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의 경영스타일은 한 마디로 말하면 묘수풀이 식 바둑돌 경영으로 말할 수 있다.
삼성그룹의 창업주이자 이 회장의 아버지인 고(故) 이병철 전 회장의 경우 계열사 경영, 자신의 재산 증감 사항 등을 꼼꼼히 챙기고 일일이 지시하는 스타일이었다. 이경식씨는 자신의 저서 ‘이건희 스토리 생애와 리더십’에서 이병철 회장은 매달 사장들을 자신의 방으로 호출해서 그 달의 경영 성과를 보고받고 중요한 경영 판단과 임원급 인사 혹은 핵심인물의 인사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비서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재산 변동 현황을 보고받고 챙겨왔다고 한다. 전통적인 창업주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의 경우 일단 실무의 대부분을 전문 경영인에게 전폭적으로 일임하는 스타일이다. 또 자신의 재산 변동 현황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이건희 회장은 자신이 판단했을 때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짧은 순간 강하게 경영권을 행사하고 자신의 지시가 만족스럽게 이행됐을 때 뒤로 빠지며 관망하는 경영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첫번재 승부, 이병철 그림자를 걷어내라!
이건희 회장의 첫 번째 승부는 첫 취임 후 5년 동안 삼성그룹 내 이병철 전 회장 가신들과의 경영권 투쟁이었다. 이는 삼성그룹에 남아있는 이병철 그림자와의 투쟁이다.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 전 회장의 사후 당시 이건희 부회장이 2대 회장직을 물려받았으나, 그룹 경영의 의사결정은 사실상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의 소병해 실장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지고 있었다. 이 때 이건희 회장은 소병해 비서실장을 필두로 하는 선대 회장의 가신세력과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 것이 그룹 경영권의 20:40:40 안분론이었다. 본래 이병철 회장 시절 삼성그룹의 경영권은 오너인 이병철 회장이 80%를 쥐고 있었고 나머지 20% 중 각 계열사 고유의 업무와 관련된 10%는 계열사 사장에게, 그리고 전체적인 의사결정 부분의 10%는 비서실장이 행사하도록 했었다. 사실상 이병철 회장의 철권 경영체계였던 것이다. 이것을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 대의 경영행사 구조를 혁파하여 내 시대에는 내가 20%정도의 경영권만을 행사하겠다. 나머지 40%는 온전히 회장 비서실에게 위임하고 나머지 40%는 계열사 사장에게 위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겉으로 볼 때 이건희 자신은 뒷방으로 물러나고 비서실과 사장단에게 책임경영을 맞기겠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당시 소병해 비서실장의 권한은 자신에게 맡겨진 10%와 이병철 회장 사망 직전 소병해 비서실장의 권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10%의 경영권 뿐 아니라 이병철 회장을 대신한 80%의 경영권 까지 행사해 왔다. 즉 이병철 회장이 노환 등으로 경영에 잘 참여하지 못하는 관계로 소병해 비서실장이 사실상 삼성그룹의 주인 행세를 해 온 것이다.
그러나 박원배, 이경영 등 삼성그룹에 대해 연구해 온 인사들의 말을 빌리면 이 말은 각 계열사 사장들의 권위를 소병해 비서실장과 동등한 위상으로 올려줘서 서로 견제를 시키겠다는 의미이고, 삼성그룹 사장단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소병해 라인을 견제하겠다는 숨은 의도가 내포된 발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 이때부터 소병해 비서실장의 무소불위적 경영권은 사장단에 의해 조금씩 견제를 받기 시작했고 1992년 말 결국 소병해 비서실장이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발령 나면서 이건희 회장의 걸림돌이 치워졌다.
그리고 다음해인 1993년 이건희 회장은 가장 열정적인 경영활동을 보인다.
이 시기 이건희 회장은 2월 미국 LA에서 진행된 전자제품의 수출실적 부진 대책회의에서 수출부진의 원인을 타 계열사 탓으로 돌리는 발언을 한 임원을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고 쫒아냈다. 이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은 “나는 지난 2월부터 머리와 몸이 팽팽 돈다. 금년 말까지 마지막으로 진짜 바뀌어 보자. 과장급 이상 모두 만나겠다. 다 뒤집어 보자. 나는 변화를 위해서 이것(목숨과 재산)을 걸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3월 22일 서울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삼성그룹 창립 55주년 기념사에서 질경영과 계열사 책임경영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6월경에는 비서실 내 홍보팀 직원들을 시켜 주요 공장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세탁기 불량 제조 과정을 포착한 후 그 것을 계기로 전 임원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집결해 강하게 질타하기 시작했다. 이 때 이건희 회장은 60대가 넘은 삼성그룹 사장들을 대상으로 “노망기”라는 단어를 쓰며 강한 어조로 2선 퇴진을 요구하게 된다.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를 시작하면서 이건희 회장이 행한 모두발언이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으로 알려지고 이것이 당시 문민정부와 코드를 맞추면서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온전히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두 번째 승부, 세계 시장을 장악하라!
