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살라 불후의 삶… 값진 위대한 자산”

김영실 박사 / 기사승인 : 2013-06-29 15: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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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보훈의 달 맞아 “김상옥 의사 재조명”(총괄편) 美國 독립투사 다수는 지도자로 국가를 반석 반열에
한국은 후손들 자긍심 갖도록 예우 방치하여 대조적

김상옥의사 기념관 조기 건립 정부 지자체 앞장서야
김상옥후손 가난과 자녀들 요절 각별한 관심 수반을


[일요주간=김영실 박사] ● 美國은 영토만으로 강대국이 아니다

가족이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용감히 장렬하게 싸우신 김상옥의사의 생가와 격전지가 현재 효제동 73번지에 존재해 있다. 그분은 국내에서 독립운동 뿐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 요원들의 생계를 도왔으며, 성경을 전국으로 보급하고 학교를 세워 교육을 장려하는 등 그 하신 일이 너무 방대하다.

그러나 그분 생가와 격전지 주위는 지금 러브모텔과 음식점으로 형편없이 전락되어 가고 있음이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 고귀한 피를 흘리며 나라를 사랑했던 그분의 귀한 순교지를 거룩하게 보건 하는 것이 우리 후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닌가!

미국의 독립역사는 아직 240년도 채 안 된다. 1774년 그들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을 선언한 후, 이 짧은 역사 속에 세계 최강의 나라로 자리 잡고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연원이 짧은 미국이 어떻게 이런 막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그들 나라가 독립되자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독립투사들을 정치인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자유를 위해 투쟁한 그들이 오늘날 정직과 신뢰의 사회를 견고하게 구축하였기에 최강대국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사립학교에 가보면, 자신의 증조, 고조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고 자랑하는 후손들을 만날 수 있다. 그 땅이 큰 축복 속에, 그들 조상들의 뜻을 받들어 이끌어지고 있음이 너무나 부럽다. 우리나라도 독립한 후, 나라 독립에 몸을 바친 사람들이 바른 정치를 했더라면, 지금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을 생각하며 아쉬움을 표한다.

● 김상옥의사 후손들의 애처로운 悲劇史

나의 친가의 김상옥 할아버지를 비롯해 그분의 어머니와 아내, 두명의 동생들와 식구들까지, 또한 나의 외할아버지 한훈의사와 할머니도 모두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 몸과 생명, 자식과 재산까지도 다 바치신 분들이시다.

어떻게 그 길고 긴 세월동안 그토록 무서운 고문과 암흑 속 고통의 시간과, 굶주림과 추위를 참고 견디셨는지, 더 나아가 사랑하는 자식과 식구, 동지를 잃었을 때의 그 아픔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고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생생하게 조명한 것처럼, 나의 할아버지 김상옥의사의 온 가족은 고문의 고통 속에 두려워 떨며 지내야 했기에 김의사의 모친 김점순을 비롯해 그녀의 아들 태용과 딸 의정도 병들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딸 의정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으나, 식구 중 오직 둘째아들 세원만이 남았다.

김상옥의사의 아내 정진주는 29살 청춘과부로 홀로 남게 되었는데, 김의사의 남동생인 춘원이 낳은 5명의 아들 중, 4남 태운이 어려서부터 잘 따르자 양자로 맞이하게 함께 살게 된다.

1958년 내가 태어날 때, 산파를 대신하여 정진주 할머니가 엄마 몸에서 나를 받으셨는데, 그분은 때때로 나를 “의정아!”라고 부르며, 가슴에 묻은 자신의 죽은 딸과 이름을 혼동하여 부르셨다.

정진주 할머니의 교회 가방은 항상 내 손에 닿지 않는 높은 곳에 걸어두셨는데, 그 가방 속엔 커다랗고 무거운, 그리고 테두리가 빨간색으로 칠해 더 어렵게 보이는 한문 성경책과, 정말 맛있는 굵은 설탕이 발린, 너무 커서 입안 가득히 채워지는 하얀 눈깔사탕이 들어있었다.

