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다시 소환된 릴케의 기억

최철원 논설위원 / 기사승인 : 2019-11-10 09: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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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종일 바쁜 업무로 하루를 지냈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정신을 쏟다 일과를 끝낸 저녁시간. 책장에서 습관적으로 빼어들은 책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작가 이름 중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이름. <말테의 수기>, <두이노의 비가>, <소유하지 않은 사랑> 등 고독, 슬픔, 사랑, 죽음의 시를 쓰고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묘비명이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겹겹이 싸인 눈꺼플들 속 익명의 잠이고 싶어라' 라고 쓰인 시인......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자 후대 후배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백석 시인의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 이름 나오는 시인....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바람 벽이 있어- 전문

오래전에 열심히 외웠던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나오는 시인.....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프랑시스 짬, 라인넬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별 헤는 밤- 전문

"사랑이 어떻게 네게로 왔는가/햇살처럼 왔는가, 꽃눈발처럼 왔는가/기도처럼 왔는가? 말해다오" 라고 보석처럼 아름다운 연가를 부른 릴케.
이렇게 가을이 깊어가는 밤에는 독일어권의 대표적인 근대시인인 동시에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친 릴케의 시 '가을날'을 떠올려 본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가을날- 전문

사는 동안 위로와 격려가 필요할 때,
울적하고 힘들 때 릴케가 쓴 '젊은 시인에게 편지'를 읽었다. 지금도 그때 처럼, 글은 외부 평가를 기대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으로 눈길을 돌리라는 메세지를 준다. 깊어만 가는 이 가을, 열정과 낭만을 잃고 모래처럼 서걱거리는 나의 메마른 가슴에 릴케는 불씨를 지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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