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높은 종교재판’ ‘게토조성 격리’

소정현 / 기사승인 : 2013-04-25 20: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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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유럽대륙의 유대인(스페인-이탈리아) 이슬람세력 쫓아낸 이사벨라여왕 유대인 대탄압
국내 추방령 내리고 종교 재판 자행 국운 대쇠락

재정착한 유대인들 네덜란드 경제에 혁혁한 공로
이탈리아 베니스 세계 최초의 게토조성 강제격리

[일요주간=소정현 기자]

● 아랍영향권 땐 관대, 통일왕국시엔 거센 탄압

8세기 접어들면서 스페인 반도는 이슬람제국과의 전쟁으로 711년 스페인 중부 도시인 ‘똘레도’(Toledo)는 아랍왕 타릭(Tariq)에 의해 점령되고, 이후 약 400년간 아랍제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스페인이 아랍의 영향권에 접어들면서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자, 스페인 거주 유대인은 약 3백년간 자유롭게 시, 철학, 과학뿐 아니라 유대교를 발달시킬 수 있는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또한 모슬렘 세계에 살던 이들 유대인은 아랍 문화를 유럽에 전해 주는 매개체 역할의 구심점이었다.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 시대에 스페인 남부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북부의 바스크(Vasco) 지역은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바르셀로나는 독립국이었다. 그 나머지 영토를 카스티야(Castilla) 왕국과 아라곤(Aragon)이 왕국이 양분하고 있었다.

이사벨라 여왕(재위 1474~1504)은 대략 10년에 걸쳐 왕권을 강화하며 자신감을 얻자 ‘레콘키스타’(Reconquista)를 선언한다. 이는 ‘재정복’이라는 의미로 이베리아 반도((Iberia Pen)에서 이슬람을 완전히 쫓아내는 작업이었다.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은 일심일체 하에 7년에 걸친 긴 전쟁을 통해 재정복에 성공했으며 민족적 일체감을 되찾았다.

그렇다면 이사벨라 여왕과 유대인 사이에는 어떤 검은 구름이 끼어들었을까? 이사벨라 여왕은 이베리아 반도를 재탈환한 후 무슬림은 물론 유대인들까지 가혹하게 탄압하고 추방했으며, 그녀의 통치 기간에 ‘종교재판(Inquisition)’이 시작됐다.

1492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해의 하나이다. 1492년은 스페인이나 유럽 모두에 특별한 해다. 1492년은 카스티야 여왕이었던 이사벨 1세가 마침내 스페인 통일을 완수한 해였다.

주목할 사실은 이 해에 신대륙 발견과 함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2개국의 영역인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 잡고 있던 유대인 축출 등 세 가지 이슈가 동시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1492년 스페인 남부에 위치한 항구인 세비야(sevilla)에서 콜럼버스 선단의 신대륙 항해 준비가 한창이었다. 공교롭게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되는 마지막 날이었던 8월 2일 출항한 콜럼버스는 2달여의 항해를 거쳐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다.

이슬람 세력을 쫓아내고 스페인을 통일한 이사벨라 여왕은 황금의 신대륙까지 그 영역을 넓혔으니 무소불위 최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이사벨라 여왕은 중앙집권의 공고화 추진에 따른 통합 스페인의 종교적 통일성을 위해 유대인과 이슬람에 대한 관용정책을 전격 폐기한다. 개종 아니면 스페인을 떠나든지 양자택일하라며 거센 위협으로 몰아넣었다.

이사벨라 여왕은 ‘알함브라 법’(Alhambra decree, Edict of Expulsion)을 포고한다. 알함브라 법은 스페인에서 연령에 상관없이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법이다. 1492년 3월 30일, 스페인 거주 모든 유대인은 8월 전까지 스페인을 떠나거나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회교도 축출과 함께 절정에 달했던 기독교 열기가 주원인이었지만 유대인들이 소유한 막대한 재산에 대한 욕심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 악명 높은 종교재판 ‘토르케마다’가 주도

이사벨라의 칙령이 발표되자 이슬람교도 무슬림들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품으로 떠나는 한편,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던 유대인들 역시 대거 스페인을 떠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이 개종을 강요당하면서 거부할 경우에는 사지(死地)로 향하거나 추방당했다. 개종한 유대인 중에는 비밀리에 유대 전통을 유지하기도 했다.

