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역동적 경제로 쇄신 ‘일등공신’

소정현 / 기사승인 : 2017-01-23 11: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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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차이나벨트’ (16) 세계속의 화교<동북아시아>

▲ 화상과 관계를 맺는 것은 중국 기업에도 필요한 일이다. 중국 기업이 해외에 진출할 때 전 세계에 포진한 화상이 결정적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요주간= 리키창·소정현 기자] 본보는 특별기획 일환으로 ‘차이나 벨트’ 코너를 신설하여 중화권 전반의 모든 것을 심층 조망한다. 한중 관계 경제교류는 한층 위력을 발하고 있다. 양국간 교역은 상호 최상위권에 있으며, 중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창설을 통해 글로벌 경제 주축의 핵심 역할론 연착륙에 자신감을 고양시키고 있다.

특히 한중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위안화 직거래 시장 개설은 세계 주요통화로서 위상을 확장 심화시킬 것이다. 이에 본보가 홍콩에서 중화권 무역 컨설턴트로 활동 중인 ‘Kstars 그룹 리키장’과 함께 중화권 ‘경제·금융·무역’ 흐름을 심층 리뷰하며 전망 예시하는 기획 스페셜에 독자 제현의 호응과 관심을 부탁드린다.(편집자주)


● 화교와 중국은 잉꼬부부 운명

중국의 대화상정책 중국은 화상들에게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고 거주국 국민으로서 당당하게 정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또한 중국은 화교들에게 국적이나 거주지에 상관없이 ‘중화민족’으로서의 일체감을 고양시키기 위한 노력은 물론 화상들의 투자에 대해 우대정책을 일관되게 펼쳐왔다. 1990년 제정된 중국의 교포정책 관련 법은 화상들의 자본투자에 대한 지방정부의 지원과 법적 보호, 세제 우대 등을 구체 명시하고 있다.

화교들은 세계 도처에서 막강한 재력을 축적했고 방대한 네트워크를 통해서 묵직한 세력을 확장했다.

2014년 6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베이징에서 열린 제7차 세계 화교단체 단합대회에 참석해 "수천만 명의 해외 교포들(화교)이 중화민족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며 치하했다. 견고하게 뭉쳐진 화교 네트워크가 중국을 도와 성공적 경제발전을 이끌어 냈다는 의미이다.

세계 경제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그 실체를 인정받고 있는 거대한 경제 집단 화교 네트워크는 중국의 개방정책 이후 세계 속의 중국으로 이끈 최대 지원 세력들이었다.

화교들은 중국인이라는 민족적 동질성과 고향에 대한 뿌리 깊은 귀속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모국 중국의 개방정책은 잉여자본을 투자할 명분과 공간을 제공하였고, 중국은 이러한 자본을 토대로 역동적 경제를 구축하는데 결정적 원동력을 삼을 수 있었다.

1978년 중국의 개방과 함께 화교의 모국 투자가 줄을 이었다. 1980년대 중국의 대외 경제개방이 본격화되자 화상들의 중국 투자가 대규모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중국의 경제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개방 초기 중국내 외국인 직접 투자액 가운데 70% 가량이 홍콩, 대만을 포함한 화교의 자본이었다. 중국 상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화교기업의 대중국 투자금액은 2006년 말까지 4,593억 달러로 추정된바, 전체 외국인투자금액 6,885억 달러 중 화교기업이 약 67%를 차지했다.

중국은 1979년부터 선전(深?), 주하이(珠海), 샤먼(廈門) 등지의 경제특구정책을 조성해 홍콩·마카오 기업에 문호를 개방했으며, 1984년에 14개 연해도시의 개방, 1990년의 상하이푸둥개발 등 대규모 해외유치 정책 실시했다.

1979-1991년 기간은 화교기업의 중국투자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화교들은 주로 중국 동남부지역의 경제개발에 투자해, 중국을 역동적 수출주도형 경제로 쇄신시켰다.