이건희 회장의 두 번째 승부는 1992년 삼성전자 수원공장의 반도체 생산시설을 6인치에서 8인치 라인으로 전격 교체하는 설비투자를 단행한 결정이었다. 이 결정은 결국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회사의 명운을 걸겠다는 선언이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의 이같은 결정이 바보 같은 행동으로 비춰졌던 것은 전 세계 전문가들이 앞으로 메모리 부문은 사양산업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을 비롯한 전자산업 선발주자들은 메모리 사업의 철수에 대해 조심스럽게 타진 중이었으며, 정부에서도 이건희 회장의 실패 가능성을 점치며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당시 이건희 회장의 바보 같은 행동은 2008년 탁월한 선견지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 일본 삼성의 사장을 지냈던 이창렬씨는 “일본 경단련 맴버들은 이건희 회장이 도대체 어떤 자료나 분석을 근거로 그토록 빠르고 정확하고 과감한 의사결정을 했는지 궁금해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보다 수십배 뛰어났던 소니, 미쓰비시 등 일본 대기업들보다 더 고급 정보를 접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이와 관련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의 이같은 결정을 전형적인 역발상이라고 말한다. 이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이 읽은 자료와 보고서 등은 세계 최고 경영진과 국가 등 소수만 보유하고 있는 바로 그 시장 보고서였다”며 “이 보고서와 당시 반도체 시장 상황을 본 유수의 반도체 업체들이 메모리 사업의 축소를 결정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내고 그 곳에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삼성그룹 내 임원들은 이건희 회장의 이같은 결정에 대놓고 반대의견을 피력하지는 못했지만 강한 우려를 나타냈었다. 삼성전자 전 상무 출신 한 관계자는 “당시 이건희 회장의 이같은 결정에 동조하는 경영진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함부로 반대할 수도 없을 만큼 회장의 의지가 너무 확고했다”고 말했다.
세 번째 승부 이부진의 호텔신라 입성
이건희 회장의 세 번째 승부는 이재용 대세론과의 싸움이다. 이재용 대세론은 당시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 직을 맞았던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이 이건희 회장의 아내인 홍라희 리움미술과장의 의중에 따라 만들어 갔다. 그러나 이재용 대세론은 삼성그룹 내 이재용 파벌을 형성하고 이건희 회장의 경영권을 조금씩 위협하는 요인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있는 이재용 은 당시나 지금이나 아버지 이건희 회장의 경영권에 도전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실 이학수 부회장은 전형적인 이건희 회장의 대표적인 가신이었고 이건희 회장 부부간 금슬도 나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건희 회장 입장에서는 이재용 대세론을 꺾는 과정에서 이재용, 홍라희, 이학수 등 누구도 다치지 않고 오로지 이재용 대세론만을 꺾어놓아야 한다는 고난위도의 과제가 주어진 셈이다. 이 때 이건희 회장이 선택한 한 수가 차녀 이부진이었다.
호텔신라 CEO 겸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부문 사장직을 맞고 있는 이부진은 본래 아이들을 좋아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는 재벌가 답지 않은 평범한 여성이였다. 또 이부진은 어머니를 도와 리움미술관에서 일하기도 하는 등 모녀간 사이도 좋았다. 그러나 이부진은 봉사활동을 하던 중 임우재 사원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드라마 같은 스토리를 겪으며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와의 다툼이 발생했었다.
이건희 회장은 1999년 2월 결혼한 이부진 부부에게 1년 동안 신혼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후 2000년 임우재씨를 미국 MIT공대의 MBA 과정에 유학을 보낸다. 그리고 몇 개월의 독수공방을 하던 이부진에게 권유한 후 2001년 1월 호텔신라 기획팀 부장으로 입사시킨다.
