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던 아버지, 영의정 심온 대감께서 사은사로 명나라를 향해 길을 떠나셨다. 길을 떠나던 날 궁궐 사람들이 행렬을 환송하기 위해 모두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아버지의 직위 그리고 왕의 비인 자신의 역할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덕망과 인품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 임금은 달리 생각하셨다. 심온 대감의 힘이 강성해져서 자신의 아들 세종임금의 권력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리라 판단했다.
그 이유로 상왕은 심온 대감께서 명나라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제거하기로 결론 내렸다. 터무니없는 각본을 짜고 다른 대감들을 연루시켜 모진 고문으로 의도된 자백을 받아내고 급기야 숙부까지도 제거하고는 심온 대감을 역모에 옭아맸다.
그를 인지한 시어머니께서 당신이 사가에서 데리고 들어온 강 상궁을 국경으로 보내 아버지께 그 사실을 알리고 입국하지 마시라 전했다. 그러나 왕의 비로 있는 당신의 딸을 생각하시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어이 입국하셨다.
그를 바라보던 강 상궁은 그 차가운 압록강 물속으로 뛰어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고 당신의 딸 때문에 입국하신 아버지는 상왕의 의도대로 사람에게는 행하지 말아야 할 압슬형이라는 무지막지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빨리 죽고자 상왕의 각본에 따라주었고 결국 제거되었다.’
그와 관련해서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을 당사자인 시어머니의 애절한 목소리로 듣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자신의 일인 듯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시어머니의 얼굴이 냉정을 찾아갔다. 오히려 정희와 김 상궁이 그 당사자인 듯했다.
“어미야!”
“네, 마마”
“나는 말이야, 어떻게든 내 서방님, 세종임금이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죽음을 막아 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어.”
당연히 그리해야 할 일이었다.
그 대목에서 자신의 서방님, 수양대군을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상대가 태종임금, 아니 세종임금이라도 정희 자신의 아버지께서 그런 경우에 처한다면 결코 물러설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런데, 어미야...... 한 잔 더 다오.”
말을 하다가 중간에 멈추고는 빈 잔을 정희에게 내밀었다.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소헌왕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마!”
“괜찮으니 한 잔 더 따라다오!”
조심스럽게 빈 잔을 채우자 단숨에 들이키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무능하고 약한 사람일 줄이야.......당신을 그리 사랑하시는 아버지, 상왕의 억지 주장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자신이 조금만 앞장서서 막았더라도 죽음까지는......”
“마마!”
“그런데 더 우스운 일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눈물이 흘러내리는 그 눈으로 소헌왕후의 얼굴을 주시했다. 소헌왕후께서 어금니를 깨무는 듯했다.
“그런 사람을 서방님이라고...... 내 목숨 살려준 것이 고마워서...... 잠자리도 마다하지 않고......”
순간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세상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어마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아니야, 이제는 할 이야기는 해야겠어. 그동안 가슴에 품고 있는 생각들을 모두 풀어야겠어. 그러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시어머니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급히 시선을 돌려 후원 곳곳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어디에서고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어미야, 세자가 불쌍하구나!”
“세자저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세자 말이야. 우리 불쌍한 세자.”
뜬금없이 세자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반반하다 싶은 여인이면 잠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장성한 아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마마!”
급하게 소헌왕후의 말을 잘랐다. 더 이상 감정에 휩쓸리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싶었다. 시어머니의 말은 잘랐지만 순간 세종임금께서 너무 심하지 않는가 하는 순간적인 생각이 일어났다.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려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여인들과의 잠자리를 멈추지 않았으니 한 궁궐 안에 살면서 그를 바라보는 장성한 세자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정희의 감정이 실린 말에 소헌왕후께서 그 경황에서도 아차했는지 잠시 몸을 움찔거렸다.
“그래, 어미야. 이제는 내가 살만큼 산 모양이지.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시어머니께서 가슴 속에 묻어 놓은 한이 한잔 술에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며느리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분출되고 있었다.
“어미야, 살아있다는 것이 이리도 증오스러울 수 없구나.”