할머니의 말랑말랑한 얼굴은 잘 익은 홍씨 감보다도 더 부드러웠는데, 중풍에 얼굴의 감각이 없어서 침을 흘리더라도 그런 할머니를 나는 무척 좋아했는데, 이는 할머니는 한 많은 가슴의 아픔을, 나를 향한 사랑으로 바꾸어 다 쏟아 부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철이 들고 보니, 어떻게 옛 어른들은 그 고통의 세월을 견디고 지내셨을까.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가 아직 어릴 때, 매년 1월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 때, 할아버지의 동지들은 검은 옷과 검은 모자를 쓰고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숫자가 너무 많아 집안으로 다 들어오실 수가 없어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앞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음식을 장만해 내 놓으셨다. 그들은 내 키보다 몇 배 더 큰 김상옥 할아버지의 사진을 향하여 심각하고 슬픈 얼굴로 절을 하셨다.

나를 사랑하셨던 가여운 정진주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시고 난 후엔, 검은 옷의 할아버지들의 발걸음은 드물게 이어졌고, 동작동 현충원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가 안장된 후엔 더 이상 우리 집에 오지 않으셨다.

김상옥의사와 그 아내 정진주의 묘, 그 바로 뒤쪽 줄엔 사돈인 한훈열사와 그의 아내 유응두의 묘가 한곳에 묻혀있다. 생전에 못 이룬 사돈의 만남을 그들은 사후에서 이루고 계시겠지!

일본인들은 독립운동가의 자녀들의 학업진행을 방해하며 철저하게 무식하게 키우려는 정책을 폈다. 그 때문에 한훈열사의 외딸이자 나의 어머니 한정수 여사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초등학교만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의 아버지 김태운옹은 김점순 할머니의 도움으로 소학교를 거치고 고등학원에서 독학을 하셨다. 일본인들이 소년병들을 징집하여 일본으로 끌고 가자 그는 함경남도 탄광으로 피하여 3년을 숨어 지내게 된다.

그 후 단국대학교 전문정치과를 수학하나, 6.25가 발생하자 학도병으로 전쟁에 임하게 되고 육군 포병 사령부에서 제대한다. 매도 수도 없이 맞고 청소년기를 영양부족으로 지냄으로 인해, 양쪽 폐는 다 망가졌으며 큰 심장수술도 하였지만, 올해 87세의 나이로 생존해 계심이 감사하다.

김상옥의사의 후손의 계보를 총괄하면 다음과 같다.

김상옥의사는 김수로왕 72세손으로 아버지 김귀현과 어머니 김점순 사이에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나이 34살에 의거 순국한다.

그의 형제는 형 춘옥(일찍 요절함)과 동생 춘원, 그리고 여동생 아기가 있다. 김상옥의사는 아내 정진주와의 사이에서 아들 태용과 딸 의정을 두었으나, 태용은 일찍 죽고 딸도 결혼하여 두 아들(효기, 세원)을 낳으나 딸과 사위, 외손자 효기까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고, 세원만 남는다.

김의사의 동생 춘원은 7명의 자녀(태찬, 태서, 태복, 태순, 전순, 태운, 태천)를 두었으며, 남겨진 자손이 없는 정진주 여사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잘 따르는, 5살 된 태운을 양자로 맞이하게 되었고, 일경의 눈을 피하다가 해방 후 1946년 입양 서류를 만들게 된다.

태운은 돌아가신 부친의 소원에 따라 한훈의사의 고명딸 한정수를 아내로 맞아, 2남 3녀인 주동, 영심, 영실, 영욱, 민홍을 둔다. 손주는 종찬, 종근, 용민, 용원, 다니엘, 사무엘, 예진, 예은, 종한, 지원이 있다.

