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보너스를 받기 위해 월가의 투자가들은 실적 쌓기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 월가는 최고경영자에서 말단 직원까지 예외 없이 보너스 삭감을 감수해야 했고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우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는 사실 이데올로기상으로 볼 때 공산주의에 비해 내세울 것이 많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우월한 것은 조정력과 가치에 대한 수용에 있다. 하지만 본질적 오류가 부각되기 시작하면 자본주의 체제는 오래가지 못한다.
일본 도시바와 같은 기업은 회사가 이익을 많이 낸 경우 그 보상 범위를 협력업체로까지 확대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기업에서 그런 문화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런 문화적 여유를 갖추지 못한 탓이다.
결국 중소기업의 도산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전문가는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곧 대기업의 추락과 기반이 해외로 넘어가는 사태를 나을 뿐이다. 성장에 급급한 문화는 그 끝을 보기 마련이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니뭘러스는 나치의 만행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나치가 처음 공산당을 숙청했을 때 그는 공산당원이 아니어서 침묵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유대인을 잡아 죽일 때 역시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의 침묵 가운데 노동조합원들이 숙청되었고 가톨릭 교도들이 숙청되었다. 이 목사는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주변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인생의 가치는 남을 위해 울어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의 아픔에 무감각한 것처럼 죄악된 것은 없을 것이다. 부정과 부조리가 존재할 때 그것을 반대하는 소리를 내고 상처 받은 이들을 위해 울어줄 수 있을 때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연말에 대기업은 성과급을 주고 승진 잔치를 하며 다가오는 명절 선물과 여비 지원 계획을 구상하는 반면 중소기업은 매년 계속된 대기업의 원가 인하 압박 덕에 좋은 인력을 내보내고 아르바이트생들마저 줄이는 판국이라면 야박한 세상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올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삶을 흉내내고 있는 듯하다. 흉내를 내느라 평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를 소비하다가 더 이상 아무도 속일 필요가 없어지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스스로 만든 세계에 갇혀서 남이 계획한 일을 흉내내며 생을 허비한다.
인간은 각자 독특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모두가 비슷해지거나 독특함이 사라지는 세상이 온다면 그런 비극은 또 없을 것이다.
19세기 초상화가였던 도미니크 앵그르는 너무도 섬세하고 정교하게 사람들을 묘사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인들의 피부, 눈동자, 머리카락 및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더 신기한 것은 가장 묘사가 힘들다는 레이스나 얇은 천을 너무도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다. 마치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렇듯 그가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온 정성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던 그의 초상화는 위대한 유산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이처럼 인생은 적당히 살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돈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이 되거나 인간의 가치가 사라지는 세상이 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공산주의도 공산당이란 특권층이 대두되면서 몰락을 맞이했듯 자본주의도 자본가들과 기업 특권층이 득세하게 된다면 그 종말을 보게 될 것이다.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서구 유입은 아랍 철학자들의 역할에 기인한 것이다. 즉, 아랍 철학자들의 책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서구에 소개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파리대학 철학부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연구의 중심이 되었다.
중세 기독교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견한 시기는 아랍인들보다 더딘 것이었다. 아랍인들은 이미 7세기쯤부터 그리스 철학을 아랍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중세 암흑기를 거치고 있었다.
중세 초기 기독교는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스 철학의 논리가 절실했는데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아라비아 철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0세기경 이슬람교도들이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의 톨레도를 탈환했을 때 유럽인들은 다수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물을 획득했다. 115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것들을 라틴어로도 번역했다.
중세 로마철학은 기독교 철학과 그리스 철학의 융합물이었는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럽과 아랍권의 합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리스 철학이 신을 중심으로 철학과 수학과 천문학을 풀었기 때문이다.
두 세력이 어울려 중세 로마철학이 만들어졌던 것처럼 어울어질 때 세상은 가치 있게 변하는 것이다.
가끔 지하철을 타다 보면 끊임없이 영어를 남발하는 사람들을 본다. 역겨움을 느끼게 되고 머리가 텅 빈 사람일 거란 주관적 평가를 내리게 된다. 제 깐에는 높은 수준의 사람임을 과시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결코 교양 있는 한국인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혹 외국에서 왔다 해도 한국말을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애국심도 없는 속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자신의 기본을 지킬 줄 아는 것이 아름다운 법이다. 어렸을 때 외국에 건너가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한국말도 잊어버린 채 복귀한 이들을 우리는 환영할 수 없다. 말을 잊어버렸기에 우리와 어울릴 수 없는 그. 부모의 의도에 의해 그의 정체성은 사라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외국인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한국인도 될 수 없는 이들을 우리는 어찌 불러야 하는가?
이처럼 기본을 잊어버린 행위는 주관을 가지고 치열하게 살지 못한 죄악과 같다. 서로 어울리기 위해 우리는 보다 치열해져야만 하며 주변을 원망하는 어리석은 짓을 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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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형선 칼럼니스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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