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앙데팡당 초대작가 ‘지촌 허룡 서화가’

소정현 / 기사승인 : 2019-05-16 12:4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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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허후득의 장남
저서 전통동양화보는 미술 지망인 귀중한 지침서
‘학맥 인맥’ 없이 화단에서 인정받는 작가로 우뚝

▲ 지촌 허룡 선생, 허정자 관장, 모친 우옥분 여사와 함께

 

[일요주간 = 소정현 기자]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마음가짐이 맑고 깨끗하면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좋아하는 일을 하며 글도 쓰고 그림을 그리면 기쁘고 행복합니다.… 제 나이 89세 입니다. 육체의 모든 기능이 쇠락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 초유이지 아시아권에서 최초로 개최되는 프랑스 앙데팡당 전에 초대받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각별하게 의미 있는 앙데팡당 전시를 통해 저의 글씨와 그림이 한국의 문화와 정서 그리고 소박한 인간미를 유럽에 알릴 수 있게 됨을 보람으로 여기겠습니다.(지촌 허룡 서화가)

인터뷰는 허룡 서화가를 대신하여 ‘봄사랑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장녀 허정자’ 관장께서 수고하여 주셨다.

▲ 오직 전통적인 한국 미술의 연구에 한평생 매진해온 지촌 허룡선생

● 부친은 1919년 기미독립운동의 주동자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허후득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 지촌 허룡(芝村 許龍) 선생은 1931년 충청남도 서산군에서 허후득(1895년-1946년)의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부친인 허후득은 한학자였으며 1919년 기미독립운동의 주동자였습니다.
허후득은 1919년 4월 8일 밤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운산면(雲山面) 용현리(龍賢里) 정원백(鄭元伯)의 집으로 주민 50여 명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만세운동 전개 방법을 논의한 뒤, 그들은 보현산(普賢山) 위에서 봉홧불을 올리고 나상윤(羅相允)·황군성(黃君成) 등과 함께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그 사건으로 허후득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모진고문과 옥고를 치른 후 지병을 얻어 고생하시다 8.15 광복직후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判決文 公州地方法院, 1919. 5. 19·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155∼156面>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대통령표창에 추서 되었습니다.

항일운동의 후손으로서 2016년 3월 1일, 3.1독립운동 정신과 동양의 잔 다르크 유관순 애국정신 계승을 더욱 드높여야 할 때, 당일 광화문 광장에서 드높이는 애국영화 ‘유관순의 들풀’ 제작 선포식에 참석하신 부친께서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과 울분이 폭발 하던 날, 정신의 횃불을 높이 들고 자신을 불태웠던 아버지와 당시 마을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다시금 그분들의 한을 떠올렸습니다. 또한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유가 있음을 절감하며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날 이었습니다.

▲ 2018년 3월 28일 충북도교육청 청렴시화전 개막식에서 지촌 허룡 선생의 서예 퍼포먼스

● 부친의 작고로 이후, 지촌 허룡선생의 일대기에 대해 독자들에게 이해도를 입체적으로 심화시켜 달라.

▼ 부친이 작고할 때 지촌선생은 나이 14세로 소년가장이 되었습니다. 5세부터 부친에게 배운 서예와 한문 실력으로 한때 서기로 공직생활을 하다가 뜻한바 있어 서울로 상경하였으나 계획 헸던 사업도 수포로 돌아가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가 35세에 자신의 주특기를 살려 서예학원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후로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38명의 화가들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수출하는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직업적인 화가로서의 첫 발걸음 이였습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인 취향의 그림을 그려야 했지만, 허룡 선생은 한국의 전통 화법을 고집하였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세시대가 열려 외래문화가 쏟아져 들어와도 그 기회를 활용하여 명예와 부를 쌓지 않고 ‘나만은 우리 것을 지켜야지’ 하는 생각으로 오직 전통적인 한국미술의 연구와 학습에만 정진하였습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나름대로 체계를 세운 화법과 서법을 탄생시킨 선생의 작품이 차츰차츰 미술애호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 독학으로 고금의 동양화를 섭렵하여 보고, 분석하고, 수많은 연습을 거쳐 태동된 걸작들


● 허룡 선생은 초기 서예가로 입문했으며, 그 후 문인화와 산수화 등을 섭렵하면서 일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허룡 선생이 한국 ‘서화 장르’에 일군 업적 위주로 자세하게 조명하여 달라

▼ 1960-1970년대 한국화단은 모더니즘과 권위예술 등 추상표현주의 운동이 뜨겁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외래문화가 봇물 터지듯 밀려왔습니다. 상대적으로 전통 동양화는 진부한 것으로 매도되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의 미술계가 외래 풍으로 떠밀리고 있을 때 지촌선생은 한국인으로서 예도의 길을 걷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지촌 허룡 선생은 한국 선배 화가들과 일본, 중국 등의 저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하나씩 분석하면서 그들의 장점을 살리고 익히며 수많은 연구와 연습을 반복하면서 자신만의 기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독학으로 고금의 동양화를 섭렵하여 보고, 분석하고, 수많은 연습을 거쳐 태동된 걸작들은 한국의 서예와 전통 동양화의 맥을 잇는 이 시대의 디딤돌 역할을 하였습니다.