● 외조부는 항일투쟁 애국지사 ‘한훈열사’

말미에서 나의 어머니 한정수여사의 노고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한정수 여사는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한훈의사의 외딸로 1929년에 태어났다. 한훈의 아내 유응두여사의 태내 환경이 좋지 않아 7개월 반만에 출생하였으니, 의사도 없었던 그 옛날 미숙아의 생존은 기적이었다. 호된 시집살이와 홀시어머니 정진주 여사의 병수발로 몸이 약해진 어머니는 평생 육체의 아픔과 씨름하고 계시다.

아직 아들딸이 태어나기도 전에 김상옥과 한훈은 서로 사돈이 되자고 약속을 하였고, 그들 사후에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한 아들과 딸, 김태운과 한정수는 1951년 결혼을 하였으며, 두 분 슬하에는 3남 2녀의 자녀가 있으나 모두 부모를 닮아 약한 심장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머니의 부친이자 독립투사인 외조부 한훈열사에 대한 스토리를 약술한다. 독립투사 한훈(1890∼1950)은 1905년도 민정식(閔正植) 수하에 홍주의병(洪州義兵) 소모장(召募將)을 거쳐, 1907년 나철, 기산도, 윤이병, 이상학 등과 더불어 충남 신도안에서 회합하고 광복활동을 활발히 해왔다. 광복단, 대한광복회, 그리고 1920년엔 광복결사대(일명 조선독립사령부) 등을 조직해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펼쳐왔다. 첨언하면, 홍주의병은 홍주군(현 충남 홍성군)을 비롯한 홍주문화권내에서의 반일의병항쟁을 일컫는다.

김상옥의사와 함께 1920년 미국 의원단 방한 때 대대적인 의거로 조선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려했다. 한훈은 땅속에 묻어둔 무기를 파내어 김상옥에게 가지고 갔으나 이미 김상옥의 거처가 발각되어 숨어있던 일경들과 격투끝에 한훈을 비롯 총 16명이 체포되었다. 그분은 이후 20여 년간의 혹독한 옥고를 치르고 1939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와, 신도안 정장리((지금의 계룡시)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서장환 등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을 계속해나갔다.

광복을 맞은 한훈은 1945년 10월 상경해, 광복단을 재건하고 총재에 조소앙, 부총재에 신익희, 그리고 자신을 단장으로 임시정부의 이념에 따라 반일·반공에 입각한 자주독립국 실현에 노력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1946년 4월 광복단 예하에 신도지부를 조직하고, 신도안 중봉산 뒤에 충렬사를 건립해 이후 매년 11월 17일 순국선열기념절에 애국지사 추도제를 거행해 왔다.

그러나 민족 비운 6.25가 터지자, 한훈열사는 걸음도 걷지 못하는 깊은 병환 중에 북한군에 의해 강제 북송된 후 소식이 끊겼다.

그분이 시작한 추도제는 1982년 신도안 지역 재개발 사업이 개시되기 전까지 지속되었으며, 1907년의 광복단을 기념하는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이 신도안 군부대 입구인 무궁화동산에 세워져있다.

나의 아버지 김태운옹은 1987년 국가공무원 행정직 퇴직 후, 오늘까지 약 25년 동안 자신의 전재산을 쏟아부어 (사)김상옥·나석주의사 기념 사업회를 만들어, 매년 두분 의사의 높으신 행적을 기념하셨다.

현충원엔 김상옥의사의 묘와 비석이, 마로니에 공원엔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종로 길은 ‘김상옥로’로, 종각역 8번 출구엔 ‘종로경찰서 폭파 의거터’를, 그리고 효제초등학교엔 ‘김상옥 체육관’과 ‘어록비’를 세우는데 온 힘을 쏟으셨다.

아버지의 최종적 소원은 김상옥의사의 출생하신 집과 마지막 서거하신 집을 구입해 ‘김상옥의사 기념관’으로 만들어, 후대에 남겨주는 정신적 요람을 만드는 것이다. 그 집 주인은 집값을 터무니없이 부르며 집 문을 열어주지 조차 않는다.

