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을 열며...
정희왕후,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의 비를 지칭한다. 수양대군을 보위에 앉히고, 세조 사후 수렴청정을 실시하여 손자를 이룰 성의 성종(成宗)으로 만든 우리 역사 최고의 여인이라 해도 젼혀 손색없다.
수양대군과의 가례도 극적으로 이어진다. 애초에 수양대군은 정희왕후의 언니와 가례를 올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를 확인하기 위해 찾은 감찰상궁의 눈에 정희왕후가 뜨이고, 그녀의 모습에 감복한 나머지 전격적으로 신부가 교체된다.
그 경우를 두고 운명이라 하는 것일까?
여하튼 정희왕후는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는 탁월한 정치력으로 세조, 예종, 성종에 걸쳐 실질적인 제왕의 자리에 군림한다.
수양대군이 거사를 앞두고 주저한다. 온 동네방네 거사를 일으킨다고 소문을 내놓고는 막상 일을 실행함에 앞서 머뭇거리자 정희왕후가 손수 갑주를 입혀주고 등을 떠밀어 정권을 잡는다.
세조 사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둘째 아들이 보위에 오른 후 그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시기를 한 달 여 앞두고 갑자기 사망한다. 그리고 마치 예정된 일처럼 당일 열세 살의 어린 손자를 보위에 앉히며 제왕의 자리에 올라선다.
보위에 앉은 세조가 단 한명의 후궁도 두지 않을 정도로 사랑했던 여인. 당대의 세도가인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부복할 정도로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한 여인. 채 완성되지 않은 조선을 확고한 반석 위에 세워 태평성대의 기틀을 마련한 과단성 있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한 여인. 그러나 한 시점,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나 역사 속으로 들어간 여인.
오직 나라와 백성만을 위해 무한한 정치력을 발휘한 여인이요, 어머니요, 정치가였던 정희왕후를 재조명하여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세상을 열어보고자 한다.
女帝 정희왕후
남아있는 사람들
한참 전부터 밀려오기 시작했던 조갈증을 무던히도 참고 있었으나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를 해소하기 위해 입을 벌려 호흡을 토해내자 마치 가래가 끓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눈을 떠서 시원한 물로 갈증을 풀어야 했다. 그러나 마치 눈꺼풀이 서로 견고하게 달라붙은 듯 생각처럼 눈을 뜨는 일이 쉽지 않았다.
눈 주위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자 미세하게 통증이 밀려들었다. 그를 참아내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눈을 뜨려 시도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여러 사람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단순한 소리라기보다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다.
또한 몸에서 이상한 촉감이, 누군가가 자꾸 자신의 몸을 만지고 있다는 느낌이 일어났다. 어떤 이는 이마를 쓰다듬고, 다른 사람은 손을 만지고 있었다. 손길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자신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조갈증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심한 호기심이 찾아들었다. 도대체 절규에 가까운 소리는 무엇이고 누가 자신의 몸을 그리도 부드럽게 만지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조갈증에, 호기심에 서서히 눈이 떠지고 있었다.
“대왕대비 마마!”
“마마!”
이제는 정신도 차려야 할 듯했다.
“대왕대비 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근심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 음, 최 상궁. 나 좀 부축해 주게나.”
당당하게 말을 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은 듯했다.
“마마, 그냥 편히 누워계십시오!”
최 상궁의 반대편에 앉아서 자신의 이마를 만지고 있던 며느리, 인수대비가 역시 근심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마, 그리 하시지요.”
인수 대비 옆에 앉아있는 손자, 성종이 손을 만지며 거들었다.
“아니야, 이제는 일어나야겠으니 부축 좀 해 주게나.”
최 상궁이 그제야 알아들은 듯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등 뒤로 가지고 가서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여인, 정희왕후를 일으켜 베게에 비스듬히 기대도록 했다.
“최 상궁, 물......”
말이 끝을 맺지 않았는데 최 상궁이 그 말을 이해하고는 급히 주전자를 들어 하얀 탕기에 물을 따라 조심스럽게 정희왕후의 입으로 흘려 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잠시 후 물 마시기를 마친 정희왕후의 입에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마, 이제 정신이 드시옵니까!”
아직도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손자, 성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상, 한창 바쁠 터인데......”
“마마!”
정희왕후를 부르는 인수대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비, 아니 나의 며느리......”
미처 말을 맺지 못한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인수대비가 베개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정희왕후의 몸 위로 자신의 상반신을 기울였다.
인수대비의 몸이 가느다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몸을 힘겹게 만지며 시선을 주위로 돌렸다.
바로 앞에는 낯이 익은 여러 사람들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저만치 문가에 두 명의 의관이 자세를 가지런히 하고 앉아 있었다.
“최 상궁!”
“예, 대왕대비 마마!”
최 상궁을 부르고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의덕왕대비는 오시지 않았는가!”
의덕왕대비라는 말에 최상궁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하며 인수대비와 성종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마, 송 씨 부인은 지금 별채에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송 씨 부인이라.”
중얼거리듯이 말을 마친 정희왕후가 성종에게 시선을 주었다.
“주상, 이 할머니가 주상의 당숙모, 의덕왕대비를 불렀다오. 뭔가 마무리를 해야 할 듯 해서지요. 그리 해도 되겠어요?”
순간적으로 성종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신의 할아버지, 세조에 의해 비명에 돌아가신 당숙 노산군의 부인 되는 송씨 부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마마, 그리하셔도 무방할 듯하옵니다. 그리 하시지요.”
성종 대신 인수 대비가 입을 열었다.
“마마, 그리 하시지요.”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의 제안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래요, 이 할머니가 죽기 전에 반드시 풀고 가야할 문제가 있어 특별히 불렀다오. 최 상궁은 왕대비를 속히 이곳으로 모시도록 하게.”
