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역사소설 - 女帝 정희왕후③

황찬우 작가 / 기사승인 : 2013-07-10 16: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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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너희 둘을 마음에 두고 궁에 천거한 모양이야.”


저자 거리를 벗어나자 초여름의 신록이 이들 일행을 맞이했고 그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하얀 옷깃이 공중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그네 터임을 확인하자 길례가 갑득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치 저희들만 아는 모종의 장소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듯했다. 그를 알아챘는지, 여자들만의 장소라 그런지 갑득이 일행에서 떨어져 나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일단의 여인네들이 그네 주위에 몰려있었고 정희와 별로 나이 차이가 없어 보이는 계집아이가 그네에 몸을 매달고 파란 창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잠시 전까지 뭔가 답답했던 마음이 창공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계집아이의 치마가 바람에 날리면서 희뿌연 종아리가 살짝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다. 한 폭의 그림처럼 자유스러움이 찾아들었다. 정희 자신이 그네 타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창공을 가로지르는 한 마리의 새가 되는 느낌이 일어났다.
언니의 얼굴을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안 되는 거 알지!”
“언니, 제발!”

동희가 정희에게 바짝 다가섰다.

“부모님께서 아시면 크게 경을 치실 것이란 말이야!”
“왜 아버지, 어머니께서 경을 치신다는 말이야?”
“양반집 여자는 그네를 타면 안 된단 말이야, 그리고......”
“그리고 또 뭐?”

정희의 의지가 집요했다. 동희가 그 의지를 무시하며 입을 앙다물자 곁에서 그를 눈치 챈 길례가 다가섰다.

“작은 아씨, 양반집 아씨들은 그네 타면 안돼요. 남들이 모두 바라보잖아요.”
“그러면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는 말이야 무어야!”
“그것이 아니라 그네를 타면 저렇게 옷이 바람에 날려서 속살이 드러나잖아요.”

길례가 그네를 타고 있는 계집아이를 가리켰다.

“속살이 드러나면 왜 안 된다는 말이냐!”
“너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니!”

기어코 동희가 한마디하고 나섰다.

“그래도 싫어, 언니. 나 꼭 그네 타보고 싶어.”
“안 돼!”

동희는 언제나 정희가 하고자 하는 일에 제동을 걸고는 했다. 그러나 처음뿐이었다. 막판에는 정희의 고집에 밀려 정희의 의사대로 일처리 하고는 했는데 지금의 경우는 너무나 단호했다.

정희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해가자 길례의 눈에서 안타까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순간 곁에서 그들을 주시하던 중년의 여인이 다가섰다.

“그렇게 원하는데 한번 타보게 하지 그러니.”

찬찬히 그녀를 주시했다. 여인의 모습에서 알듯 모를 듯한 기품이 흘러나왔다. 명색이 홍주 현감의 딸인 두 아이에게 해라 할 정도의 여인이면 분명 그 지역 사람은 아니고 그렇다고 천한 신분의 여자도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뉘신지 모르지만 그네 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동희의 단호한 태도에 밀려 그 여인도 더 이상의 참견을 자제하고 저 있던 자리로 돌아가서 주변 연인들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정희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언덕배기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네 타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정신을 집중했다. 흡사 자신이 그 여자 아이인 것처럼 정신을 몰두시켰다. 어느 순간 창공을 가르고 저 멀리까지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기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동희 언니와 한담을 나누고 있는 중에 길례가 내실에서 부모님이 찾는다는 기별을 전해왔다.
바로 내실로 건너가 자리를 잡자 아버지께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저녁들은 먹었느냐.”

매사 엄히 일처리를 하시지만 자식들에게는 언제나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다.

“예, 아버지.”

둘에게 동시에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다시 그윽한 표정으로 딸들의 얼굴을 주시하면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어머니가 깨고 나섰다.

“아버지 말씀을 잘 들어보도록 하거라.”
“너희 둘, 며칠 전 단오 날에 출타한 적이 있느냐?”

차분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으로 보아 나무라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동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이어받지 못했다. 대신 정희가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 단오 날에 저자거리를 구경하고 그네 타는 모습을 구경했어요.”
“음, 그때 본 모양이로구나.”

말을 마친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 곤란하신지 어머니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때 혹시 이상한 일 없었니?”

