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찌 폴란드와 서유럽 유대인 ‘게토’로 강제 이주
독일의 다하우, 부헨발트, 작센하우젠 대표 수용소
폴란드 '아우슈비츠' 생체실험 가스학살 만행자행
오스카 쉰들러! 목숨 걸고 유대인 구해 영원히 칭송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필사적추적 교수형 정의구현
[일요주간=소정현 기자]
■ 히틀러의 집권 ‘인종청소 주타깃 유대인’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시편 44:10,105:13)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신명기 28:65)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신명기 28:67)
구약성경 시편과 신명기의 메시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찌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를 생생히 각인시키고 남음이 있다.
1914년 독일 베를린의 인구 중 유대인은 5%에 불과하였으나 이들의 세금납부 액수는 무려 3분의 1에 이르렀다. 1908년 프러시아(독일) 대부호 5명 중 1명이 유대인 혈통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서 유대인들은 10만 명이 참전해 3명 중 1명이 훈장을 받고 무려 1만2천명이 전사했다. 이들은 독일을 자신의 조국이라며 전적 충성하였으나 그 대가는 6백만 명이 넘게 숨지는 대학살 일명 홀로코스트였다.
1933년 1월에 집권의 깃발을 올린 나찌는 독일인을 ‘우수한 인종’이라는 맹신 하에 유대인들을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여 독일의 통합을 저해하는 아웃사이더로 치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대부분 유럽 유대인들은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약 6백만 명의 유대인 남성과 여성 및 어린이들이 학살당하였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 인구의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1933년 2월 28일 히틀러는 나찌즘의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독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에 나찌 정권은 소위 ‘제국의 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련의 수용 시설 건설에 본격 착수했다. 그리고 이들은 언제든지 재판 없이 투옥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초기에 나찌가 건설한 집단 수용소의 죄수들 대부분은 독일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동성애자 그리고 ‘반사회적’ 인물로 낙인찍힌 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광기의 포로가 된 히틀러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찌 독일은 약 2만개소의 수용소를 건설하여 유대인을 포함하여 9백만 명의 사람들을 참살하였다. 유대인 외에 희생자들은 폴란드 양심수, 옛 소련군 포로(주로 정치장교), 집시민족 등이었다.
1933년의 나찌 집권기부터 나찌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1945년 사이 34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부터 탈출 러시가 이어졌다. 더욱 애석한 것은 이 중 약 10만여 명이 이주한 국가들을 독일이 정복하였다는 사실이다. 독일은 이들 대부분을 집단 학살수용소로 보내어 저 세상 사람으로 만들었다.
스위스는 약 3만 명의 유대인을 받아들였으나 동일한 숫자만큼이나 이들을 국경에서 돌려보냈으며, 약 10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몰려들었다. 스페인은 제한된 수의 난민들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포르투갈의 리스본 항구로 보냈다.
유대인을 수용하는 나라가 고산(高山)의 산소처럼 희박하여지자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유대인들은 비자에 구속을 받지 않았던 유일무이의 신천지인 상하이로 이주하였다. 일본 정부의 지배하에 있었던 상하이는 1만7천명의 유대인 입국을 허락하였다.
앞서 히틀러 집권 이전인 1930년대에 6만 이상의 독일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하바라(Haavara, 이송) 협의서에 따른 것이다. 하바라는 독일과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 조직간 협정으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촉진하기 위하여 체결되었다.
■ ‘게토와 집단학살수용소’ 조직적 말살
독일 나찌정권의 산파역인 히틀러가 자행한 인종청소의 전무후무 대상이 되었던 유대인의 비애의 연원과 전말을 상세하게 해부하여 보기로 한다. 히틀러의 제1단계 유대인 말살정책은 게토(Ghetto)에 초점 모아진다. 나찌는 폴란드를 침공한 이후 게토를 조성하여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집시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어 집단 살륙하기 임시방편으로 이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소급하여 볼 때, 16세기 유럽 세계는 유대인을 격리시키는 적극적 조치를 취한다. 바로 그것이 강제로 유대인의 집단 거주지역 조성을 일컫는 일명 게토(Ghetto)이다. 1516년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유대인을 게토에 격리시키면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나찌는 폴란드와 서부 유럽의 유대인들을 게토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여기서 그들은 불결한 환경에서 열악한 음식으로 고통 속에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토는 주로 폴란드의 도시에 설치되었다. 크라코우(Krakow), 로드츠(Lodz), 르보브(Lwow), 바르샤바(Warsaw)를 위시하여 리투아니아의 빌나(Vilna), 라트비아의 리가(Riga)가 대표적 게토이다.