최 상궁이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고 시선을 인수대비와 성종에게 번갈아 보내고 있었다.
“최 상궁은 어서 마마의 말씀을 이행하도록 하게!”
인수대비의 말투가 지엄했다. 그를 반영이라도 하듯 최 상궁이 급히 몸을 움직였다.
“주상, 그리고 대비!”
“예, 마마.”
둘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왔다.
“나에게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먼 길 떠나기 전에 반드시 서로 간에 오해가 있다면 풀고자 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주상의 당숙모요 대비의 아우가 되지 않겠소.”
“주상, 대왕대비 마마의 분부대로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어마마마.”
성종이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겠다는 듯 표정이 부드러웠다.
“그러나 대왕대비 마마께서 이리도 일찍 소자 곁을 떠나고자 하심은 절대로 아니 될 일이옵니다.”
정희 왕후가 힘들게 손을 뻗어 성종의 손을 잡고는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상, 주상은 지금 이 할머니가 주상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시오?”
“하오시면......”
“나는 가도 우리 주상이 이렇게 늠름하게 남아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겠소.”
성종이 마치 정희왕후의 말을 되새긴다는 듯이 곱씹고 있었다.
“주상, 세상은 돌고 도는 것임을 내 진즉에 알고 있었어요. 조선 왕조를 창건하신 태조대왕님도 가시고 또 세종대왕님도 가시고.”
힘에 겨운지 잠시 가느다란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늠름한 성군이 이 자리에 있으니 이는 바로 선조들의 결정판이 아니겠소? 그러니 조금도 서운해 할 일이 아니지요.”
성종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흐르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대왕대비 마마, 그럼 저는 잠시 자리를 비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성종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마마, 저도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대비는 함께 자리하도록 합시다. 주상, 송구스럽소.”
자리에서 일어선 성종이 정희왕후에게 애써 미소를 보이며 방문을 나섰다.
“대비, 우리 주상이 너무나 대견스럽지 않소.”
“이 모두 마마 덕입니다, 마마!”
인수대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니오, 이 모두 대비의 공이오. 대비가 그리도 고생했기에 주상이 저리도 빛을 발하고 있는 게지요.”
“어머님!”
인수대비가 다시 정희왕후의 상반신으로 무너져 내리자 정희왕후가 인수대비의 등을 힘없이 쓸어내렸다.
“그래, 그 모진 고생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
방안 사람들이 시선을 어느 곳으로 향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송 씨 부인 대령하였습니다.”
인수대비가 급히 몸을 일으켜 옷매무시를 단정히 했다.
“어서 모시도록 하게.”
문이 열리며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어 보이는, 차라리 창백해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하얀 옷을 입은 40 중반의 여인이 곧바로 방을 가로질러 정의왕후에게 다가서다 한 지점에 잠시 멈추어서더니 큰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정희왕후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마음뿐이었다. 인수대비의 손이 급히 정희왕후의 등 뒤를 휘감았다.
“대왕대비 마마, 소인 부름 받잡고 왔습니다.”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다.
“왕대비, 어서 오세요.”
60대 중반의 노인과 40중반 여인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대비, 오랜만에 뵙니다.”
인수대비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어색한 기운이 주위를 감샀다.
“왕대비, 이리 좀 가까이 다가오실 수 없겠소!”
송 씨 부인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정희왕후의 얼굴을 주시했다. 순간 정희왕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내 이제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가늘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저 세상으로 가기 전에 반드시 왕대비와 함께 풀어야 할 일이 있어 모시도록 했습니다.”
송 씨 부인의 고개가 옆으로 돌려졌다.
“왕대비, 우리 훌훌 털어버립시다. 이렇게 지내놓고 보니 부질없는 일을......”
말이 끝을 맺지 못하자 등을 밭치고 있는 인수대비의 팔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물론 쉽게 잊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현실을 바라보세요.”
송 씨 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희왕후를 주시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살아오면서 나 역시 그 일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송 씨 부인이 다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왕대비, 선왕이 왜 상왕을 죽였다고 생각하시오!”
말을 하는 정희왕후의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듯했다. 순간 인수대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송 씨 부인이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정희왕후를 응시하기를 잠시,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대왕대비 마마, 이것이 바로 사람인 모양......”
말을 채 끝 맺지 못한 송 씨 부인의 어깨가 들썩였다.
“왕대비, 이리 가까이 오세요!”
정희왕후가 힘들게 손을 들어 간절히 부탁하자 어깨를 들썩이며 어색한 자세로 다가앉았다. 오래 전부터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정희왕후가 온 몸에 힘을 다해서 송 씨 부인의 손을 낚아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왕대비, 이상한 일이지요. 죽음이 목전에 다가오니까 삶이 보이는군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송 씨 부인의 얼굴을 주시하자 순간적으로 송 씨 부인이 상반신을 기울였다.
“대왕대비 마마, 저를 이리 두고 먼저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근 30여 년을 홀로 살아온 삶이, 그것도 어린 나이에 남편을 비명횡사로 보낸 여인의 삶이 어떠했을까. 가만히 정희왕후가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조리며 인수대비를 바라보았다.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는지 인수대비의 얼굴도 한쪽으로 기울었다.
방안에 있는 누군가로부터 깊은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내 남편 세조 대왕이 상왕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일은 시대의 업보였지요. 힘들게 세운 조선왕조를 굳건히 하라는 역사의 소명이었지요. 만약 상왕이 중신들에게 그리도 계속 휘둘렸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떠했겠어요. 결국 신하들의 놀음에 허수아비 역할 밖에 더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의 태평성대가 가당키나 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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