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우리 남편 바람, 군수님이 책임지세요”

소정현 기자 / 기사승인 : 2022-05-17 15: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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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 퇴임앞둔 홍성열 증평군수 ‘생생한 고백’
2014년 ‘러브레터 출간’ 이후 스토리들 엮어

‘청렴 성실 겸손’ 덕목 전국의 최우수 지자체
‘꿈은 찾아가는 것’ 늦깎이 38세에 대학의 문
▲ 홍성열 군수는 군민과 소통하기 위하여 다양한 주제들을 모아 2014년에 1차 ‘홍성열의 러브레터’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번에 출간된 “우리 남편 바람, 군수님이 책임지세요”는 이후의 이야기들을 엮은 것이다.

 

●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증평군’
 

홍성열 증평군수는 3선을 했다. 이제 임기를 마칠 준비를 하고 있다. 홍성열 군수는 충북 11개 시군을 대표하는 충북시장군수협의회장으로, 또한 농어촌지역 72개 지자체로 구성된 전국농어촌지역군수협의 회장직도 수행했다. 증평군수면서 전국구 군수였다. 전국구를 대표하는 군수 역할을 하면서도 증평군을 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기초단체 중 하나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홍성열 군수는 군민과 소통하기 위하여 월요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다양한 주제들을 모아 2014년에 1차 ‘홍성열의 러브레터’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번에 출간된 “우리 남편 바람, 군수님이 책임지세요”는 이후의 이야기들을 엮은 것이다.
 

▲ 증평을 전국의 최우수 자치단체 반열에 올려놓은 홍성열 군수는 연거푸 3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제 퇴임을 앞두고 있다.

● 홍성열 군수가 직접 쓰는 체험적 서평

제가 출생한 것은 6·25전쟁 직후입니다. 상흔과 가난으로 극한 어려움에 처해 있던 1954년 7월, 저는 가난한 시골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전후 시기에 결혼하셨습니다. 결혼 당시 살림을 차렸던 전 재산이 ‘보리쌀 두 말’입니다. 가난이 자랑이 아니지만 가난으로 기죽지 않는 삶을 사신 부모님의 고향 증평은 당연히 제게도 고향입니다.

희로애락이 도레미파솔처럼 음계를 따라 움직인 증평 인생입니다. 가난했지만 사랑은 넘치셔서 3남 2녀를 두셨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우리 형제를 키우느라 눈물도 많이 흘리셨습니다. 찬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외풍 센 우리 집은 춥고 썰렁했습니다. 아랫목은 자식들에게 내어주고 윗목은 부모님이 차지하셨습니다. 온종일 힘들게 일하셨습니다.

▲ “꿈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차가운 윗목 구들장 위에서 밤새 끙끙 앓던 아버지, 그래도 새벽이 오면 불편한 몸을 일으켜 다시 일터로 나가시던 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부모님이 모두 일하러 나가시면 저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학교에 갔다 오면, 책가방을 방에 내던지고 부모님이 일하는 논밭으로 달려갔습니다. 해가 넘어갈 때까지 농사일을 도와드려야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호롱불에 의지하여 졸음을 참아가며 공부했습니다.

소년은 어려움을 이기고 자라서 떳떳하게 섰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부모님께서 저를 중학교에 보내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몇 날 며칠 가난을 원망했습니다.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벌 받는 것처럼 힘들다.’는 신광철 시인의 시가 있습니다. 진정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벌 받는 것처럼 힘이 듭니다. 소년은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진학의 꿈을 키워 갔습니다.

결국, 가난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공직에 입문해서도 틈틈이 주경야독했습니다. 38세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쳤습니다. 이루지 못했던 대학진학의 꿈도 이루었습니다. 다시 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꿈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일요주간 = 소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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