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남, 대외적으로 국가원수 역할...북한의 ‘外交 총괄사령탑’"

소정현 / 기사승인 : 2015-10-22 15: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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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파워 엘리트(1)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지난 10일 오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이 열병식에 참석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의장(오른쪽). ⓒNewsis
[일요주간=소정현 기자] 지난 2014년 3월 17일 북한의 노동신문은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주재 하에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었다고 보도한바 있다.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겸직 중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재추대되고 거취에 관심이 쏠렸던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유임됐다.

권력투쟁에도 고령에도 ‘건재과시’


북한의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이날 회의의 첫째 안건인 김 제1비서의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재추대 연설을 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김영남은 86세의 고령이어서 교체 여부가 초미의 관심을 모았었다.

북의 젊은 통치자 김정은이 통치기반 굳히기에 자기 사람 심기에 혈안이 된 가운데 더욱이 피의 숙청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격동기 시점에서 김영남의 노익장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지난 1998년부터 재임 중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대외적으로 국가원수의 역할을 맡고 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1948년 발족한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상 국가 최고 주권 기관이다. 입법권을 가진 점에서는 우리나라의 국회에 해당하지만 북한 헌법상으로는 흔히 말하는 ‘국회’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가진다.

지난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였지만 주석직은 계속 유지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유훈통치(遺訓統治)를 하다가 1998년 9월 5일 사회주의헌법이 개정되면서 김일성 주석이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고 외형상 국가원수 자격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게 넘어갔다.

1998년부터 대외적으로 ‘국가원수 역할’ 맡아
1928년 중국 료녕성 진강진 서강촌에서 출생


중국 료녕성(遼寧省)출생…정치 역정

현 87세인 김영남의 본명은 김명삼(金明參)으로 중국 료녕성(遼寧省) 관전현(寬甸縣) 진강진(振江鎭) 서강촌(西江村)에서 1928년 2월 4일 김택세(金擇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영남의 가족들은 광복 직전에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목란현(木蘭縣) 농촌 지역으로 이주하여 그 후 상지현(?志縣) 흑룡궁진(黑龍宮鎭)에서 생활하였다.

김영남이 상지현 상조 조선족 중학교에 재학 중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북한이 젊은이들의 참전할 것을 호소하자 한반도로 향하였다. 휴전 이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북한의 복구와 건설의 명분하에 가족들을 이끌고 북한으로 갔다.

이어 김영남은 김일성종합대학을 거쳐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金英柱)와 함께 소련 모스크바대학에 유학하였다.

지난 1956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과장으로 국제관계 업무를 맡은 후 1970년 11월 2일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처음으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72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부장을 맡았다. 1975년에는 당 국제담당서기를 역임했으며 1978년에는 당 정치국원이 되어 최고위 간부가 됐다.

김영남은 문장력이 뛰어나 김일성의 연설문 초안을 대부분 작성했다고 한다. 이에 비중이 크거나 권한이 막강하지도 않은 국제문제를 담당했던 당 서기였음에도 당 정치국 정식 위원으로 승격되는 등 김일성과 각별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주로 1970년대에는 당 차원의 외교업무에 종사하면서 소련 및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방문하는 한편 서방 각국의 사회당·공산당 대표단 및 언론인들과의 회합에 단골로 참석함으로써 북한의 대(對) 서방창구 역할을 담당했다

지난 1980년 10월 10일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비서국 비서로 선출되었고 1983년 8월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취임하여 1980년대에 활발한 외교를 펼치면서 북한의 대외관계사업을 주도했다.

문장력이 뛰어나 ‘김일성의 연설문’ 초안작성
실무능력 외교적 감각이 빼어난 인물로 평가


1984년 9월 뉴욕, 1985년 앙골라, 1986년 뉴델리, 1987년 평양, 1989년 키프로스 등지에서 개최된 비동맹 외교부장 회의에 참가하여 제3세계권 국가들과의 협력관계 강화에 힘쓰는 한편 소련 및 동유럽, 중국 및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지역의 사회주의 국가 및 비동맹 국가들에 대한 방문외교를 적극 수행했다.

1998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2009년 4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1차회의에서 위원장에 재선출되었으며 2010년 9월에는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김영남은 모스크바 대학 출신답게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영어도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구사하며 실무능력과 외교적 감각이 빼어난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1998년 사회주의 헌법 개정이후 국가수반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영국이나 유럽연합 등과 수교 추진에 성공했으며 중국과 관계개선 및 모스크바대학교 출신을 배경삼아 러시아와도 관계개선에 노력해왔다. 또한 김영남은 중국과 러시아 정부의 협력으로 식량난 극복에도 일조했다.

