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역사소설 - 女帝 정희왕후⑩

황천우 작가 / 기사승인 : 2013-07-10 16: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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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흘려버리자.”

한참 동안 장을 포옹하고 있던 어머니께서 품에서 놓아주고는 길례와 순임으로 하여금 돌보도록 하고 정희와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방안에 들어서자 어머니께서 침묵을 지키기로 작정했다는 듯이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아니, 어머니. 왜 제가 그리도 못마땅하신가요?”

어머니가 정희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그러지 않아도 네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께서 이미 정희가 점을 보고 온 이후에 한참을 앓았던 사실, 정희의 고민을 직감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 또한 당신의 남편에게 궁궐의 상황에 대해 세심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을 터였다.

“그러면 어머니께 달리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되겠네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쉰 어머니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네 아버지와 그것이 운명이구나 하고 이야기 했다. 네가 수양대군의 아내로 들어갈 때부터 그것은 하나의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어머니의 입에서 운명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뼛속까지 그 말이 파고드는 듯했다.

“어머니도 그리 생각하세요!”

다시 어머니에게 커다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의견을 전해주었다.

현재 상태로 보아 세종임금께서는 그리 오래 살아계시지 못할 것이고 실제 실무를 처리하는 왕세자가 임금에 자리에 오르지만 건강을 보아하니 그리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고 했다.

그 후에 반드시 평지풍파가 일어나고 당신의 경우도 당신의 딸이 있어 그 현장을 모면하기는 어렵고 그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 어미에게 속 시원하게 이야기 해줄 수 있겠니?”
“무엇을 말씀이에요?”
“그 날 같이 가서 점을 보고 나온 결과 말이야.”
“이미 어머니도 알고 계신 일을 무어 새삼스럽게 다시 말씀드려요.”
“그래도 네 입으로 한번 들어보고 싶구나.”
“그냥 저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할게요. 그것이 어머니나 아버지, 저에게도 도움이 될 듯해요.”

차마 어머니께 정희 자신에게도 왕의 운이 있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그래, 어차피 시간이 문제지 결론은 빤한......”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아시겠지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어머니께서 웃으셨다. 그리고는 정희와 무릎을 마주할 정도로 거리를 가까이 했다.

“장이 이야긴데.”
“장이가 왜요?”
“네 아버지 말씀이니까 잘 새겨 듣도록 해라.”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장이도 이제 조만간에 혼인을 시켜야 하지 않겠니.”
“그래야겠지요.”
“누구 정해놓은 사람 있느냐?”
“아직 혼인 문제도 생각하지 않았었는데요.”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생각해 보거라.”

정희의 무릎이 어머니의 무릎과 부딪혔다.

“아버지께서 누구를 이야기 하세요?”

어머니가 잠시 문을 바라보고 있다가는 얼굴을 정희에게 가까이 했다.

“한확 대감의 여식이다!”
“한확 대감의 여식이요!”
“그래, 한 대감댁의 여식!”

복병

저녁 무렵 하루를 마감하기 위해 순임을 앞세우고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중문을 나서서 주로 서방님과 아들이 기거하는 사랑채를 둘러보고 후원으로 향했다. 수양대군이 수시로 건장한 사내들을 불러 활쏘기 시합을 하는 장소였다.

정자에 올라서 널따랗게 펼쳐진 후원을 바라보고 수양대군의 활 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당당하게 서서 활에 화살을 먹이고 힘차게 당기고는 시위를 떠난 화살이 보기 좋게 과녁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 생각을 하자 문득 묘한 감회에 빠져들었다. 세월의 흐름이 시위를 떠난 화살마냥 너무나 빠르지 않은가 하는 감회였다.

“순임아!”
“네, 마님.”
“우리가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지?”
“한 20여 년 흐른 듯해요,”
“벌써 그리되었구나.”
“마님, 왜요?”
“갑자기 이 정자에 올라서니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그래.”

순임이 저도 마치 그 시절을 생각하는지 그윽한 시선으로 정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오로지 나만을 찾던 서방님이 이제는 밖으로 눈을 돌리고는 하는 모양이야.”
“무슨 말씀이시래요?”
“대군께서 자주 기방을 출입하고 그러는 모양이더라고. 이제는 이 몸이 싫증이 난 모양이야.”

순임이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그 얼굴에 깊은 근심이 스쳐지나갔다.

“왜, 네 남편도 그러느냐?”
“아닙니다요, 마님. 제 여자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는 위인인 걸요.”
“그건 그렇고, 네 딸 아이는 요즘 통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 그 아이도 빨리 혼인을 시켜야 하는데 말이다.”

순간 순임의 얼굴이 파랗게 변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문득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왜, 무슨 일 있느냐!”
“아닙니다요, 마님. 요즘 몸이 좋지 않다고 해서......”

순임의 얼굴 표정은 물론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말 못할 사연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순임의 과년한 딸, 이름은 ‘덕중’이라 했다. 나이가 15, 6세는 되었고 눈매가 살짝 치켜 올라 간 그 자체로도 끼를 내뿜고 있는데 한참 물이 오른 몸매로 집안을 휘젓고 다니고는 해서 정희에게 여러 차례 주의를 받고는 했었다.

“몸이 안 좋다니, 그러면 의원에게 보여 치료를 받아야 할 일 아닌가!”
“아닙니다요, 마님. 얼마간 자리를 보전하면...... 능히 자리에서......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순임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또한 힘들게 말을 마친 순임의 시선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고, 몸이 출렁거리고,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허둥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일순간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다, 내 한번 살펴보아야겠으니 앞장 서거라.”

정희의 몸이 가볍게 전율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님......”

