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마, 경하 드리옵니다.”
“어서 오시게, 대부인. 아니지, 우리 며느리.”
정희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던 듯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우리 며느리에게 축하 받으려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물렸네.”
시선을 김 상궁에게 주자 그를 인정한다는 듯이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김 상궁은 빨리 우리 며느리를 위해서 상을 들이도록 하게.”
시어머니, 소헌왕후의 말을 전해들은 김 상궁이 밖을 향해 그 지시 사항을 전달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이 열리고 산해진미가 가득 들어찬 상이 들어오고 있었다.
상이 놓이자 정희가 자세를 바로 하고 자리 잡았다.
“김 상궁도 같이 자리하도록 하게.”
소헌왕후께서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한쪽에 비켜 서 있는 김 상궁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요구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상궁이 감히 왕비와 함께 자리를 함께 한다는 일은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반증이라도 하듯 김 상궁의 얼굴이 곤혹스러움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김 상궁뿐만 아니었다. 정희도 소헌왕후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시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마, 그리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쇤네는 그냥 이대로 서 있도록 하겠사옵니다.”
김 상궁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자리를 함께 하도록 하게.”
소헌왕후의 잔잔한 말투로 보아 아마도 이미 작정이 되어 있는 듯했다. 그런 연유로 일부러 모두를 물리고 그 자리를 마련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일어났다.
“김 상궁은 어서 마마의 분부를 받잡으세요.”
궁궐의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안다면 김 상궁은 그야말로 참수형 감이었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 상궁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렇다고 왕비의 분부인데 그 또한 거절할 수 없었던지 비실비실 대면서 상 한 구석에 쭈그리고 자리 잡았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자세를 바로 하도록 하게.”
김 상궁이 얼굴을 들어 소헌왕후를 바라보고는 자세를 가지런히 하고 자리 잡았다.
“내가 오늘 둘을 함께 부른 사유는 우리 며느리와 김 상궁을 위함이야. 그러니 김 상궁은 아무 걱정하지 말도록 하게.”
말을 마친 소헌왕후의 시선이 정희를 향했다.
“어마마마, 하오시면......”
“그래, 바로 나와 우리 며느리를 위해서 김 상궁이 수고를 아끼지 말아달라고 이런 자리를 마련했어. 그러니 김 상궁은 우리 며느리를 나 대하듯 열과 성을 다해 보필하라 이 말이지.”
김 상궁의 얼굴색이 밝아지고 있었다. 정희를 배려하는 자리로서 소헌왕후와 정희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해달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듯했다.
“마마, 황공하옵니다.”
김 상궁뿐만 아니고 자신을 그리도 생각해주시는 시어머니께 감읍한 정희의 입에서도 동시에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부인, 이리 가까이 오도록 하시게.”
왕비와 마주보고 앉아있던 정희가 다소곳하게 몸을 세우고는 소헌 왕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정희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 우리 낙랑대부인의 역할이 커질 것이야. 그러니 김 상궁은 수고를 아끼지 말도록 하시게.”
상당히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당신에게는 큰 아들인 왕세자가 있고 또 왕세자에게는 빈이 있건만 정희를 지목한 부분은 파격이었다.
“마마, 너무 과찬의 말씀이시옵니다.”
“아니야, 우리 낙랑대부인이 차후에 큰일을 감당해야 할 일이야. 그리고 궁궐이 돌아가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김 상궁은 큰일을 할 우리 며느리를 위해서 몸과 마음을 아끼지 말고 받들어야 하고.”
큰일이라, 한편 생각하면 무서운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정희는 시어머니의 자신에 대한 깊은 애정만을 생각했다.
소헌왕후와 김 상궁과 자리를 함께하고 김 상궁의 안내로 내전을 나왔다. 내전을 나서자 언제 왔는지 서방님, 진양대군이 뜰을 거닐고 있었다.
김 상궁에게 미소를 보내고 곧바로 서방님 곁으로 다가섰다.
“대군, 여기서 무엇하고 계신지요?”
진양이 우연히 만났다는 듯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정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도 날이 좋아 산책하고 있었소. 그런데 부인, 일은 다 마치었소?”
서방님의 마음속을 헤아리고 그저 잔잔하게 미소를 보냈다.
“부인, 무슨 일로 어머니께서 보자고 하신 거요?”
“어마마마께서 앞으로 자주 입궐하라는 엄명을 내리셨어요.”
“엄명이라, 무슨 일로 말이오?”