김상옥의사와 그 가족의 고귀한 희생을 대가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으랴! 그 대가는 고사하고, 영웅이며 용장인 김상옥의사의 생가와 그분의 선혈이 흐른 마지막 격전지의 고귀한 장소가 현존하는데도, 정부의 무관심 속에 러브모텔과 음식점으로 어지럽게 보존되고 있음은 선진국을 외치는 대한민국의 수치이다. 하루빨리 서울시와 지자체 정부가 앞장서서 김상옥 기념관을 그 터에 세워야 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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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옥의사의 회고와 기념사업의 비전들 ■

"보혈로 뒤덮힌 효제동 격전지를 성지화"

<서울 종로구의회 김복동의장>
서울 종로구는 대한민국의 심장부이자 역사·문화·정치·경제의 1번지이다. 그러한 이유로 조선시대 이래로 우리 역사의 한 획을 긋는 굵직한 일들이 모두 종로에서 비롯되었다. 종로가 지니는 이런 상징성 때문인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스스로를 던져 나라를 구하신 애국지사 또한 종로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나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종로구의 효제동 85번지에서 자라났다. 어릴 적부터 내가 뛰어놀던 그 곳엔 방아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나무로 만든 이 다리를 건너가면 낙산으로 통하는 길과 연결이 되었다. 숲이 우거진 그 곳에는 소를 몰고 사람들이 다니던 작은 길이 나 있었는데, 미아리에서 산등성을 넘어 연결되는 이 산길은 여인들이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시장을 오가는 길이기도 했다.

내가 장성하여 우리 마을을 위해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시작할 무렵, 여든이 넘으신 동네 할아버지로부터 낙산과 관련된 김상옥 의사의 일화를 들을 수 있었다. 주지하시다시피, 김상옥 의사께서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던 무단통치와 문화통치가 교차하는 시기였다.

동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내게는 마치 전설의 홍길동과 같은 꿈속 이야기와도 같았다. 김상옥 의사는 어려서부터 애국심이 특별했었지. 나라를 잃고 조선 백성 모두가 슬퍼하며, 날이 갈수록 악랄해져가는 일본 경찰들을 무서워 벌벌 떨기만 하고 있었는데, 나와 한 동네에 살던 김상옥 형님은 용감하게 새벽이면 낙산에 올라가서 나뭇가지에 자기가 그린 태극기를 묶어놓았지.

그분은 검정 옷에 하얀 바지를 입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낙산을 뛰어다녔었지. 어떤 때는 태극기를 거꾸로 매달아 놓기도 하고, 어떤 때는 태극기 그림의 작대기를 틀리게 그릴 때도 있었다네. 일경(日警)들은 사람들이 볼까봐 재빨리 떼고는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매번 하는지 화를 냈었어. 어린 나는 그런 용감한 상옥 형님을 우러러 보았지

이러한 비범한 소년기를 거친 김상옥 의사께서는 결국 34세 아까운 나이에 자결로서 생을 마감하셨지만, 그 분의 숭고한 조국애를 보면서 조선 백성들은 다시 한 번 독립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일요주간’이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90년 전 기울어가던 국운을 바로잡으려 피를 흘렸던 김상옥 의사의 조국애를 네 번에 걸쳐 넓은 지면을 통해 자세히 조명함을 높이 치하 드린다.

AD 73년 나라를 빼앗긴 유대 이스라엘이 ‘마사다’에서 독립전쟁을 벌였으나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자, 원수의 손에 죽지 않기 위해 모두가 자결하여 정신적인 큰 교훈을 후대에 남겨주었다. 세월이 2,00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까지 이곳을 이스라엘 후손들의 정신교육 장소인 ‘마사다’를 거룩히 보존하며, 특히 장교들의 정신교육을 이곳에서 시키고 있다.

