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정치전문 인터넷 신문 <폴리뉴스>가 창간 9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한국정당실록 60년>을 이번호부터 특별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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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사덕 의원 |
그 첫 순서는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으로 폴리뉴스 김능구 대표가 그를 만났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인 그는 81년 11대 민한당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해 신민당 대변인, 민주당 부총재, 민주당 대변인, 정무제1장관,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국회 부의장 등 을 거친 6선의 거물 정치인이다. 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돌풍의 주역이 됐고 그 후 한나라당으로 복당, 현재는 친박계를 이끌고 있다. 그는 기자협회 부회장 시절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고, 대변인과 부총재 시절 언론으로부터 홍대, 홍총 이란 애칭으로 불릴 만큼 인기가 좋았다.
<3당합당, '온 마음으로 반대',13대 총선 무소속 출마, '지역 주의 정치 타파 위한 선택'>
홍 의원은 88년 13대 총선에서 지역주의 타파를 선언하며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된다. 13대 총선은 국회의원 선거구가 소선거구제로 바뀐 후 처음 실시되는 선거로 민정당 124석, 평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차지했다. 정치적으로는 이른바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3김정치가 막을 올린 선거란 의미를 지닌다.
홍 의원은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강남쯤 되는데서도 제가 처음으로 지역타파라는 깃발을 드니까 아마 이해하기도 좀 어려웠겠죠"라며 "선거 마지막에는 상대가 아 이거 승부모르겠다는 선까지 가지고 갔고, 또 큰표 차이가 아니였습니다. 제가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고 회고했다.
이후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이 탄생했고 이는 92년 12월 대선에서 김영삼 정부 출범의 기초가 됐다. 하지만 이듬해인 93년 3월 열린 14대 총선 결과는 민주자유당 149석(38.5%), 민주당 97석(29.2%), 통일국민당 31석(17.3%), 신정치개혁당 1석(1.8%), 무소속 21석(11.5%)로 정국판도를 3당통합 이전인 13대 초기의 여소야대 상황으로 되돌려 놓았다.
홍 의원은 3당 통합에 대해 "온마음으로 반대를 했습니다'며 "그거는 한마디로 요약하면은 호남고립이랬거든요"라고 3당 통합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꼬마민주당에 참여한 얘기로 말을 이었다.
<통합민주당에 합류, 14대 총선 당선,15대 무소속 출마는 민주세력 분열 때문>
홍 의원은 "이기택 총재님이 이러이러한데는 내가 참여하지 못하겠다 그러고 따로 깃발을 세웠고 그래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렸지요"라며 "김정길 의원이나 박찬종 의원이나 그때 이제 노무현 당시에 의원, 이런 사람들이 몰려가지고 이기택 총재님 중심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꼬마민주당을 만들게 됐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1991년 민주당과 김대중이 이끄는 신민당과 합당하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하자 이에 합류하여 제14대 국회의원(서울 강남을)에서 당선됐다. 홍 의원은 이와 관련해 "14대 선거 임박해가지고 실전에서는 이렇게 갈라져있을 게 아니라 영호남이 화합하는 김대중 총재님하고 이기택 총재님 손을 잡는 그런 모습이 좋지 아니하겠느냐 라는 취지하에 마침내 이제 하나가 돼서 선거를 치루었죠"라고 통합민주당으로 출마한 배경을 설명했다.
1995년 지방선거 이후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통합민주당에서 소속의원들을 탈당시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그는 이에 반발해 무소속으로 남았다가 96년 15대 총선에서 다시 무소속으로 강남(을)에 출마해 당선됐다.
홍 의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4대 말이 됐을 적에, 아시는대로 김대중 총재님이 다시 재기를 하기 위해서 당을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하여튼 긴 부분이 있습니다만 전 평생 지역정당은 안했으니까 지역정당에는 몸을 담을 수 없다고 그러고 나와서 다시 무소속으로 강남에서 출마를 했는데 그때는 13대 때에 제가 들었던 깃발이나 메시지에 대한 잔영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아주 수월하게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무지개연합, 25억만 확보 됐으면 승부를 했을 것...돈 없어 8일 만에 중단>
그는 1997년 무소속 의원 신분으로 문민정부의 마지막 정무장관으로 입각하기도 했으나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에 입당하지는 않았으며, 2000년 1월 19일 장기표와 함께 '1인 보스정치와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가칭 ‘무지개연합’ 창당을 선언했으나, 8일 만에 해체되며 1월 27일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그는 무지개연합 창당 배경에 대해 '정치 지형을 바꿔야 한다는 젊은 멘토들과의 상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홍 의원은 "정말로 정치지형을 바꾸고 정치문화를 바꾸었으면 좋겠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한테 돈이 없지 않느냐, 하나님이 모든 축복을 다 줬는데 돈 축복은 빼놔서, 그랬더니 역시 제 멘토들이 젊어서 내린 결정이죠"라며 "(멘토들이)당을 하나 만듭시다, 지역정당이 아닌"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래서 그때 시도를 했던 게 소위 무지개, 무지개라는 게 무당파, 지역타파, 개혁 그 세 깃발을 합당한 사람들이 하는 거다, 그래가지고 우리 장기표 선생을 모시고 지금 원내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제가 떡잎이, 제 눈에 좋아 보이는 사람들을 쭉 섭외를 하고 다녔습니다. 오세훈 시장도 거기에 들어있었고, 한선교 의원도 들어있었고, 여하튼 그때 내가 짚었던 사람들이 거의 다 원내에 들어왔어요. 제가 웬만큼 본 셈이죠"라며 무지개연합 창당 과정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해체된 이유에 대해 " 내 수중에 25억만 확보가 됐으면 그대로 승부를 했을 겁니다"면서 "당초에 여의도에 당사까지 얻어놓고 또 이파티(e-party)시스템으로, 그러니까 입당에서부터 당비납부까지 그러고 중앙당의 당무회의는 속기비서들이 온라인에 바로 띄우는 그런 시스템을 다 만들어놨는데 거기까지였습니다"라고 자금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회창 측 한나라당 입당 제의', 16대 총선 공동선대위장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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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입당 직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와 함께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고, 비례대표로 당선, 같은 해 6월 5일 국회 부의장이 됐다.