“마마, 그리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마음을 단단히 잡으세요!”
더 이상 시어머니를 그대로 두면 안 될 듯했다. 김 상궁에게 눈짓을 보냈다. 김 상궁이 얼른 다가와 소헌왕후의 한쪽 팔을 잡았고 다른 한쪽 팔을 정희가 잡았다.
소헌왕후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 나왔다.
“어마마마!”
막상 시어머니를 불렀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아직도 죽지 않고 있는 내 탓이지. 불쌍한 내 아버지!”
소헌왕후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순간 소헌왕후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미야, 내가 너희들 집에서 함께 살면 안 되겠니?”
자세를 바로 한 시어머니께서 정희의 얼굴을 바라보고 마치 술기운을 쫒아내기라도 하듯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시어머니께서 자신을 찾은 사유를 알 듯했다.
더 이상 의미 없는 궁궐에서의 삶 또 그로 인해서 발생한 지독한 한을 떨쳐버리기 위해 생의 마지막을 궁궐을 떠나 정희 부부와 손자 장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는 의사 표시였고 그런 연유로 정희의 의사를 타진하고자 함이었다.
“마마, 마마께서 괜찮으시다면 당연히 그리하셔야지요. 저희 장이도 있고 하니 말이에요.”
가만히 시어머니의 손을 잡자 소헌왕후의 눈가에 고인 이슬이 떨어졌다.
천기
“어미야!”
이제나 저제나 서방님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서방님이 아닌 시어머니, 소헌왕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하도 적적해서 말동무나 하려고 건너왔네.”
“어서 오세요, 마마. 그러지 않아도 저도 무료해서 마마께 가볼까 하던 중이었어요.”
궁궐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소헌왕후께서 생의 마지막을 수양대군과 정희와 함께 하고자 하셨고 그예 명례궁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아비는 아직 귀가 전인 모양이지?”
“요즘 궁궐에서 할 일이 많은 모양이에요. 아마 잠시 후면 귀가할 듯 하오니 저와 같이 말동무나 하시지요.”
“그러자꾸나.”
소헌왕후께서 미소를 머금고 자리를 잡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손수 조그마한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차와 간단한 먹을거리를 앞에 놓고 초롱불 아래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모녀지간이라고 해도 곧이듣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정하게 보였다.
찬찬히 살펴 본 소헌왕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배어있었다. 시어머니께서 야심한 시간에 그리고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다면 당신께서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또 그 이유를 이야기하고자 왔음을 감지했다.
차를 권하면서 시어머니의 얼굴을 주시했다. 얼굴 곳곳에 잡혀있는 주름살이 호롱불에 깊이 패어보였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던 소헌 왕후께서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가는 살짝 입에 댔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어미야,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구나.”
아마도 시어머니께서 오래전부터 뭔가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리고 그 시점이 당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신 모양이었다.
“아무 심려 마시고 말씀하세요.”
“대부인은 이 조정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령 왕후라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이야기였다. 조정을 두고 어떻게 생각한다니, 이는 바로 역모로 몰고 가도 어쩔 도리가 없는 사안이었다.
“마마,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헌왕후가 다신 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전보다 길게 입을 대었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대부인은 세자가 선왕들처럼 굳건하게 이 나라의 사직을 유지하리라고 생각하느냐 이 말이오!”
그 말에 머리카락이 삐죽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세자가 너무 유약하다 이 말이오. 그리고 또......”
이제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어디에서고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간신히 좌정하고 소헌왕후의 입에 시선을 고정했다.
“대부인,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잘 들으시오!”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추상같은 명령처럼 느껴졌다.
“세자가 너무 유약해요. 거기에 더하여 건강도 좋지 않고. 물론 천성적으로 약하게 태어난 탓도 있지만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건강이 더욱 손상된 듯해요.”
세자가 너무 유약하다면......그 다음의 이야기는 불을 보듯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바로 그의 대칭이 되는 말이 나올 터였다.