그러나 종로의 영웅이며, 서울 한복판 항일 시가전의 용장인 김상옥의사의 생가 및 마지막 격전지가 허물어져 가고 있는데 우리 정부에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김의사의 보혈로 뒤덮힌 효제동 72번지와 76번지 주위를 성지화시켜, 우리의 후손에게 ‘마사다’와 같은 정신적 교육장소로 물려줌이, 우리세대가 가기 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추모행사 전국민과 함께 폭넓게 확산"

<우당장학회 이종찬 이사장>
나는 어렸던 상해시절, 아버님께서는 김상옥 의사에 대하여 신화적인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어쩌면 우리 아버지는 6년 연상인 김의사에 대하여 반했던 것 같다.

“김상옥 의사는 당시 많은 분들부터 비호장군 소리를 들었다. 그분은 새로운 권총만 나오면 언제든지 먼저 입수하시고 평소에도 그 조작기술을 익히시더라. 마치 서부영화에서 나오는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잘난 척하고 작은 무용담에 대하여도 자랑을 하는데 이런 말을 옆에서 듣고도 빙그레 웃을 뿐 전혀 자기자랑을 하지 않은 분이었지.

한때 장안에서 ‘김상옥 비호장군이 나타난다.’란 소리만 들어도 왜경들은 대경실색했고 왜놈에게 비굴하게 붙어서 살고 있는 친일매국적(親日賣國賊)들은 벌벌 떨었다. 김의사는 신출귀몰했다. 눈 오는 날, 신을 거꾸로 신고 잠적하여 그를 쫓던 일본 경찰을 혼란시키기도 하였지 참으로 용감하신 분이다.

마지막 날, 김의사 한사람 잡기 위해서 용산에 주둔했던 일경 일개여단이 출동했다. 하지만 용감하게 싸우시다 자결하여 돌아 가셨다. 그분은 확실한 의열단원이었다.

아버님만 김의사를 찬양한 것은 아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모두 김의사를 우상처럼 여겼다. 해방후 귀국하신 성재 할아버님(이시영 초대 부통령)께서는 김의사의 추도식에서 “열사는 천정의 신무불측(神武不測)한 금강결정(金剛結晶)”이라 격찬하셨다.”

김의사가 돌아가셨을 때의 연세는 불과 34세였다. 나는 지금도 내가 그 나이에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아마 옛날 독립투쟁하신 분들은 모두가 우리보다 위대한 것 같다. 김의사는 20대에 이미 일화(日貨) 배척 물산장려와 민중계몽운동에 나서시지 않았던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직접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간하지 않았는가? 그분이 상해에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기 전부터 이미 남다른 조국애와 개혁정신으로 무장하셨다.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으로 저항하사다가 순국하신 곳이 종로구 효제동 85번지였다. 그러므로 나는 81년 종로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일찍부터 김상옥 의사의 발자취를 남기고 싶었다.

그러던 차 1986년 다행히 존경하는 서영훈, 박진목 선생 등 애국선배 여러분들을 모시고 추모행사와 더불어 동상건립운동의 뜻을 모을 수 있었다. 그 후 각계의 모금을 통하여 오늘날 종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그분이 최후를 맞이한 낙산 기슭에서 보이는 장소에 동상이 세워졌다. 나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더 많은 후학들이 이분에게 많은 것을 배우기를 희망한다. 비단 그분의 위대한 의열, 무장투쟁뿐만 아니라 그분의 숭고한 개혁정신까지도.

"김상옥의사의 아동문학 전기를 발간"

<前 성북교육장 홍순길>
1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효제초등학교에 학교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2006년 10월 어느 날 노인 두 분이 교장실로 들어 오셨다.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고 있기에 안내를 하고 자리에 앉아 인사를 나누었다.