 

▲ 지촌 허룡 선생은 평생을 연구하고 터득한 동양화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전통동양화보’ 1,2권과 ‘지촌허룡서화집’에 담아 후진들의 동양화 공부에 길잡이로 제공하였다.


● 한국 화단에 투영된 허룡 선생의 ‘한국적 전통적 역사적’ 업적과 의미를 상술하여 달라.

▼ 지촌 허룡 선생은 평생을 연구하고 터득한 동양화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전통동양화보’ 1,2권과 ‘지촌허룡서화집’에 담아 후진들의 동양화 공부에 길잡이로 제공 하였습니다.
허룡 선생은 지난 1999년 ‘전통동양화보’ 제1권을 펴낸 지 꼭 8년 만에 ‘전통동양화보’ 제2권을 펴냈습니다. 여기에는 붓글씨로 시작하여 사군자, 문인화, 화조화, 동물화, 초충도(草蟲圖) 등을 비롯하여 문인산수화에 이르기까지 한국화의 영역을 폭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저명한 미술평론가 김남수는 지촌 허룡의 저서 ‘전통동양화보’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습니다. “지촌 허룡의 저서 ‘전통동양화보’는 글씨와 그림을 손수 육필로 완성해낸 역작이며, 모든 미술 지망인에게 필독의 귀중한 지침서이다. 비록 화제 시와 해설은 옛 선배들의 시구를 차용했지만 서체와 회화양식은 작가의 독창적인 경지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뒤늦게 허룡의 저서를 접한 이탈리아 국립 브레라 미술대학 도서관 대표 ‘프란체스카 홀리아’는 “허룡 선생의 일생을 보면, 중국 근대사에서 서화의 대가 제백석(齊白石)을 연상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 허룡 선생은 삼국서법학회 멤버로서 한중일 서화교류에도 남다른 의욕을 보이시고 있다.

● 지촌 허룡 선생은 한미동맹친선협회 자격으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을 비롯한 여러 인사에게 한글 이름의 붓글씨 족자를 선물하여 왔는데?

▼ 허룡 선생은 한미동맹의 증진과 우의 중진을 모토로 비록 국가와 인종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붓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에게 ‘한희숙(韓熙淑)’,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 국무장관에게 ‘라이수(羅梨秀)’,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백보국(白保國),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미국대사에게 ’박보우(朴寶友), ‘전 월터 샤프 주한미군 사령관에게는 ‘宋韓弼 大將(송한필 대장)’ 이라고 쓴 붓글씨 족자를 선물하여 왔습니다.

한국의 예인으로서 서양인의 마음에도 한국의 예술을 담게 하고, 한국인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귀한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 허룡 선생은 화조화, 동물화를 비롯하여 문인산수화에 이르기까지 한국화의 영역을 폭넓게 다뤄왔다.


● 마지막으로 삼국서법학회 멤버로서 한중일 서화교류에도 남다른 의욕을 보이시고 있는데, 앞으로 지고지순 서화 사랑의 국내외 위상제고 등 한국적 서화발전의 비전을 독자들에게 공유하여 달라.

▼ 오랫동안 한국의 미술계는 작품의 우수성보다는 대전(大展) 수상경력과 출신작가의 배경이 된 학력중심으로 즉, 학맥중심으로 미술권력이 독점되어 왔습니다. 이런 풍토 속에 학맥도 없고 인맥도 없으며 미술공모전에 한 번도 출품한 적이 없는 비국전파인 재야작가가 독학으로 화단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지촌 허룡 선생은 각종 민전의 심사위원을 두루 거쳐 2002년에는 관례에 없이 한국미술협회 로부터 대한민국 미술대전의 심사위원으로 위촉을 받았으며, 현재도 고문으로 있습니다.

집념 하나로 한결같이 변함없이 전통 예술의 길에 매진하셨던 지촌 허룡 선생은 평생 마음에 새겼던 좌우명 한마디를 들려주셨습니다. “피라미드의 정상에 올라 갈수 있는 동물은 독수리와 달팽이다.”

허룡 선생은 나는 독수리처럼 하늘을 높이 날수는 없지만 그러나 달팽이처럼 말없이 꾸준히 한 발짝씩 행진해서 최종적으로 피라미드의 정상에 올라 갈수 있는 인내력과 의지로 오늘까지 해왔습니다. 한 분야에서 온 생을 다 바쳐 한국식 전통의 대업을 이루었다.

 

▲ 허룡 선생은 한 분야에서 인내력과 의지로 한국식 전통의 대업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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