가장 규모가 큰 곳은 ‘바르샤바’ 게토이다. 질식할 정도의 좁은 공간에 38만 명의 유대인들을 몰아넣었다. 다음은 ‘로드츠’로서 16만 명이 갇혀 살았다. 작은 단칸방 하나에 평균 9.2명이 비집고 살았으니 얼마나 비위생적인지는 불문가지이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 게토에 수용된 유대인들은 굶주림과 온갖 질병으로 무수히 죽어나갔다. 인간 이하의 생활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쥐라도 잡아먹어야 했다. 전염병의 창궐은불 보듯 했다. 1941년 한 해만도 바르샤바 게토에서 4만3천명이 생명을 잃었다. 길거리에 시체들이 수북이 쌓여 있어 악취에 몸서리쳐야 했다.
1941년에 독일군이 ‘유대주의-볼셰비즘(Bolshevism)’ 음모의 본거지로 각인된 소련을 침공하면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루마니아 북부, 소련 서부의 유대인 거주지역이 독일의 점령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서 이들 또한 사지(死地)의 운명을 피해나갈 재간이 없었다.
게토에 속박되어 있던 유대인들은 1942년 7월부터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최우선 이송되었다. 7월 22일 첫 화물열차가 출발하였다. 그 후 52일 동안 약 30만 명이 강제수용소로 행했다.
연이어 다른 게토의 사람들도 열차에 실려 떠나기 시작했다. 이들을 독일의 다하우(Dachau), 부헨발트(Buchenwald),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집단 수용소로 이송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주요 도시의 게토들은 텅 비게 되었다.
또한 나찌 점령 지역의 유대인은 네덜란드 웨스터보크(Westerbork)나 프랑스의 드랑시(Drancy)에 위치한 임시 수용소로 먼저 보내진 후, 폴란드의 집단 학살 수용소로 수송되었다.
1942년 나찌는 유대인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인 폴란드 점령지에 베우제츠(Belzec), 소비버(Sobibor), 그리고 트레블링카(Treblinka)에 집단 학살수용소를 열었다. 가장 악명 높은 수용소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약 300km 떨어진 ‘아우슈비츠’(Auschwitz)다.
처음에는 폴란드 정치범들을 살해하기 위한 장소로소 이용된 전체 28동의 아우슈비츠는 원래 폴란드군 병영이었다. 유럽에서 유대 인종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정책이 수립되면서부터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학살의 중핵이 된다. 매일 수백 명이 이곳에서 죽었고, 하루 1,000명 이상 죽은 때도 부지기수였다.
나찌는 학살을 효율적으로 진척시키기 위해 가스실을 건설하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 비르케나우(Birkenau) 집단 학살장에는 4개의 가스실이 있었다. 수용소로 수송되는 건수가 최고조에 달하는 기간 동안에는 하루에 6,000명 정도의 유대인이 가스로 질식사하였다.
최우선 희생자들은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 어린이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 즉시 선별되어 보내졌다. 학살 피해자들의 시체는 하루에 약 1,500~2,000구의 시체가 소각되었으며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카펫과 가발을 만들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안경, 머리카락, 신발도 발견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같은 이들이 생체 실험을 자행했다고 증언했다. 멩겔레는 강제 수용소로 실려 온 수감자들을 쭉 세워놓고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스실행, 생체 실험대상, 강제 부역자라는 신호로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친위대 대위이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내과의사였였던 요제프 멩겔레는 뮌헨대 학에서 약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인류학·우생학으로 시선을 돌려 인종간 차이점을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찌 치하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인종적 편견에 물들어 갔다.