“교장 선생님, 김상옥 의사를 아십니까?”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라 ‘알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상옥 의사의 독립투쟁사를 말씀하시면서, 그 분이 어의동 보통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서 나이가 많은 어른들에게도 여쭤보기도 하고 역사학자에게 알아보았으나, 지금까지 그 학교를 찾지 못했다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본인들은 김상옥 의사의 후손이며 ‘김상옥 의사 기념사업회’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제가 ‘어의동 보통학교는 서울효제초등학교의 옛 이름입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두 분의 기쁨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기쁨을 가슴에 안고 떠나면서 윤우 선생이 엮어지은 김상옥 의사의 전기를 저에게 주셨다. 그날 밤 윤우 선생이 쓴 전기를 읽으면서 보석을 발견하는 기쁨으로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이렇게 훌륭한 어른이 계셨다는 것과, 독립운동하시는 가운데 통쾌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전기를 모두 읽어 내려갔다.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은 훈화 시간에 학생들에게 김상옥 의사의 정신을 후배들에게 심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그 분을 위해서 제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는 가운데, 먼저 학교 체육관을 ‘순국선열 김상옥 체육관’으로 명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윤우선생이 기록한 자료와 후손들로부터 듣고 본 자료를 수합하여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전기를 쓰기로 마음을 정하고, 김상옥 의사의 전기를 준비하여 드디어 3년 만에 발간하게 되었다.

“우리는 애굽의 종이었다!”는 유대인 역사책의 첫 구절이다. 역사를 후대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나라는 다시 비참해진다. 6.25가 터진지 63주년의 행사를 거행했지만,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며 자라는 후대들에게 단지 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닌, 구체적인 교육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손을 위해 ‘선조들의 애국 애족의 역사’를 물려주어야 하며, 김상옥 의사의 항일독립투쟁의 공훈을 널리 알려야 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교육하는 길은, 초등학생와 중학생을 대상으로 김상옥의사에 대한 ‘백일장대회’, ‘골든 벨을 울려라!’ ‘그림대회’ ‘글쓰기 대회’ ‘김의사의 독립운동현장 답사’ 등을 정기적으로 실시하여 역사를 배우도록 한다면, 그들은 김의사의 나라사랑 정신과 거룩한 희생정신 그리고 불굴의 의지와 정의감을 본받아, 건전한 정신으로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잊혀지는 세대…초중고 역사책에 부활”

<김상옥의사 외손자 김세원>
생명처럼 고귀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생명도 던져야 할 때가 있다. 외조부께서는 일제(日帝)에게 강탈당한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몸소 다양한 방략을 실천하셨지만, 생명을 내어놓는 무장 의열 투쟁이 가장 강력한 투쟁 방법이요, 승리의 길임을 깨닫고 주저 없이 굳세게 그 길을 나아가셨다.

조국의 광복, 독립자존 그리고 자유와 번영의 길을 열어야 하는 그 시대의 소명을 자발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불같은 열정을 다 쏟으시고,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셨다. 외조부님은, 사랑하는 가족도, 크게 일으키시던 사업장도, 재물도 모두 다 내려놓으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명예를 위한 것도, 어떤 보상을 기대함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한 마음 저린 충의와 사랑의 행보였다.

임시정부 외교총장을 지내셨던 조소앙 선생님은 나의 외조부님을 이렇게 추억하신다,

“김 선생은 국통(國統)을 위하여 독립(獨立)의 정맥(正脈)을 위하여 사회의 균생(均生)을 위하여 인류의 공영(共榮)을 위하여 대무외(大無畏)로 불퇴전(不退轉)을 굴리는 호걸(豪傑)이었다. 김선생은 한 분의 노동자(一勞動者), 애국자(一個愛國者), 장군(一個將軍), 의협심이 강한 선비(一個義俠士), 혁명가(一個革命家), 신자(一個信者), 그리고 영웅(一個英雄)이었다.”

