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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3대 일본총리 ‘하토야마 유키오’ |
위기의 민주당 이끌고 2009년 총선에서 압승
총리역임 조부등 무려 5세대동안 정치인가문
知韓派 영부인 미유키! 가극단 출신 팔방미인
[일요주간= 소정현 기자] '당선 그 자체가 기적' 日本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 홋카이도를 지역구로 갖고 있으며 민주당 대표로서 2009년 8월 30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둬 2009년 9월 16일에 제93대 총리로서 임기를 시작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민당은 반세기 훨씬 이상을 제1당으로 군림해왔다. 이런 철옹성에서 민주당은 1955년 이래 10개월(1993~94년 사이)을 제외하고서 54년간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한 자민당 시대를 종식시키고 제1야당이 연립정부가 아닌 단독으로 정권을 교체하는데 성공한 것은 1947년 이후 62년만의 일이다.
하토야마 민주당 대표는 총선을 앞둔 2009년 5월 사퇴한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前대표의 바통을 이어받아 안개정국의 선거 레이스를 진두지휘하면서 민주당이 수평적 정권교체를 일구는데 혁혁한 성과를 일구었다. 민주당의 초강풍은 고이즈미 총리의 후임자였던 ‘후쿠다 야스오’ ‘아베 신조’ 前 총리의 잇따른 중도 사퇴, 그리고 아소 총리의 무능에 싸늘해진 일본인들의 변화와 개혁 열망을 대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선친들! 한결같이 정치 명망가
조부 이치로의 심대한 영향을 받아 "자유는 사랑이며, 이 사랑은 우애이다"를 강조할 정도로 '우애'를 최대 신조로 삼아온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63)! 그의 하토야마 가문은 1세가가 넘는 정치 명문가로 일본의 케네디가(家)로 불리운다.
하토야마는 정계를 주물러온 하토야마가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하토야마 가즈오(鳩山和夫)前중의원(衆議院)의장, 조부는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前총리, 그리고 부친은 하토야마 이이치로(鳩山威一郞) 前외무대신를 역임하는 등 어디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도 일절 손색이 없다. 어머니는 일본 재벌 '브리지스톤 타이어'의 창업자인 ‘이시바시 쇼지로’(石橋正二郞)회장의 장녀 야스코(安子)여사다.
먼저, 증조부 ‘하토야마 가즈오’(鳩山和夫, 1856~1911)는 미국 예일대에서 유학한 뒤 중의원 의원(9선), 외무차관, 중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는 등 메이지 1세대를 대표하는 유력정치인이었다.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1883~1959))는 1954년 일본민주당을 결성하여 총리에 취임했고 1955년 보수연합을 통해 오늘날의 자민당을 창당을 주도하여 1956년 12월까지 총리를 지낸 바 있다.(제52~54대 총리역임, 1954.12.10~1955.3.19)
하토야마 이치로 아들이자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부친인 ‘하토야마 이이치로’(鳩山威一郞)는 도쿄데이코쿠대학을 졸업한 뒤 1974년 중의원에 출마해 3선 경력을 쌓았고 1976년에는 외무상을 역임했다. 이이치로 부인인 ‘야스코 여사’는 일본 최대 자동차 타이어회사인 ‘브리지스톤 이시바시 쇼지로’ 창업주 장녀로 하토야마 유키오를 비롯해 두 아들을 모두 중견 정치인으로 키워냈다.
한 살 터울 동생인 하토야마 동생 ‘구니오’((鳩山邦夫, 62)는 現 자민당 소속 중의원 의원이다. 구니오는 자민당에서만 내리 9선 경력을 쌓았고 문부성 장관, 노동부 장관, 법무대신, 총무상 등을 두루 거친 베테랑 정치인으로 일본에서 사상 첫 형제 총리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구니오 의원 아들인 ‘하토야마 다로’ 역시 2003년 증조부 저택이 위치한 도쿄 분쿄구에서 도의회 의원에 당선돼 5대째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외조부로서 어머니가 부친(이시바시 쇼지로)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이 하토야마의 든든한 정치 자금줄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막강한 정치적 배경과 재력을 두루 갖춘 셈이다.
▼ 집권 모태 '유토피아정치연구회'
1947년 2월 11일 도쿄 분쿄(文京)구에서 출생한 18세 청년 하토야마 유키오는 1965년 일본 도쿄대 공대를 선택했다. 법대나 정치학과 배경삼아 정치인 세습이 당연시되던 그때 일본 최고의 정치명문가를 이어갈 장손으로선 매우 이례적 결정이었다. 하토야마는 명문가 자손들의 답습 코스라 할 수 있는 가쿠슈인(學習院) 초등학교와 중학교, 도쿄도립 고이시카와 고교를 거쳐 도쿄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스탠포드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1년 센슈(專修)대학의 강단에 서면서 경영학 조교수로 재직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동생인 ‘구니오’(邦夫)보다 10년 늦게 자민당 간판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하토야마가 정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39세이다. 1986년 제38회 중의원 선거 당시 자민당 공천으로 선친들이 목장을 갖고 있는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출마하여 중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2005년 총선까지 7선을 내리 기록했다. 온천지대로 유명한 홋카이도 9선거구는 하토야마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 前총리가 1920년대 농지 해방을 실시한 뒤 하토야마 가문의 정치적 기반이 된 곳이다.