이사벨라 여왕은 유대인들의 말살책 일환으로 악명 높은 종교재판소를 설립했다.

가톨릭교회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마라노스’(Marranos, 가톨릭 유대인)라 칭하였으며, 모슬렘과 유대인들의 개종자들을 ‘콘베르소스’(Conversos, 새로운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본래의 자신들의 관습과 생활양식을 보이는지 여부를 끊임없이 감시했다. 만일 혐의가 드러나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혐의가 최종 확인되면 시가로 끌려 다니며 수모를 당한 후 화형에 처해졌다.

당시 여왕의 보좌관과 세금 징수 총책임자로 고위직을 맡고 있던 유대인 ‘아브라바넬’(Abravanel)과 아브라함 세니오는 천문학적 숫자인 3만 냥의 금화를 내면서 이를 막아보려 했지만, 종교 재판소장 ‘토르케마다’(Torquemada)의 반대로 좌절 무산됐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출생한 ‘아브라바넬’은 포르투갈 왕에 등용되었는데, 1483년 스페인으로 가서 재무관으로서 가톨릭 두 왕에게 봉사했다.

1492년의 유대인 추방으로 인해 나폴리와 이어 베네치아로 이주해서 그 정부에 등용되었다. 유대인 추방 정책으로 인해 스페인을 떠난 유대인의 수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학자마다 다른데, 20만 명에서 80만 명까지 다양하게 추산된다.

1483년 종교재판장으로 임명받은 토르케마다는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낸 후 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을 이단으로 몰아 처형한 인물이다.

그는 너무나 끔찍한 고문을 자행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으며 로마의 교황마저 중단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로마교황 식스투스(Sixtus) 6세는 ‘콘베르소스’(Conversos)의 모든 잘못들을 사면한다고 발표했지만, 토르케마다는 아랑곳없이 종교재판을 속개하였다.

물론 스페인에서만 종교재판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유럽의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 12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도록 종교재판이 계속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3만 명의 마라노스들이 화형 당한 것으로 밝혀진다.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의 역사적 흔적이 넘치는 곳은 ‘코르도바’이다. 특히 서-칼리프(caliph)라고도 불리었던 이슬람왕조가 수도로 정한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Cordoba)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도심에서 거주했다 .

이곳은 중세시대 아랍과 가톨릭 세력이 공존했던 지역으로 로마에 의해 본토인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되었던 유대인들 북아프리카를 거쳐서 많이 옮겨와 둥지를 틀었다.

코르도바의 유대인지구(Juderia)는 그 규모도 크고 오랜 기간 동안 존속되었다. 코르도바 출신 유대인 철학자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를 비롯하여 저명한 유대인들이 역사에 그 흔적을 남겨 놓았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코르도바의 거리! 코르도바의 유대인지구는 ‘메스키타’(Mezquita) 북쪽 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좁은 골목길에 꽃들로 장식된 흰색 건물들이 가득하다.

● ‘스페인’ 쇠락하고 ‘네덜란드’는 부흥 계기

스페인이 유대인들을 쫒아내면서 스페인의 국력은 약화일로 단계로 접어든다. 그 실상을 상세하게 알아보기로 한다.

추방된 유대인들은 스페인 사회에서 핵심 역할을 하던 고급 인력들이었다.

재정을 쥐고 있는 것은 물론 의료, 천문, 과학, 철학 등 전문 분야에 널리 종사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금력과 기술력으로 스페인 왕국의 번영에 큰 도움을 줬다.

당시 유대인들은 카스티야(Castilla)에서 재정과 금융권을 장악하고, 각 지방의 행정기관과 왕실의 요직에도 진출해 있었으며,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稅吏)이자 왕국의 1등 납세자였다. 이들 유대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되자, 세비야의 집세는 반으로 떨어졌고 바르셀로나의 시영은행들은 파산했다.