멩겔레가 아우슈비츠에 부임한 것은 1943년. 이후 종전 직전까지 21개월간 군의관으로 있으면서 그는 홀로코스트를 주도했다. 멩겔레가 생체 실험은 잔인하다 못해 엽기적이었다. 쌍둥이를 하나로 꿰매는 수술을 시도하는가 하면, 생식기를 교체하고 아이 눈에 화학약품을 주사해 눈 색깔을 바꾸는 등의 실험을 자행했다.
멩겔레는 다른 나찌 전범들처럼 전쟁이 끝나고 가명을 사용하며 살았다. 1949년에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살다가 1959년에 우루과이와 파라과이를 거쳐 브라질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979년 브라질 상파울루 해변에서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
생생하게 살펴본바, 유대인들 대부분은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고, 생존한 소수의 사람들조차 강제 노역과 기아, 예고 없는 처형으로 산목숨이 아니었다. 1945년 1월 27일 소련의 붉은 군대가 아우슈비츠로 진격하였을 때 이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7천명에 불과했다.
1947년 폴란드 정부는 아우슈비츠의 일부를 국립박물관으로 만들었으며, 1979년 국제연합문화과학기구(UNESCO)는 이곳을 세계 유산으로 지정했다.
1948년 5월, 유대인 수용소 생존자와 난민들은 신생 독립국인 이스라엘에 봇물 넘치듯 유입되었다. 약 14만 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몇 년 동안 고토에 속속 흘러 들어갔다.
■ ‘수호천사 오스카’ ‘저승사자 아이히만’
본인이 전쟁 중 모은 돈과 수백 여 년간 집안에 전해내려 오던 가문의 전 상속재산을 쏟아 부어 절체절명의 사면초가에 몰린 유대인의 소중한 생명을 구한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
오스트레일리아의 토마스 케닐리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는 1993년 제66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7개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1939년 9월 독일은 침공 2주 만에 폴란드 군을 대파했다. 유대인에게는 고유의 가족 번호를 등록하고 매일 만명 이상의 유대인이 집단수용소인 ‘크라코우’(Krakow)로 이송되었다.
독일군 점령지인 폴란드의 크라코우. 기회주의자 ‘오스카 쉰들러’는 폴란드계 유대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러 도착한다. 쉰들러는 그 공장 인수를 위해 나찌 당원이 되어 SS요원들에게 여자, 술, 담배 등을 뇌물로 바치며 갖은 수단을 총동원한다.
한 푼의 돈도 이지 않고 유대인을 이용하는 쉰들러. 한편으로는 유대인 회계사인 스턴(Itzhak Stern)과 가까워진다. 스턴은 쉰들러의 이기주의와 양심을 뒤흔든다.
쉰들러는 노동수용소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유대인들을 구해내기로 단단하게 마음먹는다. 그들을 독일군 점령지인 크라코우로부터 탈출시켜 쉰들러의 고향으로 옮길 계획을 하고, 스턴과 함께 유대인 명단을 만들게 된다. 모든 계획은 수행되고 마침내 1,200명의 유대인을 사지에서 구해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금이빨을 뽑아 만든 반지와 전범으로 몰릴 쉰들러를 염려해 모두의 서명이 된 진정서를 써서 고마움을 극진히 표시한다. 그들이 준 반지에는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전 세계를 구한 것이다’라는 탈무드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반지를 받아든 쉰들러는 더 많은 유대인을 구해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쉰들러는 1945년 5월 독일이 연합군에 정식으로 항복하기 전날, 자신은 유대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나찌당의 일원이기 때문에 체포되면 전범 재판을 받아야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부인과 함께 도주한다.
쉰들러는 고향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행적을 감추며 은폐된 삶을 살기 시작하였고, 그곳에서 가명을 쓰며 영화 제작자로 나설 채비를 갖추기도 했다.
그러나 쉰들러는 그의 과거 행적을 소상히 아는 체코계 옛 나찌들의 협박에 아르헨티나로 도피 신세를 피할 길이 없었다.
