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전면적 혁신’ 폭넓은 공감대

소정현 / 기사승인 : 2017-01-23 11:5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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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정성수
● 신춘문예! 신문사 위주로 진행 ‘등용문’

신춘문예(新春文藝)의 어원을 살펴보면 신춘(新春)은 새봄을 뜻하며 문예(文藝)는 글재주를 말한다. 신춘문예는 신문사 또는 잡지사가 연말에 시, 수필 등 문학 작품을 공모하여 권위 있는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한다. 그 중 우수한 작품 한 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여 발표하고 상금을 주는 일종의 문예작품 선발 행사다.

문인육성에 공헌을 하는 신춘문예는 1925년에 동아일보를 필두로 하여 1928년 ‘조선일보’에서 실시하였다. 그 후로 일제 말기와 8·15 광복과 6 ·25 전쟁으로 몇 해 동안 중단되었다가 1954년에 창간된 ‘한국일보’에서 신춘문예 제도를 창설하였다. 뒤를 이어 ‘경향신문’과 ‘중앙일보’에서 개최함으로서 오늘 날에 이르렀다.

문단 등용문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신춘문예는 최근에는 여러 지방 신문은 물론 문예지에서도 앞 다투어 실시하고 있다. 많은 문인들이 시, 수필, 소설, 평론, 희곡, 동화 등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여 활동하고 있어 대단히 고무적이다.

‘신춘문예’가 갖는 비중은 대단하다. 그것은 신춘문예 공모가 시작되면 엄청난 숫자의 원고가 투고되기 때문이다. 까닭은 신문사라고 하는 권위와 이에 따르는 전파력에 있다. 대중매체 시대에 신문이 지니는 대량 전달 효과에서 비롯된다. 정초 휴일에 전국으로 배달되는 신년 특집호에 실리는 문학 작품들은 치열한 경쟁에서 뽑혀 당선됐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공모 제도로 심사의 공정성이 보장된다는 점이다. 신춘문예는 심사위원이 사전에 공개되지 않아 인맥에 따르는 추천제의 부작용이 없다. 따라서 참신하고 우수한 작품이 뽑힐 수 있어 당선자도 작품 자체를 공정하게 인정을 받았다는 긍지를 가질 수 있다. 거기다가 상금이라는 프리미엄이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 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춘문예 공모’ 시즌이 되면 수많은 문학도들이 몸살을 앓고 한 해의 작품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당선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신문사들 역시 풍작을 위해 경쟁을 한다.


● 신춘문예 공모에 갖은 문제점 뭘까?

신춘문예의 공모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공모 홍보자료의 응모요령이나 주의사항 문제다. ‘작품 첫 장과 맨 뒷장에 응모부문, 주소, 본명, 나이, 연락처(자택전화 이동전화), 원고량(200자 원고지 기준)을 기입해야 한다. 원고가 든 봉투에는 반드시 붉은 글씨로 '신춘문예 응모작품'임을 표시해 주십시오’ 위와 같은 주의 사항에서 왜? 나이를 묻는지 이해가 안 된다.

문학에는 정년도 구조 조정도 명퇴도 없다. 늦은 나이에 문학 활동을 하는 노년층 문학인들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다. 나이를 묻는다는 것은 백세시대에도 걸맞지 않는다. 어떤 의도로 나이를 묻는지 묻고 싶다. 응모자의 본명을 밝히는 것까지는 수긍할 수 있으나 심지어 응모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는 곳도 있다.

주민등록번호로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은 나이와 성별이다. 요즘은 개인정보 보호차원에서 주민등록번호를 함부로 알려주지도 묻지도 않는다.

작품성을 보고 당선자를 가리면 그만이다. 부득이 나이나 주민등록번호를 알아야 할 경우라면 당선자가 결정된 후 그때 요구해도 늦지 않다. 차라리 처음부터 응모 모집 요강에 나이의 범위와 남녀별 등 자격요건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물론 신문사나 주최 측에서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상금을 지급하기 위해서라든가 아니면 막판에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작품이 나왔을 경우 기왕이면 장래가 창창한 연소자를 당선시키겠다는 의도일 수 있다.

둘째는 심사의 신뢰 문제다. 심사는 공정성이 최우선이야 한다. 공정성은 전적으로 심사위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심사위원의 자격이나 선정은 물론 심사 과정이 투명하고 공신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객관적인 검증 없이 임의로 행사되어 문제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심사의 촉박성을 들 수 있다. 평균적으로 매년 11월 중순에서 12월 중순 까지 약 한달 정도 신춘문예 공모기간이다. 공모가 마감되면 예심과 본심으로 나누어 진행한다고 한다. 예심은 3~4일, 본심은 일주일 정도로 예심 위원들은 철야로 많은 원고를 읽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작품 일부분만 보고 탈락시키고 나머지 작품을 본심에 넘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좋은 작품이 예심에서 탈락되어 본심에 올라가보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촉박하게 진행되는 심사는 공정성이 보장될 수 없고 불공정성하게 뽑힌 작품은 환영받을 수가 없다.