순간적으로 씨름판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물론 후에 길례를 통해서 언니가 곤란해 했던 이유를 전해 들었고 자신도 잠시 치를 떨었던 적이 있었다.

덩치가 작은 장정이 자신보다 덩치가 큰 사람에게 들려 올라가면서 남자의 중요한 부분을 걷어찼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덩치 큰 남자가 맥없이 쓰러졌고 또 남자나 여자에게 있어 그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길례로부터 전해 들었었다.

“그네 타는 곳에서 어느 부인이 다가와 저희에게 말을 건넨 적이 있어요.”

정희의 마음을 알았는지 동희가 급히 말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 게로군.”

둘 다 귀를 쫑긋 세웠다. 아니, 정희는 가슴속에서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길례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고는 했고 길례가 그리도 갑득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바로 그런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 깊은 시간에 뒷간을 가는 중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낮게 둘러쳐진 담장 건너편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었으나 그 무서움보다 호기심이 강하게 밀려왔다.

온 신경을 그곳에 집중했다.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분명히 길례의 목소리인 듯 했다.
그런데 길례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마치 코가 막혀서 숨이 가쁜 듯이 아니면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절규하듯이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발길이 저절로 담장을 향하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까닭 모를 소름이 돋아나고 있었다.
담장 가까이에 이르자 목소리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갑...뜨..기......’, ‘갑..뜨.기......’, ‘갑.뜨기’ 하며, 애절하게 갑득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길례의 목소리와 ‘어...구.....’, ‘어..구......’, ‘어구......’ 하는 갑득의 신음소리가 교차되어 들려오고 있었다.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목소리만 들어서는 일이, 그것도 작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누군가가 갑득을 심하게 다루고 있다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길례는 애절하게 갑득의 이름을 불러대고 갑득은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아울러 그 목소리의 주인이 길례와 갑득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길례의 경우를 차치하더라도 갑득의 경우도 자신의 집 하인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모른 척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작은 가슴이 뻐근해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들을 고통에서 한시바삐 구원해 주어야한다는 의무감이 밀려들었다.

한 번 크게 숨을 쉬고 오던 길을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 집안 여기저기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정희 자신이 마음먹고 크게 소리치면 행랑채에서 금방 하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 나올 터였다. 그리고 바로 뒤를 이어 자신을 끔찍이도 아껴주시는 아버지께서 창과 칼을 든 병졸들을 이끌고 달려오실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전에 자신의 존재를 상대방이 알아챈다면 낭패 볼 수도 있었다.

발뒤꿈치를 들고 담장을 향해 살금살금 걷자 들려오는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빨리 와서 구원해달라는 듯이 애절하게 들렸다. 소리 나지 않게 서둘러 담장에 밀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빛이 비치고 있는 사방이 너무나 고요했다.

담장에 손바닥을 마주 대고 발뒤꿈치를 들어보았다. 담장 너머를 제대로 바라보기에는 약간 모자랐다. 아래를 둘러보았다. 완성맞춤인 돌이 눈에 들어왔다. 그 돌 위에 조심스럽게 올라서서는 발뒤꿈치를 들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소리 나는 방향을 주시하자 담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지들이 땅에 닿을 만큼 늘어진 버드나무 바로 옆에서 이상야릇한 물체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시선을 집중하자 달빛에 희미하게 그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길례와 갑득이 엉켜 붙어 마치 한 몸이 된 듯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아서는 이미 일이 끝난 듯했다. 갑득이 벌써 누군가에게 심하게 당하고는 그에 서로를 감싸 안고 서로의 고통을 달래주는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 둘 외에는 어느 누구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사방 어디에서고 다른 사람들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시선을 다시 그들에게 주었다.

계속해서 갑득이 신음 소리를 토해내고 길례가 애절하게 갑득의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다. 아마도 갑득이 버드나무에 오르다가 떨어져 몸의 일부가 크게 다친 모양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길례를 소리쳐 부르려고 하다가 급히 입을 닫았다. 나무에서 떨어졌다면 둘이 함께 누워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울러 갑득과 길례 둘 간의 문제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둘 사이의 모종의 행동으로 인한 결과일수도 있었다.

서로 뒤엉켜 달라붙어 있는 그 둘의 행동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일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에서 벼락이 치고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 날 너희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니?”