다음으로, 민주당 집권의 불씨를 지피운 하토야마의 정치역정을 소급하여 상세하게 세밀 투사하여 보기로 한다. 정치 초년생 하토야마는 1988년 6선, 7선의 다선의원들이 득실거리는 보수적 분위기의 자민당에서 1986년에 등원한 동기의원들과 파벌을 초월한 정책모임 '유토피아정치연구회'를 결성했다. 이들 멤버들은 ‘정-관-재계’ 유착을 강력하게 비판했고 금권이 배제된 정치개혁을 주창했다. 특히 당시 자민당 최대 스캔들이던 리크루트 의혹을 집중 공격해 당내 정치개혁의 불을 지폈다.
하토야마는 1993년 6월 자민당 분열시 탈당하면서 ‘신당(新黨) 사키가케’에 합류한 뒤 이어 동년에 실시된 총선 이후 출범한 비(非)자민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내각에서 관방 부장관을 맡았다. 1996년에는 (舊)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표에 취임했다. 1998년 현재의 민주당 창당에 참가하여 간사장을 거쳐 1999년 9월 대표에 취임했다.
하토야마 총리의 박히든 카드 결행 시점은 2002년 연말이다. 그는 야당세력 결속만이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한다는 초지일관 신념 아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가 이끄는 자유당과의 합당을 추진했다. 오자와는 일본 정계에서 '육식계'로 통하는 정치 고수이다. 당시 하토야마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 구성원들은 오자와 그룹과 비교해 전투력이 왜소하다 하여 '초식계'로 호칭되었다.
하토야마는 2003년 당세 확장을 위해 자유당과 합당하기에 이른다. 하토야마-오자와 회담에 맹렬한 반대에 직면한 하토야마 총리는 이 일로 대표직을 사임하면서 "작은 차이점은 뒤로 하고 대동단결해야 한다."라는 사퇴의 변을 남겼다. 결국 하토야마와 오자와와 연합은 현재의 정권교체의 초석이 되었다. 민주당이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물로 구성된 것은 이 같은 합종연횡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5년 9월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민주당 대표 체제하에서 간사장 중책을 맡았으며, 2006년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대표 체제에서도 다시 간사장직을 맡는 등 당내 요직을 두루 섭렵했다. 결국, 오자와 대표가 측근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사퇴하고 나서 2009년 5월 대표경선에 출마하여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와 접전 끝에 승리하면서 2009년 8월 총선에서 정권교체의 주역이 됐다.
▼ 국내문제 ? 미일관계 ‘진한 안개’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의 지지율이 또다시 최저치를 기록하며 연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 4월 17~18일 양일간 실시한 전국 여론조사에서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지지율은 25%이다. 이는 압도적 지지율을 보이던 지난 선거 승리 당시에 비해 반 토막이 난 셈이다.
직격탄은 클린정치 구현을 표방한 민주당에 큰 기대를 걸었던 일본 국민들에 큰 실망을 안겨주면서부터이다. 하토야마 총리의 위장 정치헌금 사건과 오자와 간사장의 정치자금관리단체인 리쿠잔카이(陸山會)의 정치자금규정법위반이 민주당 현 정권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검찰 수사는 두 사람이 직접 위장 정치헌금이나 정치자금 허위기재에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냈으나 비서들이 기소되면서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다. 이는 하토야마 총리와 오자와 간사장의 국정 장악력 약화로 이어졌다.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휘발유 잠정세율 폐지, 고속도로 무료화 등 핵심 정책이 야당의 반대에 부딪혀 혼선을 거듭한 가운데,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 비행장 이전 문제 역시 큰 두통거리이다.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은 현재 미 · 일간 최대 갈등 현안이다. 1945년 건설된 후텐마 미군기지는 오키나와현 나하시 중심부에 위치해 극심한 소음과 미군과 관련된 각종 범죄로 주민들의 이전 요구가 멈추질 않았다.
자민당은 2006년 후텐마 기지를 2014년까지 오키나와의 나고시에 있는 슈워브 미군 기지로 옮기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2009년 8월 말 중의원 총선 당시 핵심공약으로 후텐마 기지의 오키나와현 밖 이전을 내걸었던 민주당이 新집권 여당이 되면서 복병이자 암초로 다가왔다. 하토야마 내각은 오키나와현 주민들의 목소리를 존중하면서 미국과의 동맹관계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딜레마의 늪에 빠진 것이다.