공정하고 투명한 심사를 위해서는 한두 심사위원으로 심사를 해서는 안 된다.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칫 편협한 심사가 될 수 있다. 이는 결국 작품다운 작품을 선정하기 어렵다. 가능하다면 다수의 심사위원들에 의해 심의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학적 성향이 다른 심사위원들의 공통분모를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5인 이상라면 무난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함량 미달 작품을 선정하는 우를 범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매년 심사위원을 고정시키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신문사에서 특정인을 심사위원으로 연임한다는 것은 투명성이나 공정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한사람이 같은 해에 여러 신문의 심사를 겸하는 것도 배제 시켜야 한다. 심사를 맡은 만한 사람들은 많다. 한사람이 여러 신문사 신춘문예 심사를 독식한다는 것은 문학 발전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는 당선작이 유행가적 스타일에 야합하는 문제다. 신춘문예 응모자들이 당선에만 급급하다보니 작품성보다는 당선을 위한 의욕이 넘쳐 신춘문예 특유의 스타일을 찾아 작품을 쓴다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심사위원에 따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선작을 결정하는 데는 심사위원의 문학관이나 개인적인 취향의 개입을 배제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심사자의 개성이 의도적으로 관여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떤 신문사는 동일한 심사위원을 수년 동안 연임시키는 경우도 있고 지명도가 있는 어떤 심사자는 같은 해에 여러 신문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한다. 그러니 어떤 성향의 작품들이 당선의 기회를 얻게 될 것이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응모자들은 당선을 위해 심사자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쓰는 것이다.

지명도가 높아 심사자로 위촉되어 심사를 하는 사람은 왜 신춘문예 심사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혹시라도 문학에 권력을 휘두르는 폭군이 아닌지 권력의 하수인이 아닌지? 그것이야 말로 부끄럽고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넷째 당선 작품이나 당선자들의 단명성 문제다. 신문사 마다 당선자를 내 놓고 그 후로는 당선자 관리를 하지 않는다. 어떤 당선자도 밀어주고 끌어줘야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당선자 자신이 끊임없는 절차탁마 정신으로 작품을 써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불행하게도 당선작이 최후의 작품이 되어버린 불행한 당선자도 있다.

신춘문예의 단점은 당선자들의 수명이 비교적 짧다는 점이다.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유성처럼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많은 작품을 써보지 않고 응모한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습작을 거의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응모 작품만 갈고 닦아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한 번 당선으로 일약 저명 작가가 되어 전국에 알려지는 제도가 오히려 발전 가능성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다섯째 등단자 또는 재 등단자는 신춘문예 당선을 금한다는 문제다. 문단에서 작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잡지의 신인상을 받는 것이다. 이것도 여의치 않으면 자비로 시집, 수필집, 소설집, 평론집 등을 출간하면 된다. 그러면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 작가는 신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성작가는 신춘문예에 당선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런가하면 월간지 또는 동인지, 지방신문을 통해 등단을 해서 명함을 못 내민다고 생각한 작가들은 재조명을 받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문단계가 ‘서울 앞으로 나란히’가 가져온 단면이기도 하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중식이다 보니 기 등단자가 재 등단을 시도한다고 해서 비난할 근거는 없다.

문제는 다른 응모자가 등단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재 등단자가 도덕적 비난을 받는 이유다. 작가가 수적으로 많이 탄생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 문단의 발전을 위해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요즘 등단을 하지 않는 문인은 없어

신춘문예 당선자가 결정되면 당선을 통보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때 신상에 대하여 꼬치꼬치 캐묻는다. 첫 번째가 등단유무다. 등단을 했다고 하면 실격이라고 한다. 기성문인은 안 된다는 것이다. 모 신문에서 ‘2016년 00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인이 기성 문인임이 밝혀져 당선을 취소했음을 알려드립니다’라는 사고를 봤다.

참으로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요즘 등단을 하지 않는 문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대학의 평생교육원을 비롯해서 동사무소 또는 노인복지회관 등에서 문학 공부를 하면 등단은 하기 싫어도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함께 문학공부를 하는 문우와 경쟁적인 생각과 강사들의 권장에 너도 나도 등단을 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등단 한 사람들이다. 신춘문예에 당선자들의 프로필을 봐도 수년 또는 수십 년을 문학공부를 한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수상경력이 화려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순수한 신인이나 미등단자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미등단자가 신춘문예에 당선됐다고 하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재 등단은 문학적 도약의 방편이냐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냐 문제는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일이다.