스페인을 떠난 유대인들이 정착한 곳은 벨기에 북부의 제2의 대도시이자 유럽의 항구도시인 ‘앤트워프’(Antwerp)이다. 화폐와 금은(金銀)은 일절 소지하지 못한 체 황급히 보석만 겨우 챙겨온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다이아몬드등 보석유통업의 대혁신을 일으켰다.

이어 유럽의 모든 철도와 연결되는 교통 요충지인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Amsterdam)으로 옮긴 유대인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세워 향료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고, 인도·동남아·중국·일본·서인도제도의 무역, 아프리카 노예무역도 주도했다.

원래 스페인의 속령이었던 네덜란드가 후일에 급성장한 것은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이 가져온 후폭풍이었다. 스페인을 떠난 유대인 출신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네덜란드 발전에 거대한 동력의 하나가 됐다.

유대인들은 또 영국으로도 향했는데 이들은 영국의 발전에도 지대한 기여를 했다. 나중에 대영제국 전성기에는 유대인이었던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가 총리에 오르기도 했다. 영국에는 유대인에 대한 관용이 있었고 영국은 그들의 힘을 활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 유대인들의 첫 게토 ‘이탈리아 베니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널리 알리는데 일조한 한 인물이다. 셰익스피어는 1596년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에서 유대인 샤일록을 ‘악독한’ 고리대금업자’로 묘사하면서 피도 눈물도 없이 오직 돈에만 혈안이 된 유대인을 상징하는 통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대인들에겐 직업이 제한되어 전당포와 고리대금업만이 이들에게 허용된 것을 알 때, 역사적 애환을 진하게 감지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작품의 무대를 베니스로 정한 이유는 우연이 아니다. 당시 상업도시로 번성을 구가한 베니스는 세계 초유로 조성된 유대인 ‘게토’(Ghetto)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중세유럽 시대에 지방 영주들은 유대인을 용이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특별한 옷을 고안해서 입게 하거나 어떤 표식을 만들어 가슴에 달게 했다. 유대인들에 이런 이러한 부당한 조치는 후일 독일에서 자행된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가능케 하는 바이러스를 심대하게 창궐하게 하였다.

베니스에선 13세기부터 유대인들의 정착이 허용되었지만 온갖 방법으로 유대인을 탄압했다. 유대인들을 구별하는 표식으로 노란휘장을 달고 다녀야 했고, 땅의 소유와 유대교회당의 건축이 금지됐다. 또 유대인은 기독교 예배와 세례를 받도록 강요되기까지 했다.

16세기 유럽세계는 유대인을 격리시키는 적극적 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한다. 1516년 베니스에선 700명의 유대인들이 포탄을 제작했던 작고 더러운 섬으로 추방됐고, 유대인들은 낯에만 섬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밤에는 보초병들이 출입구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로마에서는 유대인 사회의 구심점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1880년경까지 오래된 게토였던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의 한 구역에 아직도 살고 있다. 이곳의 ‘스쿠올라 템피오’라고 불리는 30 가족의 경우에는 각각의 족보 연원이 1900년 전인, 로마 황제 티투스(Titus)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예루살렘 신전이 파괴된 후, 그들의 조상은 쇠사슬에 묶여 이곳까지 끌려 왔다. 로마의 유대인은 장중한 가톨릭교회의 그림자에 짓눌려 은둔하며 살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밤에 돌아다닐 수도 없었으며, 밤에 나도는 것이 발각되면 금고형이나 사형에 처해졌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게토(Ghetto)의 시작이며, ‘게토’라는 용어도 여기서 유래한다. 이리하여 게토는 유대인이 강제로 살게 되는 격리 구역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이내 게토는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폴란드, 보헤미아의 도시에도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난다. 게토에서의 삶은 유대인의 시야를 좁게 만들면서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에 직면한다. 그러나 주변 세계와 단절된 게토에서 유대인은 종횡무진 토라 연구와 토론에 열중할 수 있었고, 자체 교육을 통하여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필사 지켜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군에 의한 점령 당시 2만5000 명에 이르던 이탈리아 유대인은 전쟁 후 점차로 그 숫자가 불어나 3만2000 명에 도달했다. 이는 북쪽과 동쪽으로부터 이탈리아로 온 유대인 이민에 의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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