나라위해 헌신 희생하신 외조부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찡하다. 한편, 20대에 홀로 되신 외조모님의 길었던 인고(忍苦)의 세월이 연민으로 다가온다. 할머님은 그 험한 세월 속에서 아들과 딸(나의 어머니)을 먼저 보내는 아픔도 겪으셨지만 모든 시련과 세월을 예수 신앙으로 이겨내신 믿음의 큰 그릇이셨다.

특별히, 어머님(義正)은 어린 나이에 일본 경찰들로 인해 겪었던 심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시고 6.25 피난 시절에도 여전히 대인공포증에 시달려 외부 출입을 못하고 집안에만 머무르셨다. 그 시절 외조모님은 우리 형제(효기형과 나)까지 돌보아 키워주셔서(비록 형은 일찍 세상을 떴지만),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님의 따뜻한 보살펴 주심을 받던 그 시절이 정말 행복했음을 돌이켜보며, 새삼 감사의 고백을 드린다. 할머님! 사랑합니다. 신앙을 물려주신 것 특별히 더욱 감사하다.

광복이후, 나라 없는 설움과 고통의 시대를 살며, 나라의 소중함을 깊이 실감했던 선조들이 연세가 많아 세상을 뜨는 동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청소년을 비롯한 대다수의 국민들의 머리에는 일제(日帝)시대 고난의 역사는 잊히고 사라진 옛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외조부님의 이야기를 초등학교 시절 책으로 배웠다. 그러나 현재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역사책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나라보다 개인을 중시하는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희생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는 말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기심은 많은 방관자들을 만든다. 이기심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에게 바른 국가관과 공동체의 일원임을 깨우치는 국가적 노력이 필요하다.

군인이나 경찰 등의 제복을 입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만들겠다는 정부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희생과 헌신에 대해 국가가 책임지고 보살피는 제도적 장치를 강화하여야 한다.

“다큐와 영화, 드라마 제작” 귀감으로

<방경한 독립유공자>
김상옥 의사는 나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분이다. 나는 김의사를 뵈온 적이 없다. 또 내가 아주 어릴 때 김의사께서 순국하셨기 때문에, 같은 시대를 살아보지도 못한 셈이다. 그런데도 나의 머릿속에는 김의사가 항상 계셨고, 어릴 적 나의 인생 목표는 “나도 커서 김상옥 의사처럼 되는 것”으로 굳었다.

충청도 홍성 산골에서 내가 다섯 살 무렵에 어른들로부터 들은 “동대문 철물점의 홍길동, 독립투사 김상옥” 얘기가 나의 일생을 독립항쟁으로 인도한 셈이다. 그 무렵 전국에 구전 되었던 그분의 용감한 이야기가, 어린 마음에도 어찌 감동적이었던지 “나도 김의사 처럼 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도 독립항쟁에 투신하게 된 것이다.

나는 철들 무렵 무작정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해를 찾아 나섰는데, 그 길의 방향이 바뀌어 소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북만주 쪽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독립군의 일원이 되어 일본군과 싸웠고, 머리에 총탄이 박혀 불편을 겪다가 8.15광복 후 귀국했다.

김상옥 의사는 ‘나라사랑의 화신이요 표상’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생계를 도우면서도 독립항쟁에 투신해서 엄청난 공훈을 세우고, 민족의 제단에 젊은 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애국자 가운데서도 애국자’이시다. 그러한 분은 국가 민족이 높이 받들어야 한다. 국가에서 건국훈장을 수여, 예우하고 있지만 미흡한 편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현창할 필요가 있기에 몇 가지 짚어 본다.

우선, 김상옥 의사의 독립항쟁과 일기당천의 용감성 등은 매우 드라마틱하므로 영화나 연속극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일부 짧은 다큐멘터리가 방송으로 소개되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전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시하고 있는 이때에, 그분의 일대기가 영화로 잘 만들어져서 우리의 높은 정신세계도 아울러 알렸으면 한다. 이를 위해 정부차원의 예산 지원과 실질적인 도움으로 영화제 출품 등을 고려하면 좋겠다.