이 때 이건희 회장은 이부진 부장의 입사 직후부터 약 2달여 기간 동안 신라호텔 스위트룸에 머물면서 이부진 부장에게 전폭적인 힘을 실어주게 된다. 이 때문에 호텔신라의 사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이부진 부장에게 감히 경쟁 혹은 대적할 생각을 버리게 된다. 그리고 호텔신라 직원들은 당시 이부진 부장을 이부진 부‘회’장이라고 불렀다. 이부진 부장은 그 때부터 남편 임우재 씨가 귀국하던 2005년 1월까지 4년여 기간 동안 워커홀릭이라는 별명을 들으면서까지 호텔신라의 일에 매달리게 된다. 결국 이부진 부장은 4년 동안 호텔신라의 수익구조를 다변화하고 경영 체질을 개선하는데 성공하면서 자신의 경영능력을 과시하고 2005년 1월 상무로 승진하게 된다.
그리고 이부진의 남편 임우재씨는 귀국하자마자 아내보다 반급수 낮은 상무보의 직함을 달고 삼성전기에 입사하게 된다. 당시 이부진의 상무 승진과 임우재의 상무보 입사가 결정된 2005년 1월부터 이부진의 위상이 삼성그룹 내에서 부상하기 시작했고 2009년 이부진의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부문 전무로 입사에서부터 이재용 대세론은 완전히 힘을 잃게 됐다. 그러나 이재용, 이부진, 홍라희, 이학수 등 누구도 이재용 대세론 앞에서 다치지 않았다. 이건희의 절묘한 승부였다.
네 번째 승부, 동반사퇴로 대한민국을 속이다
이건희 회장의 네 번째 승부 대상은 대한민국 자체였다. 삼성의 불법과 편법 행위가 알려지면서 대한민국에 반삼성 정서가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결국 삼성특검 재판에서 일부 행위에 대해 유죄가 판결나는 등 삼성그룹 자체에 큰 위기가 왔다.
이 때 이건희 회장의 승부는 동반퇴진과 이재용의 해외 파견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2008년 4월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과 이학수 등 그룹 수뇌들의 동반퇴진과 함께 그룹 내 주요 의사결정은 사장단 회의에서 자체적으로 결정할 것을 발표했다. 이는 겉으로 볼 때 이건희 자신과 이학수, 김인주는 삼성의 불법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이재용은 사회분위기를 어지럽히는데 일조한 책임을 물어 외국으로 쫒겨 나가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어차피 암투병 등으로 인한 요양이 필요한 때였고, 삼성그룹 회장이라는 공식 직함에서만 물러났을 뿐 삼성그룹 내 영향력과 대주주로서의 권한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외국으로 쫒기 듯 떠난 이재용에게도 한 가지 미션이 주어졌는데 바로 전 세계의 정치·경제 지도자들을 포함한 튼튼한 해외 인맥을 형성하라는 것이다.
또 이학수와 김인주는 각각 삼성물산과 삼성카드의 고문직으로 발령났다. 이 때 이학수의 경우 삼성물산에서 아무런 역할이 없는 고문직이었다. 또 당시 삼성물산에는 이재용 대세론을 깬 이부진이 삼성물산의 상사부문 고문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즉 이학수는 버리는 패였던 셈이다. 반면 삼성화재의 고문으로 발령난 김인주에게는 한 가지 미션이 있었는데 삼성카드가 보유한 삼성에버랜드 지분을 매각해 삼성그룹의 순환출자구조를 해소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건희 회장과 삼성그룹의 경영권에 문제가 생겨서도 안 되고 헐값에 매각해서도 안 된다는 아주 어려운 조건이 붙었다.
그리고 1년 후 이재용이 삼성전자 COO 부사장으로 복귀하고 2년 후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김인주 삼성화재 고문도 2010년 삼성화재가 보유한 삼성에버랜드 지분을 KCC에 매각하는데 성공한 이후 삼성선물 사장으로 화려하게 등극했다. 다만 이학수 삼성물산 고문만이 삼성그룹을 완전히 떠났다.
3대 삼성, 이건희식 경영 승계여부 고민해야
결국 이건희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한마디로 말하면 묘수경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경영의 모든 것을 사장단을 비롯한 책임자들에게 맞겨 놓고 자신은 그들의 경영 행태를 지켜보다가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만 짧고 굵게 관여하고 뒤로 빠지는 식의 경영과 자신의 가이드라인을 잘 지켰는지를 기준으로 확실한 신상필벌의 인사를 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시스템이 갖춰진 상태에서 기업을 물려받은 2세대 경영인들이기에 가능한 스타일이다. 또한 이병철 전 회장은 자신이 그룹 경영의 80%를 직접 관여하는 꼼꼼함과 열정을 보인 1세대 식 경영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건희 식 경영 스타일이 아닌 이건희 사후 삼성의 경영스타일과 체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와 관련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이건희의 경영이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이건희 회장의 경영스타일은 이건희 회장에게만 특화된 스타일일 뿐이며 다른 사람이 쉽게 벤치마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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