이어 1992-1997년 기간은 화교자본의 대중 투자가 가파른 시기로 중국의 대외개방이 확대되면서 투자환경 개선과 고속성장으로 동남아, 타이완 및 세계 화교들의 대중국 투자가 대폭으로 증가했다.

화교 기업의 대중국 투자는 중국의 개방지역이 북쪽으로 확대됨에 따라 동남연해지역에서 북상(北上)하고 있는 추세이다. 개방초기 중국의 동남해안은 지리적 인접성, 투자환경 개선, 정부의 화교자본 유치정책 등으로 화교기업 진출이 상대적으로 활발했다.

화교기업의 우세업종인 부동산, 금융보험, 통신, 유통, 물류 등 제반 서비스 분야에 중국의 개방이 확대되고 무역·투자 관련 법률제도가 고강도 혁신의 결과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함으로써 2002년부터 외국기업의 대중국투자가 활성화됐다.

특히 일종의 무관세협정인 중국과 홍콩·마카오간의 CEPA의 체결로 주강삼각주(珠江三角洲)의 지역통합이 제고되면서 화교권의 경제무역 합작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홍콩과는 2003년 6월 29일에, 마카오와는 2003년 10월 18일에 CEPA가 체결되었다.

이어 2005년 중국-아세안간의 FTA의 체결로 17억 인구의 소비시장이 형성되었으며 관세율 인하 등 수출입여건이 크게 개선되면서 제3의 투자 붐이 조성됐다.

화교의 해외투자는 주로 유통이나 금융 분야에 치중됐고, 자본의 회수기간이 긴 사회간접자본 투자는 꺼리는 편이었으나 요즘은 부동산, 특히 도시개발과 고속도로, 발전소 건설 등 자본회수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분야에도 투자를 늘리고 있다.

중국에 화상 자본의 자국 진출은 단순한 자본투자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해외 화교들은 대륙에 온갖 비즈니스 지식과 선진적 경영관리기법까지 유입된다. 자본주의적 경제운용 경험이 일천한 중국으로서는 투자에 못지않게 이런 노하우도 매우 값진 것이다.

그리고 화상과 관계를 맺는 것은 중국 기업에도 필요한 일이다. 중국 기업이 해외에 진출할 때 전 세계에 포진한 화상이 결정적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필리핀에 있는 화교사회는 중국과 끈끈하게 연결된 아시아 지역의 정보, 무역, 금융기관이나 다름없다.

화상과 중국 기업은 이제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받는 관계가 아니라 호혜적인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파트너이자 최대시장이 된 중국과 거래하게 됨으로써 중국이 급성장하는 만큼 화교들도 급성장할 수 있었다.

화상은 탁월한 사업 수완과 뜨거운 경제력, 진취적 도전정신을 기반삼아 세계 경제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여기에 혈연·지연으로 다져진 협력·지원 시스템과 단결력은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제는 화교들은 직접 교류는 물론 전 세계 각지의 화교의 네트워크는 인터넷을 통해 24시간 내내 교류되면서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정보통신과 금융산업에 강점을 가진 싱가포르가 새로운 화교자본 중심지로 탈바꿈하려는 노력이 확연하다. 싱가포르는 21세기를 준비하는 화교들의 새로운 ‘관시’(관계)를 창조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1995년 12월 화교총상회(華僑總商會)가 운영하는 세계 화상네트워크(WCBN)를 탄생시켰다.

WCBN은 세계 화교자본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제공하는 인터넷 서비스망이다. 개통 즉시 매월 50만명 이상이 조회하였으며, 53개국 10여만 화상에 관한 최신 정보를 축적하고 있다.