<탄핵 주역 역풍으로 17대 한나라당 공천 탈락>
2004년 한나라당 원내총무였던 그는 유용태 민주당 원내총무와 함께 노무현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그 후 2004년 4월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고양시 일산구(갑)에 출마했으나 한명숙 열린우리당 후보에게 석패했다.
홍 의원은 "16대 말에 내가 원내사령탑을 맡아가지고 적어도 국회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냈습니다"라며 "당의 젊은 리더들이 부탁하기를 경기도 북부지역이 이상할 정도로 허하니까 거기에서 좀 맡아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역풍에 받아 낯선 데서 승부가 되겠느냐 싶었지만은 뭐 해보는 거다, 그러고 일산으로 왔고 그만하면은 그 역풍 속에서 이긴 거에 버금갈 정도로 선전을 한 다음에 낙선을 했습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18대 총선 친박연대 선대위장...무소속 한 울타리 안에 들어가야 ‘설득’>
그 후 홍 의원은 한나라당을 탈당한 상태에서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지만 그해 7월 이명박 후보 측의 반대로 복당이 무산됐다. 하지만 그는 2008년 3월 '친박연대'의 공동 선대위원장을 맡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텃밭인 대구 서구에 출마해 한나라당 이종현후보를 압도적인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으며, 그 후 복당했다.
그는 친박연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친박연대는 원래 소멸을 목표로 해서 만들어진 정치그룹입니다. 박근혜 대표가 자리 잡고 있는 대로 회귀를 목표로 한 거니까, 처음부터 소멸을 목표로 한 겁니다"라고 전제하면서도 "다만 그 회귀를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지연시켰거나 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는 친박연대에 참여하게 된 과정과 친박무소속이 따로 움직이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처음에 만들어진 과정도 다수의 의원들이 박근혜 대표하고 친하다는 이유 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이제 공천이 탈락이 됐고, 저한테 이제 상의를 해왔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저는 처음부터 확고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무소속 출마경험이 많기 때문에 하는 이야긴데 각개약진으로 해서는 힘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그러니까 일단 한 개 울타리 안에 집어넣어야 된다, 그게 설령 정당형태가 아니더라도, 구락부가 되더라도 한 개의 깃발 아래에 모여 있어야 국민들이 우선 식별할 수 있을게 아니냐, 그러고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 그러는 주로 이제 부산경남 이쪽 영남 쪽의 친구들한테 자신 있더라도 그러지 않는 게 좋겠다, 그러고 있는데 친박연대가 먼저 떠 버렸어요"
홍 의원은 이어 "영남의 주축들은 착각으로 친박무소속 그러면은 그걸 벽보에 통일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줄 알고 그게 착각을 했습니다. 자기들대로 이제 뿔뿔이 했다가 선거 끝난 다음에 다시 울타리를 만들었죠"라고 털어놓았다.
<한나라당 대표경선 출마는 탄핵 정당성 입증 위해, 당에선 장을 세우기 위해 협조 요청해와>
홍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폭풍이 거셀 당시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이유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 낸 다음에 당 체제를 새로 정비하게 됐습니다"며 "그때는 이미 TV에 맹활약, 그리고 인터넷논객들의 아주 절묘한 합동 저거 때문에 탄핵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뒤집혀진 상황에서 됐습니다"고 당시 상황을 언급했다.
이어 "박근혜 대표 혼자 나왔고 뭐 그 외에 좀 결례가 될지 몰라도 전혀 얘기 상대도 안 되는 사람들이 나와서는 정당판의 용어로 장을 세우기가 어렵다, 그러면서 저한테 계속 요청을 하는데 내가 장 세워주러 나갈 생각은 없다, 그러다가 그렇다고 그러면은 정면으로 승부를 하마, 나는 탄핵이 정당했을 뿐더러 그 뒤에 오는 사태에 대해서 겁먹은 표정으로 물러서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겠다, 내가 당대표가 되면 여론이 어떻든 간에 이걸 하여튼 이겨나가는 쪽으로 당을 끌고 가겠다, 그리고 이제 승부를 했죠. 그리고 결과는 역시 예상했던 대로 지게 됐죠"라고 말해 출마 이유가 탄핵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란 점을 강조했다. <다음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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