러시아와 외교관계 복원에 총력전

김영남은 허수아비라고 과소평가되는데 북한에서 밥값은 확실히 하는 외교관이다. 김영남의 나이는 중국 최고원로라는 장쩌민보다도 많고 외교통으로만 60년을 일했다. 북한과 대사급 수교를 맺는 나라에서 김영남과 만나지 않은 지도자가 거의 없으며 외국 정상들도 가볍게 대하지 못한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나 핵개발 문제로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한 가운데 북한은 중국의 과다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며 새로운 대안으로 러시아 관계 복원과 회복에 무척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 2000년대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몇 차례 만난 바 있지만 당시 북한의 미사일, 핵 문제로 인한 국제적 대북제재 논의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북러 관계는 소원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은 러시아의 동계 소치올림픽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2014년 2월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이후 북러 관계는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이에 푸틴은 김영남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러시아가 5만 톤의 인도적인 식량지원을 하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다. 전통적인 북러 관계가 복원되는 것이 실감나는 장면이다.

2015년 5월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행사 참석 차 러시아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하였다. 5월 8일 김영남은 크렘린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영남이 새로운 높은 단계에 들어서고 있는 양국 친선관계를 정치와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확대 발전시키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고 전한다.

비동맹과 아프리카 외교에 공세적

북한은 오랫동안 비동맹과 아프리카 우군화에 전략에 상당한 공을 들여왔다. 2015년 4월 22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반둥회의 60주년을 기념한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일명 비동맹운동 정상회의에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참석했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반둥회의의 중요성에 대한 연설을 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처음으로 진행된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는 지난날 역사 밖에 밀려난 두 대륙 인민들이 세계의 주인으로서 자기 운명을 당당하게 개척해 나가는데 있어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역사적인 회합이었다.”

이에 앞서 김영남은 2012년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초청에 의해 이란을 공식 방문하면서 동년 8월 26일에서 31일 이란에서 열린 제16차 비동맹 정상회의에 참석하였다.

한편 북한 최고인민회의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아프리카 외교에도 매우 공세적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이집트 새로운 수에즈운하 개통식에 참석차 이집트 방문을 마치고 2015년 8월 11일 귀국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은 보도한다.

지난 2014년 10월 23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일행은 수단에 도착하여 오마르 핫산 아흐마드 알 바위르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이어 24일에는 수단 민족회의청사에서 민족회의 의장과 담화를 나누고 연회에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강하국 보건상과 궁석웅 외무성 부상, 서길복 대외경제성 부상뿐만 아니라 김혁철 수단 주재 북한 대사도 참석했다. 수단 측에서는 수단 민족회의 경제관계위원장, 청년문화위원장, 보건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동월 27일에는 콩고 국회청사에서 앙드레 오바미 이뚜 국회 상원의장, 쥬스땡 꿈바 하원의장과 담화를 나누고 연회에 참석했다. 28일에는 드니 사수 온게소 콩고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회담에서는 두 나라 사이의 친선협조문제, 비동맹운동의 활성화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양국 간 보건부문 협조에 관한 양해문을 조인했다.

한국과의 정상회담에도 주연배우

지난 2007년 10월 2일 북측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만수대 의사당에서 남북정상회담의 주연격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맞았다. 당시 김영남은 다음의 환영사를 했다.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과 여러분들의 평양 방문을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오늘 우리는 동포애의 정을 안고 뜻 깊은 자리를 같이하였습니다. 6.15공동선언은 화해와 단합, 통일과 번영의 길을 비는 민족 공동의 기념비입니다. 나는 이번 북남 수뇌상봉이 온 겨레의 새 희망과 기쁨을 주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조문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2011년 12월 27일 평양 만수대 의사당을 방문해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면담을 가진바 있다.
이제 북한은 천안함 침몰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경색 국면의 타개책 일환으로 동남아시아와의 경제외교에도 적극적이다.

지난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침몰사건이 발발한 2개월 후 한국은 대북제재의 하나로써 남북교역을 원칙상 중단하기로 했었다.

2012년 5월 중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싱가포르에서는 토니 탄 대통령과 회담하고 “경제무역관계를 확대,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외자도입을 담당하는 합작투자위원회의 위원장과 경공업상 등이 수행하여 현지 전자제품기업과 식품공장도 시찰했다.

김 위원장 등은 싱가포르 방문 후 인도네시아도 방문해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 등과도 회담했다. 현지 영자일간지 자카르타 포스트는 회담의제를 경제발전과 투자, 무역에 중점을 둔 가운데 북한 측은 해외로부터의 투자를 관리하는 노하우를 인도네시아 측으로부터 내심 배우고 싶어 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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