미국으로선 후텐마 기지가 동북아 미군 배치상 전략적 요충지기 때문에 쉽사리 현 외곽으로 이전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2006년 합의를 준수하여 오키나와현 내 다른 지역으로 비행장이 이전돼야한다고 일본을 압박하고 나섰다. 당초 오키나와 주민들의 고통을 해소하겠다는 의욕적 취지로서 정면 돌파 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오키나와 주민도, 미국도 하토야마 정부에 등을 돌리면서 참으로 곤혹스런 처지로 내몰렸다.
▼ ‘동아시아 공동체’ 그리고 한일관계
하토야마의 지론인 '우애에 바탕을 둔 아시아 중심 외교'는 최근 동아시아 3국에 전례 없는 훈풍을 일으켰다.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가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밝힌 가운데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단어가 최근 빈번하게 거론되고 있다. 작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제1야당인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는 월간지 '보이스' 기고를 통해 동아시아 지역의 통화를 통합하는 '아시아 공동통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하토야마는 "오늘날 동아시아와 역사 속의 동아시아의 가장 큰 차이점은 1강 헤게모니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라면서 "현대 동아시아는 긴밀한 교류와 왕래를 하며 지리적ㆍ역사적ㆍ정체성 장벽을 뛰어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과 같은 '동아시아 공동체'를 건설하자는 주장이 주 화두이다.
그렇다면 한일관계는 이전 일본 정권에 비해 과연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을까? 일본 내각부가 2009년 12월 12일 발표한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는 응답은 63.1%로 나타나, 지난 1978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는 한류 드라마 열풍에다 하토야마 유키오 정부 출범 이후 한일 관계가 어느 때보다 호시절이라는 기대감 반영으로 분석된다.
하토야마 대표는 한일의원연맹의 일본 측 고문과 민주당 내 일한교류위원장, 재일한국인 등의 법적지위 향상을 위한 의원연맹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일본 정치계에서 친한파로 분류된다. 하토야마 총리는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서도 일관된 반대 입장이다. 2006년 4월 부산 방문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정면으로 비판한 바 있고, 같은 해 5월 서울 방문에선 "야스쿠니 참배를 중단하지 않는 한 한국과 중국의 신뢰를 가져올 수 없다."며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하토야마 총리가 각별한 가지고 있는 사안은 러시아 사할린 잔류 한국인 문제다. 하토야마 총리는 1991년부터 '사할린 잔류 한국인 문제 의원간담회'에 참여해왔다.
▼ 톡톡 튀는 영부인 ‘하토야마 미유키’
일본의 퍼스트레이디 하토야마 미유키(鳩山幸·67) 여사에게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다. 단발머리에 청바지를 즐겨 입는 미유키 여사는 한마디로 '톡톡 튀는' 여성이다. 그녀는 한 TV 인터뷰에서 한 번도 이루지 못한 꿈을 꿔본 적이 없다며,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꿈이라고 당당히 밝힐 정도로 정치 이슈에서부터 종교, 음식 조리 등 모든 주제에 대해 격의 없이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그녀의 인생은 다국적 파노라마 삶의 전형이다. 미유키는 1943년 무역업을 하던 부친의 중국 근무로 상하이에서 출생했다. 본토 귀국 후에는 무역도시 고베(神戶)에서 성장했다. 고베의 명문학교 가이세이(海星) 여학교를 졸업 후에 여성들로만 구성되는 다카라즈카(寶塚) 가극단에 들어가 예술적 끼를 한껏 발산했다.
6년간의 무대생활 후 24세이던 1967년 첫 남편과 결혼해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하토야마 총리는 도쿄대학교 공학부를 졸업하고 이듬해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 유학해 박사수료 과정을 밟았다. 이곳에서 하토야마는 이미 결혼한 한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미유키는 남편과 이혼을 하고 네 살 연하의 하토야마 총리와 2년 동거 후 1975년 재혼했다. 미유키와의 결혼은 일본의 전통에 부합되지 않았으며 대표적 정치 명문가 출신의 청년이 흔쾌한 결단이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한류스타인 이병헌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영부인 미유키 여사의 '한국 사랑'은 범상치 않다. 끼니마다 김치를 식탁에 올릴 정도로 한국 요리에 강한 애착을 느끼고, 한글 공부에도 열심이다. 한류스타 배용준은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총리 부부로부터 쾌유를 비는 난(蘭) 화분을 선물로 받아 눈길을 끌었다. 이들 부부가 슬하에 둔 아들 하토야마 기이치로(鳩山紀一郞·34)는 부친의 뒤를 이어 도쿄대 공학부를 졸업했으며 현재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대학의 객원연구원이다.
◆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 프로필
2009년 민주당 대표, 2005년 민주당 간사장
1999년 민주당 대표
1996년 구(舊)민주당 대표
1986년 중의원 첫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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