힘들게 정희를 부른 순임이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새파랗게 변한 순임의 얼굴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가는 순간이었다.

“말해 보거라!”

정희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이 년을...... 죽여주시옵소서! 마님......”
“제대로 말을 해보라고 하지 않았느냐!”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 아무런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이 년과 이 년의 딸년을......죽여주시옵소......”
“똑바로 아뢰라고 하지 않았느냐!”

목소리에 노기가 가득했다.

“이 년의 딸년이 그만......그만......”

순임이 기어코 땅바닥에 얼굴을 마주하고 손으로 땅바닥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울음소리와 손으로 땅바닥을 내려치는 둔탁한 소리가 후원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모습, 눈물과 격한 감정으로 자신을 상실한 듯이 보이는 순임에게 더 이상 답을 독촉한들 소용이 없을 듯했다.

물끄러미 순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황으로 보아 이미 일이 벌어졌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순임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일에 대한 전말이 눈물과 아우러져 가슴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늦은 시간에 덕중이 달구경을 한답시고 중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마침 그 시간에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수양대군과 마주쳤고 한참 물이 오른 덕중의 자태 그리고 달빛을 받아 한층 더 끼를 풍기는 그녀의 모습이 수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여자를, 특히 자신의 하인을 곱게 놓아둘 위인은 없을 터였다. 결국 수양대군의 강압으로 동침을 했고 그를 시발로 해서 수양대군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덕중을 찾았다.

새로운 여자의 냄새를 맡은, 그것도 한창 물이 오르고 끼가 절절 흐르는 여자인 덕중을 대하는 수양대군의 태도가 필사적일 정도였다. 그런 연유로 결국 아이까지 임신했으나 불행 중 다행인지 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었고 그로 인해 덕중이 몸보신 차원에서 자리에 몸져누워있다 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게 변해가는 하늘이 노랗게 느껴졌다. 노랗게 변해가는 그 하늘에서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후 땅이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일순간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몸을 바로 했다. 다시 한 번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란 하늘이 천천히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 자신의 서방님은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비록 기방은 드나들어도 절대로 다른 여인에게 정을 주지 않고 오로지 자신 하나만 바라보면서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천천히 활터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는 활을, 수양대군의 활을 집어 들고 곁에 있는 화살을 집어 시위에 올려놓았다.

그를 바라보는, 눈물로 범벅이 된 순임의 얼굴이 그야말로 사색으로 변해갔다. 화살을 시위에 올려놓은 정희가 순임의 모습을 잠시 주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희미하게 보이는, 멀리 있는 과녁을 향해 자세를 바로 잡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급하게 화살을 당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당겨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얼굴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또한 활을 잡고 있는 양팔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한순간 온 몸의 떨림으로 인해 화살이 손가락에서 빠져버렸다. 화살을 놓쳐 버린 시위를 잡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대로 손을 떼자 팅 하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깊게 호흡을 하고 다시 화살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화살과 시위를 함께 잡아당겼다. 역시 몸에서 가느다랗게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침착하게 그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기를 어느 순간 화살과 시위를 당기고 있는 손에서 힘을 뺐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힘차게 저녁 공기를 가르며 과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달이 눈물에 반짝이고 있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자신의 생각이 너무 이기적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솟아났다.

짧은 그 순간에 세종임금의 모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많은 자식들이 있는데도,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지속해서 새로운 여자를 찾아다니는 시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후손을 양산하려고 하는 욕구가 어쩌면 남자의 본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하물며 자신의 서방님, 수양대군의 경우처럼 젊고 혈기왕성한 사내대장부라면 여자 하나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묘한 일이었다. 서방님이 기방을 다니는 사실 또 기방이란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아끼는 몸종 순임의 딸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순임을 생각하고 그녀의 딸 덕중을 그려보았다. 덕중을 바라보면 꼭 세자의 비였던 휘빈과 순빈이 생각나고는 했다. 지나칠 정도로 색을 밝힐 듯 보이는 외모 때문이었다. 그 자체가 여자로서야 나무랄 데가 없지만 남자의 상대, 특히 큰일을 앞둔 사람에게 있어서 그런 사람은 기피해야할 듯했다.

남자의 기를 빼앗아가는 그런 여자의 경우는 아무래도......
깊이 한숨을 내쉬고 활을 있던 자리에 두고 순임에게 다가섰다.

“순임아!”
“예, 마님.”

순임의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정희 자신과 일평생을 함께 하기로 했던 순임이었다. 그런 순임을 바라보자 측은한 마음이 일어났다.

“네가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겠구나.”

순임으로서는 이외의 무서운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느 여자라면 당장에 사생결단을 내려고 할 터인데 말투가 너무나 침착했다.

“마님, 저희 모녀를 죽여주십시오!”

묘한 생각이 일어났다. 이미 벌어진 일로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다시 돌릴 수 없었다. 기왕의 것은 인정하고 그 선상에서의 활로를 찾아야한다는 바람이었다.

아울러 그 일로 인해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 언제인가는 세종임금의 경우처럼 수양대군에게도 여러 명의 후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경우라면 수양대군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어야 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순임의 손을 잡았다.

“너희 모녀가 무슨 죄가 있느냐. 그저 여자로, 하인으로 태어났다는 죄지.”
“마님!”
“그래, 우리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흘려버리자.”

순임을 다독이며 말을 건넸다. 기왕의 일은 기왕의 일로 돌려버리자고 말이다. 아울러 덕중에게 차후에는 스스로 나서서 수양대군을 찾지 말라는 주의를 주었다. 순임의 몸이 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손을 잡아 순임을 일으켰다. 뒤를 따르는 순임을 남겨두고 내실로 향했다. 아들과 딸 의숙의 혼처 문제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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