“마마께옵서 자주 궁궐에 들어와서 말동무를 하자고 하시던데요.”
“그래요? 그거 아주 잘되었군요. 그러면 부인과 아침, 저녁으로 함께 입궐하고 퇴궐하고 그러면 되겠네요.”
“네!”
어이가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방님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부인,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우리 모처럼 후원에서 산책이나 하고 집으로 갑시다.”
이제는 눈까지 휘둥그레졌다.
“왜, 싫소?”
“대군, 좋고 싫고를 떠나 남들의 눈이 있지 않습니까?”
“남들의 눈이라. 이곳이 어마마마의 처소인데 어느 누구가 우리를 바라본다는 말이오.”
말을 그리 해놓고 진짜 그를 확인이라도 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능청스러움에 정희도 진양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시선을 주었다. 이상하리만치 후원이 조용했다. 마치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그들 둘만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놓은 듯했다.
서방님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살짝 흘기고는 진양의 곁에 나란히 해서 후원을 걷기 시작했다.
“부인, 어머니께서 부인을 너무 좋아하고 계세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어머니 말씀대로 자주 궁궐을 찾아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리 하려고 하는데요, 남들이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을까요?”
“남들의 시선은 의식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누가 부인에게 함부로 이야기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제 친어머니라 생각하고 자주 찾아뵈어야겠네요?”
“그야 당연한 일 아니오?”
“그러면 이곳이 제 친정이고요.”
“일이 그렇게 되는가?
반문하며 호탕하게 웃는 진양대군의 하얀 치아가 햇빛에 반짝였다.
세종
어린 아들 장과 함께 나른한 오후를 보내는 중에 순임이 다가와 궁궐에서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했다.
소헌 왕후를 모시고 있는 김 상궁이었다.
“김 상궁이 이 시간에 어인 일로 예까지 오셨소?”
“마마께서 대부인 마님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마마께서!”
궁궐에 들어갈 때면 언제나 소헌 왕후를 찾아뵈었었다. 그런 연유로 뵌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그에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였다.
“김 상궁, 마마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아니옵니다, 대부인 마님. 마마께서 하도 외롭다고 대부인 마님을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여나 심약한 시어머니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순간적으로 들었던 탓이었다.
아들 장을 순임에게 맡기고 바로 길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자 이미 길 떠날 차비가 갖추어 있었다. 시어머니께서 사람들까지 함께 보내셨다. 시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시어머니가 아닌 친어머니인 듯한 느낌이 일어났다.
궁에서 나온 가마를 물리고 김 상궁과 함께 오후의 망중한을 즐기며 걸어가고자 했다. 김 상궁이 왕비 마마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그를 이용할 것을 요구하자 가마 안으로 들어섰다.
가마 안에 자리 잡자 시어머니께서 갑자기 자신을 찾는 사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단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자신을 불렀을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물론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단지 그 사실만으로 자신을 부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슬그머니 가마의 차양을 치우자 김 상궁이 곁으로 다가섰다.
“대부인 마님, 하문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갑자기 마마께서 찾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요.”
김 상궁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가볍게 한숨소리까지 곁들였다.
“쇤네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너무 외로우셔서 그런 듯하옵니다.”
단순히 외롭다고 해서 자신을 불렀다. 너무나 고마운 처사였다. 그러나 마마를 가장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있는 김 상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보아 다른 이유가 있을 법했다.
“김 상궁, 나에게 숨기는 일이라도 있어요?”
김 상궁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해갔다.
“대부인 마님, 요즘 마마께서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시고 자주 먼 산을 바라보고는 하신답니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이야기가 맞았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면 단순히 외로움을 느끼는 차원을 떠나 병이 될 수도 있었다. 갑자기 조바심이 일어났다.
“김 상궁, 우리 서둘러서 가게나.”
김 상궁이 가마꾼들에게 정희의 마음을 전하자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지 이상하리만치 궁궐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궁궐에 도착해 가마에서 내려 내전으로 향하자 뜰을 거닐고 계시던 시어머니께서 맞이하는 형국이 되었다. 순간 무안한 마음이 들어 급히 소헌왕후에게 다가갔다.
“마마,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어미야. 날씨가 하도 좋아서 산책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이 좋은 날씨를 혼자 즐기기에는 너무 과분하다는 생각에 급히 김 상궁을 보냈네.”
“마마, 황공하옵니다.”
