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박덕규 ‘우리 안의 식민사관’

박덕규 연구원 / 기사승인 : 2020-07-21 09: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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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사관 주체사관’ 주류 된적 한번도 없어
‘식민사관 식민사학자’ 실체 규명 기회조차 상실

임시정부의 첫 선언 ‘우리 대한민국 시작은 ‘환국’
사대사관 젖은 조선 선비 ‘우리 강토를 협소하게’
▲ 상생문화연구소 박덕규 연구원
● ‘국수주의 민족사관’ 신민족사관으로 극복?

어느 역사학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역사학계는 드디어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했다.”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역사학계가 끈질기게 노력한 끝에 마침내 식민사관을 극복했고, 1920년대 만들어진 국수주의 민족사관도 신민족사관으로 극복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어용사학자들이 주장했던 대표적 역사왜곡인 ▼ 단군 신화설 ▼ 한사군(漢四郡) 재평양설 ▼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중에서 어떤 것이 극복되었냐고 물으면, 그것은 식민사관이 아니라 조선시대 때부터 공인된 역사의 정설이며, 조선의 유학자들도 주장했던 것이기에 식민사학자들이 가공한 식민사관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일례로 한사군 재평양설은 고려 때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쓰여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이었다고는 해도, 근대학문인 실증사학을 바탕으로 사료비판과 문헌검토, 고고학적 검증을 거친 것이기에 오히려 그에 반하는 민족사관이 사이비역사라고 말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그들의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들이 있습니다. 우선 “민족사관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사이고, 고대사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것으로 꾸몄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거짓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군은 조선 500년 동안 국조였고, 한사군의 위치는 시대와 학자에 따라서 바뀌었습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부정되었고, 임나일본부설도 일본의 근대학문에 경도된 일부 유학자의 주장이 있었을 뿐입니다.

한사군 재평양설에 대해서 조선 말 유학자 연암 박지원은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사군을 죄다 압록강 안쪽으로 몰아넣어 억지로 역사적 사실로 만들다보니, 패수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박지원 『열하일기』 1권 도강록)고 했습니다.

▲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년~1932년) 선생

●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의 ‘혼재 역사’

사대사관과 소중화의식에 젖은 조선의 선비들이 억지로 꾸며 우리 강토를 오히려 줄여버렸다고 강변한 것입니다. 스스로 축소시킨 역사를 자랑스럽게 말하는 무정신의 역사를 비판했습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초 사가의 견식이 없어 망령되이 노예의 근성으로 꾸며 찬술하는 솜씨를 남용해 국가의 체통이 손상될 것을 생각지 않고 오직 타인을 숭배하는 데만 힘썼다. 지금 노예사관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있으니 어찌 노예근성을 길러 참담한 지경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석주 이상룡 『서사록』)라고 개탄했습니다. 식민사관이 들어오기 전부터 나라의 정신을 팔아먹은 노예사관, 사대사관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1945년,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 미군이 들어온 것처럼, 1910년, 사대사관이 물러가기도 전에 식민사관이 우리 정신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우리 역사를 찾았을 때, 당시의 그 어디에도 우리의 ‘참역사’는 없었다. 즉 우리 민족을 주체로 세워 우리의 자주독립과 발전을 추구하게 할 역사가 당시에 없었던 것이다.”(임찬경,「독립운동가의 고대사 인식」, 2018, 국학연구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쓰는 이는 모름지기 그 나라의 주인 되는 민족을 선명히 나타내어 그를 주체로 삼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무정신의 역사이다.”(신채호, 1908년 『독사신론』)라고 했습니다.

한민족의 역사는 한민족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중국 민족을 주체로 써서 스스로 역사를 파괴하고 멸절시켰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건데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구의 병화에서보다도 조선사를 저작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서 더 많이 없어지고 파괴되어 버린 것 같다.”(신채호, 『조선상고사』, 1931년)

 



● ‘우리 대한민국의 시작은 환국’

자주독립국가 대한민국을 만들려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우리말을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국어와 역사를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천부경(天符經)을 암송하고 배달겨레를 노래하고 단군을 국조로 높였습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양성하는 국립대학교의 한 교수는 TV에 나와서 ‘단군은 신화’라고 주장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역사광복의 첫 선언으로 ‘우리 대한민국의 시작은 환국’이라고 밝혔습니다.(“우리 민족은 처음 환국(桓國)이 창립된 이래.”-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3주년, 1942 3.1절 선언문)

해방 후에는 단군조선이 개국된 기원전 2333년을 국가의 공식 연호로 법제화했습니다.(1948년 9월 25일 ‘연호에 관한 법률’) 조선의 국사였던 『동국통감』의 기록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만약, 단군이 신화라면 대한민국은 뿌리가 없는 나라입니다.

지난 해, EBS는 3.1운동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신년 특집으로 ‘우리 곁의 친일잔재’를 제작했습니다. 교육, 미술, 음악 3부작으로 방영된 프로그램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친일 잔재들을 찾아내며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프로그램은 우리 곁에 아직도 친일 잔재가 남아있는 이유를 “무엇이 친일인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역사학계는 식민사관을 극복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친일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거쳐서 정설로 자리 잡은 것이라며 독립운동가들이 바로잡은 역사는 철저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민족주의는 사이비역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고려 말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민족주의사관, 주체사관이 주류가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국민이 그들의 말을 믿는 이유는 “식민사관이 무엇인지, 식민사학자가 누구인지 배울 기회조차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이라는 두 가지의 역사 적폐를 동시에 청산하고, 우리의 역사를 정립(正立)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의 역사 적폐청산시도는 철저하게 좌절되었다. 심지어 1945년 해방 이후에도 독립운동가들이 청산하고자 시도했던 역사 적폐는 아직도 살아 현재의 한국역사학까지 집어삼키고 있다.”(임찬경, 국학연구소 2018, ‘독립운동가의 고대사 인식’)는 절규를 곱씹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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