시 핍박받는 백성들에게 ‘글자’라는 무기를 쥐어줌으로써 그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갖기를 원했던 이도. 그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권력을 나눌 준비를 했던 이도. 그 역시 백성을 생각하는 참된 군주였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는 것인가? 백성이 있고 나라가 있는 것인가?” 유사 이래 끊임없이 논쟁을 펼쳐온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위정자들이 잊고 있는 한 가지는 ‘백성이 곧 국가이며 국가가 곧 백성’이라는 ‘국민동일(國民同一)시원칙’이다.
어느 하나도 서로를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와 역사의 잘못에 백성은 언제나 고통으로 그 책임을 져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정치는 바로 ‘백성의 나라, 나라의 백성을 위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세만세(千歲萬歲) 이어갈 ‘뿌리 깊은 역사’, ‘위대한 국가’를 완성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정치인들에게 묻는다. “그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 곳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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