정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가슴속의 뭉클한 기운으로 인해 말소리가 변질되었다.
“왜 손자는 데리고 오지 않았느냐?”
“하도 급한 일이 아닌가 싶어서 급히 달려오느라 챙기지 못했습니다. 마마, 다음에는 필히 장을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단지 그 때문은 아니었다. 정희를 아끼듯 아들 장에 대한 시어머니의 사랑 표현이 너무 과할 정도였다. 그래서 아들 장의 경우 모든 관례를 깨고 시어머니의 배려로 궁궐에서 출산했었다.
물론 아들 장과 할머니의 관계만을 놓고 볼 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궁궐에는 세종 임금께서 그리도 총애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손자, 홍위가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께서는 편애에 가까울 정도로 아들 장을 총애했고 혹여나 그런 모습을 남들이 볼 경우를 염려한 때문이었다.
“어미만이라도 와주었으니 다행이야.”
이미 시어머니께서 자신을 위해 모종의 준비를 해놓으신 모양이었다. 곧바로 정희의 손을 이끌고 후원으로 접어들었다. 소헌 왕후를 따라 걷기를 잠시 조그마한 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정자 위에는 정자만큼 조그마한 소반이 있었고 그 위에 간단한 음식이 놓여있었다. 정자에 자리를 잡자 소반 옆에 있는 호리병이 눈에 들어왔다.
“마마, 한 잔 올릴까요?”
김 상궁이 상으로 다가왔고 정희가 시어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눈가에 이슬이 배어있는 듯했다.
“김 상궁, 내가 따라드릴게요.”
호리병을 두 손으로 잡아들자 시어머니께서 잔을 들었다.
“어미도 한 잔 하련?”
조용히 고개를 젓고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주시했다.
“어미야, 너무 외롭구나.”
잔을 비운 시어머니께서 힘없이 입을 열었다.
“마마, 제 불찰이옵니다. 앞으로는 더욱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소헌 왕후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김 상궁이 이야기한 것처럼 먼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버님은 잘 계시지?”
느닷없는 질문에 잠시 움찔거렸다.
“네, 그저 그만하십니다만......”
갑자기 그리 묻는 진의를 몰라 얼버무렸다.
시어머니의 입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듯이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순간 정희와 김 상궁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래, 건강하게 살아계시면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이번에는 김 상궁이 한잔 따라주게.”
김 상궁이 자세를 바로해서 천천히 시어머니의 잔을 채우고 있었다. 졸졸거리면서 잔으로 들어가는 술을 바라보자 시어머니의 근심의 본질이 무엇인지 순간적으로 생각나는 듯했다.
“어미야, 나의 아버지는 나 때문에......나 때문에......”
바로 그 부분이었다. 아버지의 안부를 물은 사유는 시어머니의 아버지, 심온 대감 때문이었다.
“마마!”
정희와 김 상궁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못난 딸 때문에 그 모진 고생을 하시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으니......”
자신을 끔찍이도 아껴주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말 수는 별로 없어도 항상 인자하게 바라보는 그 모습에서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느꼈었다.
그 아버지의 모습을 시어머니께서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아려왔다.
“마마!”
정희의 눈에서도 기어코 이슬이 맺혀지기 시작했다.
“어미야, 요즘 들어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꿈속에 나타나는구나. 하얀 머리를 풀어헤치시고...... 그 사이로 피로 얼룩진 얼굴...... 또한 살점이 군데군데 찢겨나간 모습...... ”
“마마! 약해지시면 아니 되옵니다!”
곁에 서 있는 김 상궁의 눈에서 서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김 상궁도 언니처럼 보살펴주던 강 상궁이 생각나겠지!”
“마마!”
김 상궁이 채운 잔을 비워내고는 넋두리에 가까울 정도로 시어머니께서 입을 열기 시작하셨다.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저작권자ⓒ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부산 덕포동 중흥S클래스 건설현장서 화재 발생...검은 연기 치솟아 [제보+]](/news/data/20220901/p1065590204664849_658_h2.jpg)
![[포토] 제주 명품 숲 사려니숲길을 걷다 '한남시험림'을 만나다](/news/data/20210513/p1065575024678056_366_h2.png)
![[포토] 해양서고 예방·구조 위해 '국민드론수색대'가 떴다!](/news/data/20210419/p1065572359886222_823_h2.jpg)
![[언택트 전시회] 사진과 회화의 경계](/news/data/20210302/p1065575509498471_939_h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