그렇다면 아니 듣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등줄기뿐만이 아니라 얼굴에서도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 반대로 수양의 성정이 너무 강하고 언젠가는 수양이 왕위에 오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있어요. 세종임금도 어느 정도 그를 간파하고 있고 그를 걱정하고 있어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을 멈추기 위해 앞에 놓인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세종임금은 수양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은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당연히 큰 아들인 세자가 임금이 되어야하고. 그리고 또 수양을 걱정하고......”
그리 말을 하고 있는 소헌왕후는 자신의 말을 즐기는, 혹은 정희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위태로운 모습에 환희를 느끼는 듯 했다.
찻잔을 잡으면 손 떨림이 멈추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찻잔도 덩달아 떨었다.
소헌왕후가 손을 뻗어 떨고 있는 정희의 손을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로 인해 무슨 변고가 일어난다는 이야기는 아니오. 다만 세종임금도 그리 걱정하고 있다는 이야기요. 그리고 세종임금은 어떠한 경우라도 당신의 아들들을 내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세종임금이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터인즉, 나중을 대비하라는 말이에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나중을 대비하라, 다시 말해서 서방님이 왕위에 오르는 상황을 감안하라는 이야기였다.
머릿속이 급격하게 비어가기 시작했다. 소헌 왕후께서 계속해서 그와 관련해 세세한 이야기를 하시고 있건만 전혀 머리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귀고막이 마치 벌침에 쏘인 듯이 윙윙거렸다.
이야기를 마친 시어머니께서 이제는 쉬시겠다고 별당으로 건너가신 지 오래 되었건만 정희로서는 그 자리에 시어머니가 있는지 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버렸다.
온 세상이 텅 비어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니 혼이 빠져나가버린 듯했다. 서방님이 집에 들어올 때까지 그 상태가 이어졌다.
시어머니께서 수양의 집으로 오신 이후 항상 집을 나서고 들어올 때면 어머니께 문안인사를 드리던 수양이었다. 그런 연유로 집에 들어오면 먼저 안채를 향했었다.
항상 자신의 기척이 들리면 버선발로 달려 나오고는 했던 정희가 그날따라 이상했다. 자신을 기다리기는커녕 방안에 들어앉아 흡사 넋이 빠져나간 사람마냥 앉아있는 정희의 모습이 정상으로 보일 턱이 없었다.
“부인, 왜 그러오!”
그래도 정희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답답했던지 수양이 바짝 다가서서는 정희의 손을 움켜잡았다.
“부인!”
정희가 그 소리에 어깨를 들썩이며 수양을 주시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대군, 언제 오셨어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었다. 수양이 잠시 멍하니 정희를 바라보다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었기에 사람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오.”
방금 전에 시어머니와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대군, 마마께서......”
어머니라는 말에 수양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왜요, 어머니께서 왜!”
“어머님의 건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제가 그 부분을 생각하느라고......”
수양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부인. 아마도 어머니께서 오래 사시지 못할 모양이에요.”
정희의 속내를 알 길 없는, 어머니에게 지극정성인 자신의 아내가 그런 일로 몰두해있었다는 사실에 한편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모진 고생을 하시고도 아직까지 살아계신 일만 해도 다행이라 보아야지요. 아마도 부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시름을 삭이지 못하고 벌써 돌아가셨을 지도 모르지요.”
이제는 정희가 수양의 팔을 잡았다.
“대군, 살아계시는 동안이라도 저희가 성심성의껏 모셔야지요.”
“고맙소, 부인. 내가 그래서 요즘 어머니를 위해 불경을 번역하고 있다오. 우리 어머니께서도 그를 읽으실 수 있도록 훈민정음으로 말이오.”
서방님이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부처님의 깊은 뜻을 알게 하려고 말이다.
“상감마마께는 고하셨는지요?”
“아직은 개인 차원에서 시간이 나는 대로 짬짬이 그리하고 있어요. 그러나 조만간에 아버지의 윤허를 얻어 정식으로 그에 매달릴 생각이오.”
“대군, 저를 위해서라고 그리해주세요.”
말을 마치고는 수양에게 몸을 기댔다. 아무래도 그 날 밤은 서방님의 품에서 잠을 청해야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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