더 나아가 혼탁한 이 시대에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꼭 필요한 ‘애국애족’ ‘부모효도’ ‘창조적인 활동’ ‘주경야독’의 영원한 귀감으로 김상옥 의사 같은 사표가 어디 또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더 늦기 전에 김상옥 의사의 생가이며 ‘대격전장’인 종로구 효제동 72번지 주변에 기념공원과 기념관을 마련하는 일(대지 77평 구입비 29억원, 생가 보수 및 기념관 건립비 17억원 등 총 46억원)과, 일제상품 배격-물산장려 운동과 독립항쟁의 비밀 거점으로 활용한 동대문 밖 ‘영덕철물점’의 복원이나 기념시설 건립등이 요망된다. 이는 현 시대에 필요한 청소년 정신 교육의 현장으로 적격이기 때문이다.

“투사이자 암울한 시대의 계몽 선각자”

<의병정신선양중앙회 윤우 회장>
6월 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일요주간에서 많은 지면을 통해 아직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투사 김상옥의사를 재조명해 주었다. 독립투사들은 하나같이 남다른 기개와 특징을 지닌 분들인데, 그분들 가운데도 내가 아는 김상옥 의사(1890- 1923)는 그의 짧은 생애를 통해 많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특별한 분이시다.

김의사는 독립유공자 중 가장 많은 ‘투쟁 방략’을 실천 하신 분이다. 학생운동, 애국 계몽 운동, 물산장려, 문화투쟁, 의병후신 광복단, 3.1운동, 독립군 연계 투쟁, 상해 임시정부 활동 및 의열 투쟁등에 직접 몸담았을 뿐 아니라, 전국으로 순회하며 군자금을 모아 임시 정부와 독립군에 전해주는 일을 하셨다.

그분은 8살 때부터 직공으로 일하여 가족을 부양한 근로 청소년 출신 독립투사이며, 후에 철공 장을 세워 물산장려 및 독립항쟁의 비밀 거점으로 활용하셨다. 또한 창조적인 정신을 발휘하여, 단발령의 영향으로 비싼 일본 모자를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말총모자’를 제작하여 보급하였고, 우리 경제를 좀먹는 일제 상품과 일본어 배척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올바른 노사문화와 경영문화를 위해 ‘공인조합’(노조), ‘동업자 조합’(경총)을 결성 지도하셨다.

김의사의 학력은 낮았지만 높은 인격을 갖고 있었다. 어의동 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2년 교육을 받으셨지만, 낮에는 망치질을, 밤에는 책을 읽으며 공부하여, 전문지식을 넓혀갔다.

그분은 학식 높은 임시정부 요인들은 물론, 중국 명사인 장개석 총통 비서 진과부(陳果夫)와 문인 동육화(童育華)등과도 깊은 교분을 가졌다. 또한 그는 기독교와 영어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닫고, 영국에서 건너온 피어슨 선교사에게 배우며, 함께 동대문감리교회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다.

김의사는 지도력 또한 탁월하였다. YMCA 청년부장으로도 활약했으며, 비밀 결사인 ‘백영사’, ‘혁신단’, ‘암살단’ 조직을 지도 지휘하였다. 나아가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인테리들을 규합해서 총독처단과 종로 시가전(좌절)을 기획하였으며, 1923년 1월 17일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서울역의거를 도모하였다.

더욱이 어려서부터 부모를 봉양하며 형제를 도우며, 일과 학업에 충실했으며, 자라선 독립투사라는 사실만으로도 김의사는 청소년들의 ‘영원한 귀감’이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분은 충과 효의 화신이었다. 김상옥의사의 나라사랑 정신과 남다른 교훈을 기리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영원한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하루 빨리 그분에 관한 현충시설이 마련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편집자주: 윤우 회장은 ‘서울 한복판 항일시가전의 용장 김상옥 의사’ 著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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