기업 이름만 클릭하면 주소와 생산품목, 판매현황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이곳에는 각국의 화교상인들 동정과 기업 소개, 출신지와 언어 등으로 조직된 친목회에 이르기까지 관련 모든 정보가 정교하게 입력된다. 개설된 사이트 수만 4만여개 이상이다. 이곳을 통해서는 싱가포르뿐 아니라 자카르타, 콸라룸푸르, 밴쿠버, 샌프란시스코의 보석점, 요리점, 은행 등 화상들의 모든 것을 일목요연 총망라한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 화교들의 역동적 활약상을 취재, 보도하는 중국 TV 네트워크가 1994년 12월 홍콩에서 개국되면서 이들은 한층 밀착되어 효율성과 단결성을 공공연히 뽐낸다.

20세기 초까지 영국을 중심으로 한 팍스 브리태니카(Pax-Britanica),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팍스 아메리카나(Pax-Americana), 이제 21세기 한복판에서 팍스시니카(Pax-Sinica)가 바로 그것이다. 그 중국을 이끄는 힘의 원동력은 화교가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 북한의 화교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 중국이나 만주국에서 온 이민자의 자손들이다. 1949년경 북한의 화교연맹 일원.
● 한국은 세계에서 최소의 화교국

한국의 화교 인구는 대부분 산둥(山東)성 화교이며, 90% 이상은 중화민국국적을 지닌 해외교민이다. 한국 화교 이민사는 한 세기를 훌쩍 넘어선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 청나라가 파견한 군대를 따라온 40여명의 상인들이 한국 화교의 효시다. 같은 해 청나라와 통상조약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어 화교 유입의 길을 터놓았다.

1960-1970년대 최대 10만 명을 웃돌았던 한국의 화교는 척박한 국내 풍토에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현재는 2만2000여명 수준에 불과하다. 박정희 정부는 1961년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완전히 금지시킨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을 실시, 화교들의 경제 활동에 제약을 가했다.

이후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을 개정한 1968년 ‘외국인토지법’으로 화교들은 주거 목적 200평, 상업용 50평 이내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가 1998년에 이르러서야 관계법 개정으로 토지 취득이 자유화됐다.

1962년에는 ‘긴급통화조치법’에 의한 통화 개혁을 단행해 현금 보유량이 많았던 화교들에게 큰 타격을 줬다. 1970년대 초에는 도심재개발 명목으로 서울 소공동·북창동 일대의 화교들이 대거 밀려났다. 이와 같이 화교에 대한 잇따른 차별 정책 등으로 수많은 화교들이 대만·미국 등 외국으로 ‘재이민’을 떠났다. 대부분 대만 국적을 갖고 있던 화교들은 1992년 한국이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대만과 단교하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1993년 한국과 대만 간 협정이 맺어져 서울과 타이베이(臺北)에 대표부가 설치되면서 화교들의 경제 활동은 안정을 되찾았다. 1997년 법 개정으로 외국인 등록갱신 기간이 3년에서 5년으로 늘어났으며 2002년부터는 영주 자격을 부여받았다.

세계 최대 해외 이민 집단으로 꼽히는 화교의 유동자산이 4조달러에 달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화교 자본의 사각지대이다. 최근 제주도에 부동산ㆍ관광 투자 목적으로 유입되는 화교 자본을 제외하면 한국의 화교자본 협력 사례는 희박한 편이다.

한국의 대표적 '투자개방 특구'로 중국과 인접해 있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은 2004년 설립 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단 두 건의 5억3670만달러에 불과한 화교 자본 투자를 유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2건의 투자도 중국계 화교 자본인 리포그룹과 미국 카지노 그룹 시저스가 합작해 만든 ‘리포시저스’(LOCZ) 회사가 진척시킨 것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이 중국 본토에만 러브콜을 보낼 게 아니라 화교 자본과 상생하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 北화교 신부유층, 중국과 가교역

북한의 화교들은 중국과 북한을 잇는 ‘통로’다. 북한 사회에서 이색적 집단이 있다. 이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출신 성분 부여도 없고, 입당도 불가하며, 군인이 될 수 없다. 다만 합법적으로 마음대로 중국에 드나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사람들은 중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는 북한 주민으로 바로 화교(華僑)다.

