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덕기, 기독교 주축 ‘구국계몽 민족운동’ 선도

김영실 박사 / 기사승인 : 2014-03-10 23:4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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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月의 독립운동가> '전덕기 목사' [일요주간=김영실 박사] 지난 3월 1일, 우리는 제 95주년 3.1절을 맞이하였다. 거리는 구청에서 달아놓은 태극기들이 펄럭여 3.1절인 것을 알려주었지만, 얼마만의 국민들이 3.1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새기며 그 희생에 감사했을지 의문이다.

3·1운동의 파장은 우리나라에만 머물지 않았다. 약소국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중국인들이 도전과 용기를 얻어, 두 달 후에 5·4운동을 일으켰으며, 이는 중국의 현대사를 바꾸어놓는 분수령이 된 운동이었다.
▲ 전독기 목사

그리고 몇 달 후에는 말레이시아에서도 독립을 위한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이 모두가 작은 조선에서의 비폭력 3·1운동 정신에 도전을 받아, 억압받던 이웃 나라들도 함께 힘을 내었던 것이다. 이어 인도의 간디 수상도 영국을 상대로 비폭력 무저항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왜냐하면 3.1운동의 정신은 비폭력, 무저항 평화정신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에 16명이 개신교계의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당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의 지도를 살펴보면 75% 정도가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한국교회의 선배들은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 예수사랑과 동포사랑을 한 신앙, 한 가슴, 한 비전으로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9세에 부모 모두를 여의며 고아와 같은 어려운시절
17세에 감리교 의료선교사 스크랜턴과 운명적 만남
한국민족운동 대표적 비밀결사체 ‘신민회 주축 인물’

● ‘숯장수’ 고아출신에서 ‘민중 목회자’로

올해는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국가보훈처에서 매년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중 올해 3월의 독립운동가로 전덕기 목사를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사적 측면에서 구국민족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전덕기의 생애와 활동을 간단히 적어본다.

전덕기(全德基)는 1875년 12월 8일 서울 정동에서 부친 전한규(全漢奎)와 모친 임씨(林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本)은 정선(旌善)이며 덕기(德基)라는 이름 외에 ‘봉운’이라 불리었다. 불행하게도 9세 되던 해(1884) 부모 모두를 여의며, 부모를 잃은 덕기는 당시 남대문 일대에서 숯장수를 하던 삼촌 전성여(全成汝)의 양자로 입적하여 고아와 같은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했다.

유년기와 소년기를 가난하고 어렵게 보내었기에,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품을만한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기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그가 17세 되던 해(1892) 당시 서울 정동(貞洞)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회 소속 선교사 스크랜턴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스크랜턴은 의료선교사(Medical Missionary) 자격으로 1885년 5월 내한하여 정동에 시병원(施病院)을 설립,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모친(M.F Scranton)은 교육선교사로 이화학당을 설립한 분이다. 한마디로 스크랜턴 모자(母子)는 개화기 조선의 근대의료사업과 여성교육의 문을 연 개척자였다.

소년 전덕기는, 그들이 끝없이 베푸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랑과 친절에 큰 감동을 받고 그 집의 일꾼으로 들어간다. 그는 스크랜턴 부부의 헌신적인 복음의 삶에 깊은 영향을 받아 ‘스크랜턴 박사님같이 되고 싶어요!’하며 사역자의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청년이 된 전덕기는 스크랜턴 부부를 도와 상동교회 개척에 참여하여, 1898년 상동교회 속장(屬長)이 되었고, 1900년 상동교회 예배당을 건축할 때 재정 일체를 담당하는 유사(有司) 일을 맡았으며, 이어 1901년에는 권사(勸師)에 임명되었다가 그 다음해인 1902년 드디어 미국 감리회연회에서 정식으로 전도사(傳道師) 파송을 받으며,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민중 선교’에 앞장섰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열정적인 선교활동은 곧 상동교회의 부흥을 가져왔고 그 결과 ‘민중 전도자’로서의 전덕기의 이름이 점차 교계에 넓게 알려졌다.

● 상동청년학원 설립과 ‘구국운동’

전덕기 목사는 1897년 상동교회 안에 공옥여학교(攻玉女學校)와 1899년 공옥남학교(攻玉男學校)라는 초등과정을 설립하였고, 교사와 학생들 대부분은 상동청년회와 청년학원은 독립을 위한 구국운동으로 펼쳐질 ‘상동파’의 인적, 물적 토대가 되었으며, 이는 상동청년학원이라는 명칭으로 1904년 9월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초대 교장 이승만(李承晩), 부교장 박승규, 한글학자로 유명한 주상호(주시경), 장도빈(張道彬), 최남선(崔南善) 등 당시 최고의 교사진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듯 당대 최고의 교사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전덕기 목사의 폭넓은 평소 인맥의 결과였다 할 것이다.

1900년대 한국민족운동의 대표적인 비밀결사로 신민회를 꼽는다. 1903년 이후 전덕기목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상동청년학원, 즉 ‘상동파’의 활동은 신민회 창립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신민회 창립의 모체는 당시 상동교회 내에 결성되었던 상동청년학원을 중심한 ‘상동파’ 인맥이 주를 이루었고 그 중심에 전덕기 목사가 있었다.

전덕기의 권유에 따라 신민회에 입회했다고 증언한 바 있는 김진호는 신민회 회합 장소가 상동교회였다고 하면서 “그때에 지하실에 모인 사람은 전덕기, 이동녕, 양기탁, 이회영(李會榮), 이승훈(李昇薰)씨 등이다.

다시 말해서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 박탈 등 국운이 숨가쁘게 기울어가던 시기 상동청년회와 청년학원을 중심으로 애국지사들이 결집ㆍ활동하였고, 이렇게 형성된 ‘상동파’의 인맥과 기맥이 바로 신민회의 토대가 되었으며, 그 중심에 전덕기가 있었다.

● ‘신민회 조직 재구축’에 혼신의 힘

105인 사건은 일제의 국권강점 직후 국내의 반일민족세력, 특히 기독교계 반일민족 인사들을 한숨에 제거할 의도에서 이른바 ‘데라우치(寺內正毅)총독 모살미수’라는 허위의 조작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에 피체된 인물만 700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 중 기소자 123명 중 제1심에서 ‘105인’이 유죄판결을 받아 이를 ‘105인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그동안 이 사건은 여러 면에서 주목되어 왔지만 그중 이 사건을 통해 신민회의 실체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익히 아는 대로 105인사건은 당시 총독(寺內正毅)이 1911년 말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가하기 위해 경의선 철도를 따라 서순(西巡)할 때 평양, 정주, 선천 등 경의선 주요도시에서 총독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일본이 지어낸 허위사건이다.

105인사건 이후 그가 신념을 기울였던 신민회 조직이 해체되고, 그동안 뜻을 함께하던 많은 동지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해외 망명길에 올랐던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그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육신의 병까지 얻었다. 1914년 3월 23일 39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와해된 신민회 조직을 재구축하는 일과 신흥무관학교로 대표되는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 밖에도 105인사건으로 구속된 이승훈의 오산학교와 안창호의 평양 대성학교의 운영을 맡아 보는 등 깊은 병중에도 목회자로의 올곧은 신앙심과 한결같은 애국정신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구국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던 흔치않은 애국인사의 한 사람이었다.

금년 3월엔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년을 맞는다. 이러한 기념비적인 때를 앞두고 국가보훈처에서 2014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전덕기를 선정하고 기리는 일은, 후대에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하겠다.

▲ 김영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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