1949년부터 농업에 정착한 쉰들러는 자신들을 구해준 유대인들이 매년 한 번씩 보내준 돈으로 근근이 생활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다소 평온한 생활을 보내던 쉰들러는 1957년 신문과 방송 등에 자신이 유대인들을 구원해준 스토리가 연일 소개되면서 아르헨티나로 피신해온 전범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기 시작하면서 농사일을 포기하고 결국 서독행 비행기에 오른다.
쉰들러가 독일에 정착을 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유대인들은 그가 큰 공장을 가동할 수 있게 전폭적 협력을 아끼질 않는다. 대형 시멘트 공장을 운영하던 쉰들러는 1961년 따가운 주위의 눈총으로 사업을 포기한다.
1961년 이스라엘의 모사드에게 체포되어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어온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쉰들러는 세계의 언론으로 부터 '천사'와 '은인'이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았지만, 1974년 홀로 쓸쓸히 세상과 작별을 고하길 이른다.
쉰들러가 전쟁 중 구해준 1,200여명의 유대인들의 자손들은 4천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자신들의 혈육을 구해준 쉰들러에 감사한 마음을 한시도 잊질 않았다. 쉰들러의 유언에 따라 텔아비브 근처 공동묘지에 안치된 그의 무덤에는 단 하루도 빠지질 않고 헌화가 들어오고 조문객들이 끊이질 않아 그의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나를 생생히 일깨우고 있다.
1999년 오스카 신들러 자신이 목숨을 구해준 유대인 1,200명의 명단 원본이 포함된 문서가 독일 북부 힐데스하임의 한 가옥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런 수호천와와는 극단으로 대비되는 인물이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다. 나찌 독일의 친위대 장교로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유대인 말살을 총지휘하였던 아이히만은 유대인 체포, 고문, 살육에 핵심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자 이탈리아와 중동 등지를 배회하다 1950년 아르헨티나로 비밀리에 잠입하여 기계공으로 신분을 세탁하며 운둔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23일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의 전설적 요원 ‘피터 말킨’에 체포되어 아르헨티나 독립 150주년 축하사절단이 타고 온 비행기로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법정에서 유죄평결을 받고 1962년 5월 3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신생조직이던 모사드의 역량과 나찌즘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유감없이 확고하게 전 세계에 과시한 미증유의 대사건이었다.
여실히 살펴본바, 홀로코스트는 중세 이래의 종교적ㆍ문화적 인종주의, 생물학적 인종주의, 反유대주의, 민족주의가 혼재된 총합체이다.
1870-1880년대는 유럽에서 근대적 反유대주의가 점증한 시기이다. 19세기 중반 유럽 대륙에서는 자유주의가 발전하며 자국의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제도권으로 편입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유대인들이 사업이나 자유직업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이를 두려워하고 시기함으로써 새로이 반유대주의가 불붙은 것이다.
이는 1881년 러시아의 황제 알렉상드르 2세의 암살 사건과 관련해 박해를 받은 러시아 지역의 유대인이 대거 유럽대륙으로 이주한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러시아 서부와 폴란드의 농촌지역 거주 유대인들이 유럽의 도시들에 넘쳐나며 유럽인들의 반감을 불러 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反유대주의적 정당, 결사, 선전기구가 우후죽순격으로 생기며 反유대주의가 제도화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1920-30년대의 유럽 전역에서 대대적인 확산을 통해 결국 나찌의 유대인 학살의 길을 튼 셈이 되었다.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저작권자ⓒ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부산 덕포동 중흥S클래스 건설현장서 화재 발생...검은 연기 치솟아 [제보+]](/news/data/20220901/p1065590204664849_658_h2.jpg)
![[포토] 제주 명품 숲 사려니숲길을 걷다 '한남시험림'을 만나다](/news/data/20210513/p1065575024678056_366_h2.png)
![[포토] 해양서고 예방·구조 위해 '국민드론수색대'가 떴다!](/news/data/20210419/p1065572359886222_823_h2.jpg)
![[언택트 전시회] 사진과 회화의 경계](/news/data/20210302/p1065575509498471_939_h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