현재 북한의 화교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 중국이나 만주국에서 온 이민자의 자손들이다. 1950년대 말기까지 화교들은 북한에서 어느 정도의 특권과 자치권를 허용 받았다. 북한 화교 대표 조직인 '조선화교연합회'는 당시 중국 당국의 지도를 받았다. 화교를 위한 학교도 북한 당국으로부터 독립됐었고, 학교는 중국인 교사, 중국 교육과정, 중문판 교과서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시대적 격변기에서 특히 중국 문화혁명(1966-1976년) 때 대거 북한으로 넘어 간 화교들의 어려움이 컸다. 이 당시 북중 관계가 악화되었는데, 수많은 화교들은 스스로를 '적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다만 6.25 참전 중국군 출신의 화교들은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1971년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북한 방문을 시작으로 북중 관계가 다시 호전되었고, 북한은 화교에 대한 차별적 정책을 중단했다. 이에 북한은 1960년대에 중국 국적에서 제적된 화교들에게 국적 회복을 사실상 허가하였다. 또한 중국 당국은 1979년부터 화교의 귀국 지원 조치를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수많은 화교들이 중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중국이 문호를 활짝 열게 되면서 이들의 위상과 영향력은 반전되었다. 1985년 이후부터 화교들에게는 거주 이전의 자유도 부분 허용되어 상대적으로 살기 좋은 평양이나 남포특별시, 평남의 평성, 평북의 신의주, 함북의 회령과 청진 등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1990년 이후 중국과 북한의 생활 수준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중국 경제가 가파른 성장에 비해 북한은 최악의 경제 위기와 기근 시대가 도래하였다. 북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는데, 중국 상품들은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식량난 악화 등 국가 공급체계가 붕괴되다시피 한 북한에서 화교의 역할과 의존은 절대적이었다. 이들을 통해 중국식 시장경제가 북한 내부에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북한의 장마당에서 유통되는 생필품의 60~70% 정도가 화교들이들여오는 중국산인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화교들은 중국과의 연줄을 이용한 북한 최대의 ‘무역 집단’으로 급부상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 화교들은 ‘달러 장사’를 비롯해 개인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북한 화교들은 황금기를 구가하면서 새로운 부유층으로 떠올랐다.

2009년 당시 중국 측은 북한에 화교가 5000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고 발표했는데, 지금은 그 수가 더 줄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 중국과 대만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일본 관광산업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 일본경제 호황기때 대거 유입

한국 내 화교인구는 약 2만여명에 불과한 반면 일본 내엔 약 60만명 이상의 화교가 거주하고 있다. 일본은 중국인에 배타적 정서로 인해 차별대우가 강하고 일본의 높은 땅값과 인건비 때문에 화교들은 큰 자본이 소요되는 사업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대부분의 일본 화교는 관광업, 음식업, 카페 경영 같은 서비스업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내 화교 기업은 4000여개에 달한다. 그러나 화교 기업들은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이른바 일본의 새로운 화교그룹들은 벤처, 정보기술(IT), 컨설팅, 의료건강 등 지식관련 업종에 매달린다.

현재 일본은 각 지역에 차이나타운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 화교들의 대부분의 사업은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일본의 차이나타운은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이에 화교들은 일본 정부기관의 협력을 통해 발전위원회를 조직하여 차이나타운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일본 관광산업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의 화교는 대부분 대만 출신이 많았다. 1978년 중국이 경제 개혁 정책을 실시하고 해외 이민을 허용하면서 많은 화교들이 일본에 왔다. 일본 경제가 호황을 누리던 때에도 수많은 화교들이 일본으로 유입되었다.

더욱이 일본 화교들의 사업기반이 다져지면서 일본 내 화교 인구는 계속 증가했다. 2007년에는 화교의 일본 내 외국인 구성비가 한국·조선족을 제치고 최고의 통계치를 나타냈다. 이제 일본은 고베에서 2007년 9월 제9차 세계화상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중일 관계를 포함한 화교간의 관계를 강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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