여섯째 동일 작품 중복 투고의 문제다. 동일 작품을 이 신문 저 신문에 중복 투고하는 응모자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신춘문예 당선 취소가 지상에 보도 되어 체면을 구기기도 한다. 응모자가 무슨 악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권장할 만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선배 문인으로서 후배 문인들에게 보여줄 만한 일이 아니고 유명 간판을 얻고자 명예욕에 빠져있다는 볼썽사나운 혐의도 받을 수 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문학관과 인생관 나아가 세계관이 있다. 신춘문예를 통해 문인이 되고자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유혹이 바로 동일 작품 중복투고와 표절이다. 글이란 것이 스스로의 생각을 올바르게 적은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들통이 나기 마련이다.

이런 부적절한 행위로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고 명예를 얻는다는 것은 자칫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만의 색깔로 자기만의 글을 써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나만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내 세울 필요가 있다. 글을 위해서는 다른 작가들보다 훌륭해지겠다는 생각보다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태도로 스스로 담금질하여 나만의 작품을 써야 한다.


● 중복투고로 당선되면 양쪽 당선 취소

여기서 사족을 붙이고자 한다. 중복투고로 양쪽에서 당선되었다면 모두 당선이 취소된다. 말할 것도 없이 중복 투고 규정을 어긴 도덕성 결격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어떤 면에서는 신춘문예의 중복 투고 금지는 강자가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부당한 강요이자 갑질이다.

신문사 측에서 본다면 같은 작품을 다른 신문사에 중복 투고하는 것은 요행수를 바라는 안이한 자세라고 질타하겠지만 중복 투고를 금하므로 오히려 투고자들로 하여금 요행 심리를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한 군데만 응모하라는 경고는 응모자로 하여금 신문사와 심사위원이 자기 코드와 맞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엉뚱한 노력과 신경을 쏟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신문사가 진심으로 문학에 애정이 있고 재능 있는 작가를 발굴해 내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중복 투고 금지가 아니라 투고자 범위를 넓혀야 한다. 만약 당선작이 다른 신문사와 중복되었다면 낙선 처리가 아니라 두 신문사에서 동시에 당선작으로 발표함으로써 그 당선자를 아낌없이 축하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실력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 하나를 동시에 건진 것이기 때문이다. 중복 투고 금지는 다양한 심사자로부터 객관적인 검증을 받고 싶어 하는 응모자들의 소망을 외면하는 불합리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일곱째 출간에 관한 문제다. 요즘은 원고와 경비만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도 출간은 가능하다. 문학성이나 작품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책 한권 출간하지 않으면 문인으로 대접도 못 받는 세상이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려면 적어도 책 몇 권은 출간해야 할 정도다. 그 만큼 작품을 많이 쓰고 문학 공부를 많이 해야 당선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같다.

여덟째 수상에 관한 문제다. 같은 부문의 타 신문사에서 수상한 사람은 기성문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작품 자체를 응모할 수 없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춘문예는 ‘새봄을 뜻하는 글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작품성만 본다는 데 의의를 둔다면 어떤 수상을 했던 간에 상관이 없다.

끝으로 시 부분 공모에 대해서 사족을 붙인다. 요즘 신춘문예의 시 당선작은 난해해서 도통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안 간다. 평론가나 시의 고수들만이 알 수 있는 시는 죽은 시다. 시를 읽고 감동을 받을 때 시의 사명을 다 한다고 할 수 있다.

감동도 없고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시들이 당선이 되고 그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면 어떤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반문한다. 물론 실험적이고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작품과 차세대를 끌고 갈 유능한 시인을 발굴한다는 취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신문 헤드라인만 조합해 놓은 것 같은 해독 불가한 ‘시’야만이 당선된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것이 문제다.

이처럼 불합리한 등단 제도인 신춘문예가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현실이다. 불합리하다고 볼멘소리를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긍정적인 사고로 해답을 찾을 때 문학은 발전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신춘문예당선작 발표는 새해 첫날 신문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신선한 ‘뉴페이스’를 발굴함으로서 새로운 작가의 탄생은 신문 발행부수 이상의 속도감으로 전국에 퍼져나간다. 이것은 문학계의 기쁨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처럼 대대적으로 축하와 격려를 보내주는 나라는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신춘문예는 수많은 문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문학행사다. 디지털이 판을 치는 세상이 온다고 할지라도 아날로그의 원천인 문학은 많은 사람들의 위로이자 위안이다. 문학의 꽃이 피고 그 꽃을 바라보는 이들이 많은 세상은 향기로운 세상이자 살만한 세상이다. 작가 등용문인 신춘문예는 말 그대로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오르지 작품성만으로 선정하여 희망의 신춘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정성수 프로필 ■

-서울신문으로 문단 데뷔
-저서 : 시집 공든 탑. 동시집 첫꽃. 동화 폐암 걸린 호랑이 외 다수.
-수상 : 세종문화상. 소월시문학대상. 아르코문학창작기금수혜.
-현) 향촌문학회장. 사단법인 미래다문화발전협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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