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처
아침부터 서두르기 시작했다. 다른 날의 경우는 입궐하는 수양대군과 아들의 아침 식사와 배웅으로 인해 일상적인 바쁜 시간을 보냈는데 그 날은 다른 이유로 서두르고 있었다.
궁궐에서 연회가 열리기로 되어있었다. 모든 업무를 왕세자에게 맡기고 물러 앉아있는 세종임금께서 세자의 어린 아들 홍위를 왕세손에 책봉하고 그를 기념하기 위해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기로 했다.
얼추 준비가 끝나자 딸 의숙을 데리고 중문을 나섰다. 이미 수양대군과 장이 행차준비를 마무리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왜요, 부인!”
“대군과 장을 바라보니 갑자기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생각나서요.”
수양대군이 아들을 바라보며 흡족한 표정을 짓다가는 짐짓 모른 체하고 대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서방님의 뒤를 따라 대문을 나서자 청지기 임운이 이미 행차 준비를 마무리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일행들 앞에서 걸음을 멈춘 서방님이 미소를 짓고는 말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미소를 지으며 의숙과 함께 가마에 들어섰다.
가마에 자리 잡자 차양을 열고 수양대군과 아들 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수양대군은 이상하리만치 말 타기를 좋아했다. 마치 자신과 그렇듯이 말과도 모종의 인연이 있는 듯했다.
그에 아들 장도 제 아버지처럼 말을 타고자 원했다. 그러나 아직 열 한 살인 장의 경은 말 타기에는 다소 이르다는 생각으로 자제 시키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교꾼들이 움직이는 조그마한 교자를 타고 아버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왕세손의 나이 이제 여덟 살이었다.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종임금이 건재하고 있고 그리고 왕세자가 실무를 모두 살피고 있는 와중에 왕세손의 책봉은 한편 생각하면 이외의 조처였다.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 그리 빠른 조처를 취한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일어났다. 소헌왕후께서 생전에 세종임금과 함께 왕위 문제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한 바가 있다고 했다. 지금의 왕세자에게 수양대군이 위협적인 존재라고 말이다.
아울러 세종임금께서 저리도 서둘러서 홍위를 왕세손에 책봉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듯했다.
현재의 왕세자를 생각해보았다. 세종임금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왕세자의 경우도 건강이 중요한 문제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질지 몰라서 세종임금이 그예 먼저 손을 쓴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었다.
한참 그 생각에 몰두하던 중 갑자기 점을 보았던 일이 생각났다. 두 명의 임금이 자리한 다음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점괘, 어찌 보면 그 운명에 세종임금이 그리고 왕세자와 왕세손이 시기를 앞당겨 맞추어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가볍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행렬이 궁궐의 동문, 건춘문에 도착했다. 가마에서 내리자 이미 수양대군과 장이 건춘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옷매무시를 가지런히 하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궁궐 안이 혼란스러웠다.
시선을 내전으로 향하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시어머니께서 살아계셨다면 이거저거 생각하지 않고 바로 그리 가야할 일이었다. 그곳을 바라보고는 다시 소헌왕후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마치 친정어머니와도 같았던 그 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 분이 살아계셔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일어났고 그 마음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눈시울이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대부인 마님, 오셨어요.”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느 새 다가왔는지 김 상궁이 다소곳하게 맞이했다.
“김 상궁, 잘 지내고 있지요.”
“대부인 마님의 은혜 입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김 상궁과 인사를 나누고는 시선을 내전으로 돌렸다.
“지금 모두 내전에 도착해서 담소를 나누고 계십니다.”
“내전에요?”
“그러하옵니다. 먼저 그리로 가시지요.”
소헌왕후가 계시지 않는 내전으로 향한다는 일이 다소 어색한 기분이 들어 잠시 그 자리에서 망설였다.
“마님, 나서시지요.”
김 상궁이 마치 그곳이 정희 자신의 자리이니만큼 주저하지 말라는 듯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내전으로 가면서 세종임금과 왕세자를 생각해보았다.
완전히 딴판이었다. 세종임금의 경우는 시어머니인 소헌왕후로도 만족을 하지 못해서 여러 후궁을 거느리고 있건만 지금의 왕세자는 여인 보기를 돌과 같이 하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것이 아마도 소헌왕후께서 말씀하신, 건강 문제를 떠나 한 궁궐 안에서 밤마다 여인들을 품는 아버지의 행각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가벼이 진저리 쳤다. 내전에 들어서자 세종임금의 위세를 가히 실감할만했다. 그 많은 후궁과 그들에게서 뻗어진 씨앗이 내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세종임금의 여덟 아들 중에서 왕세자를 제외하고 수양대군이 가장 맏이었다. 또한 세종임금이나 왕세자의 경우도 정실부인의 경우는 없었던 관계로 내전에 드는 정희에게 여기저기서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그들 모두와 일일이 인사를 받고 주고는 했다. 특히 세종임금의 후궁, 왕세손을 도맡아 키운 혜빈 양씨에게는 정희가 다가가서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유사시 지원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불어 수양대군의 동생들의 안 사람들, 대군들의 부인들과도 각별하게 인사를 나누며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에 한 여인이 연회가 시작될 터이니 경회루로 자리를 옮겨야한다고 전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고 경회루에 도착하자 세종임금과 왕세자, 왕세손 등 왕족들의 모습을 제외하고 모든 대소신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희 일행이 여인들의 자리로 이동했다. 각종 산해진미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가득 차려져 있었다. 세종임금께서 금일 행사에 대해 어느 정도의 비중을 두고 있는지 알 듯했다.