둘은 어색하게 서로의 얼굴만 바라 볼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은 궁궐에서 나온 사람이란다.”

어머니께서 한숨이 꺼져가는 투로 이야기했다.
궁궐이라면 좋은 일 같은데 그를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왜 수심이 가득 차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런데요?”

정희가 당돌하게 말을 받았다.
“그 사람이 너희 둘을 마음에 두고 궁에 천거한 모양이야.”
“궁에요?”

물론 정희의 반응이었다.

“궁궐에서 둘째 왕자 배필감으로 너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이야기지.”
“왕자의 배필감이요?”

역시 정희의 반응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께서 갑자기 혀를 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정희가 이상한 듯이 바라보았다.

“동희야, 네 생각은 어떠냐?”

어머니의 물음에 동희는 그냥 고개만 숙이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희야, 너의 생각을 한번 들어보자꾸나.”

재차에 걸친 질문에 동희가 벌겋게 변한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리면서 다소곳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는 그저 부모님 곁에 머물고 싶어요.”

아버지께서 그 소리에 다시 혀를 찼고 어머니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뭔지는 모르지만 두 분 마음에 마뜩치 않다는 반응임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알았다. 그만 건너가 쉬도록 해라.”

아버지께서 둘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듯이 짤막하게 말을 잘랐다.
둘이 다소곳이 부모님께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찜찜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부모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자신들을 물렸다.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가던 정희가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길례를 바라보았다. 급히 길례를 부르자 호들갑을 떨며 부엌을 나섰다. 그때 부엌 문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어렵지 않게 갑득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차갑게 길례를 바라보자 마치 겸연쩍다는 듯이 고개를 슬그머니 옆으로 돌렸다. 갑자기 정희의 얼굴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일전에 보았던 그 행동이 생각나서였다. 더불어 방금 전까지 둘이서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았나하는 지레짐작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정희 자신은 일전에 목격한 경험에 대해 당당한 듯 다짐을 했건만 그 생각만하면 괜스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몸이 달아오르고는 했다.
날이 어두워 다행스럽게 언니나 길례가 그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진저리를 치고 깊게 호흡했다.

“네가 호들갑 떠는 모습을 보면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모양인데 한번 속 시원히 말 해 봐!”

방에 들어서고 자리를 잡자마자 길례를 다그쳤다.

“아씨, 제가 뭘 안다고 그러세요.”

길례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정희가 가소롭다는 듯이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래? 그러면 내가 아버지께 이야기해서 갑득과 너를 떼어놓을 거야.”

갑득과 갈라놓는다는 말에 길례가 기겁했다. 순간적으로 어깨가 들썩이며 동공이 벌어졌다. 그리고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을 돌려서 괜히 헛기침 해댔다.

정희가 은근한 시선으로 길례를 바라보았다. 길례가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채고 겸연쩍어하며 미소를 던지는 일을 잊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동희는 한껏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둘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면, 아씨. 절대로 저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아씨들에게만 특별히 해드리는 말이니까요.”

대답 대신 미소만 보냈다.

“아씨, 지금 임금님에게 여러 왕자가 있는데 궁궐에서 나온 상궁들이 둘째 왕자의 배필을 찾는 과정에 두 분 아씨의 모습이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길례가 미소를 머금으면서 뜸을 들이고 있었다. 마치 정희의 궁금증을 빌미로 일말의 복수를 하고자 하는 듯했다.

“그래서 뭐냐 하면 ......”

길례의 투가 너무 뻔했다. 그 순간 정희가 눈가에 독기를 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길례가 몸을 움찔거리며 정희에게 바짝 다가섰다.

“둘째 왕자의 부인으로 두 분 아가씨 중에 한 분을 천거하기로 하신 거지요.”
“둘째 왕자의 부인?”

동희와 정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니까요.”
“그건 그렇다고 하고 우리 부모님께서 무어 그런 일로 걱정을 하신다는 말이냐?”
“그러니까, 둘째 왕자는 왕이 되지 못하고......그래서 걱정이 드는 모양이에요.”
“그리고는?”

길례가 다시 주뼛댔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란 말이냐!”
“네, 아씨.”

길례의 표정이 어둡게 변해갔다. 마치 뭔가 대단한 것을 알고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하는 투로 보아 그냥 흘러가는 말을 주어들은 모양이었다.

“둘째 왕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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