당신으로서야 세자에게 얻은 단 한명의 귀한 손자고 그 손자를 왕세손으로 등극시키는 날이니 어련히 정성을 쏟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잠시 후 세종임금을 위시한 왕족 일행이 자리를 잡자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되면서 은은한 제례악이 경회루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정희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왕세손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세종임금, 왕세자, 왕세손이 함께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주위를 왕족들이 양쪽으로 둘러싸고 앉아있었다.
“왕세손 저하, 경하드리옵니다.”
“숙모님, 잘 오셨어요.”
정희의 축하 인사를 받는 왕세손의 눈이 반짝였다. 눈동자가 너무나 맑았다. 세종임금이 그래서 왕세손 홍위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뒤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관계로 많은 말을 하지 못하고 주위 분들에게 간단히 안부를 전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를 잡고 시선을 왕세손에게 주었다. 점괘에 의하면 두 임금이 물러서고, 세종임금과 왕세자가 물러선 연후에 좌우를 쳐야한다고 했다.
왕세손이 보위에 앉은 연후에 그 주위를 쳐야함이었다. 친다 함은 결국 희생, 즉 피를 봐야한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경우에 따라서 그 중심에 서 있는 왕세손의 경우도.
눈을 질끈 감았다.
“대부인, 드시지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안평대군의 부인 정 씨였다.
“그러시죠. 같이 들어요.”
정 씨 부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햇빛에 비치는 그녀의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았다.
“부인,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어요?”
빤한 질문이다 싶었다. 풍류를 즐기는 안평대군이 자신의 부인에게 정성을 들일 리 만무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정성은커녕 서로가 얼굴 마주하기도 힘들고 그래서 거의 남남의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그에 대해 인정이라도 하듯 정 씨 부인이 가만히 미소로 답했다.
태양이 빛을 한껏 발하기 시작하자 연회의 분위기도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일순간 한 무리의 여인들이 연회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희가 가만히 그들에게 시선을 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살펴보았다. 잠시 후 시선이 한 여인에게 고정되었다. 그들 중에 눈길을 끄는 여인이 있었다. 어디서인가 한번쯤 본 여인인 듯했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으나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주시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여인의 춤사위가 단정했다. 얼굴 또한 보기 드문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무게감이 보였고 천한 듯하면서도 귀한 모습이 엿보이는 듯했다. 그야말로 종을 잡을 수 없는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한순간 그 여인이 무희의 옷을 벗은 모습, 평상복을 입은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랬다. 바로 자신이 앓아누웠을 때 궁궐에서 내의원과 함께 나왔던 보조 의원이었다.
당시는 너무 수수하게 차려입어 쉽게 구분을 하지 못했는데 찬찬히 바라보고 그 복장을 입은 모습을 생각하니 바로 그 여인이었다.
한참동안 여인에게 시선을 주다가 시선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정희를 주시하고 있던 김 상궁이 정희의 눈짓에 따라 곁으로 다가왔다.
“김 상궁, 저 여인이 누군지 아시겠어요?”
김 상궁이 정희가 가리키는 방향을 주시했다.
“알듯하옵니다.”
“연회가 끝나면 저 여인을 불러주세요.”
바로 옆에서 정희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정 씨 부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정희의 모습을 바라보며 예종의 후비로 여자를 취했던 순빈 봉 씨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부인, 왜요. 이상한 생각이 드세요?”
정 씨 부인의 얼굴색이 발갛게 물들었고 정색을 하며 자리를 바로 했다.
고개를 돌려 저만치에 앉아 있는 수양대군을 주시했다. 어느 순간 수양대군도 정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한곳에서 마주치자 잔잔하게 미소를 보냈다. 그 의미를 알 까닭 없는 수양대군 역시 미소로 답했다.
연회가 파하기 직전, 무희들이 물러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김 상궁을 대동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여인이 누구죠?”
“집현전 학자로 계시는 박중림 대감의 여식으로 내의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여인입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수양대군의 후처로서 손색이 없을 듯했다. 걸음을 재촉하자 김 상궁에게 기별을 받은 무희가 내전의 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개를 들어보세요.”
가까이서 바라본 여인의 모습이 너무나 고왔다. 같은 여자로서도 질투가 날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향내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름답기는 한데 진한 색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속으로 미소를 자아냈다.
“내가 긴히 할 말이 있어 보자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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