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역사소설 - 女帝 정희왕후⑫

황천우 작가 / 기사승인 : 2013-07-10 16: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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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마님의 부인되시는 낙랑부대부인 마님이세요. 인사드리도록 하세요.”


여인의 눈이 반짝였다.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그대는 나를 아시오?”
“수양대군 마님의 대부인 마님 아니신지요.”

여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래요, 내가 바로 수양대군의 안사람인 낙랑부대부인이오.”
“......”
“그 때는 너무 고마웠어요, 그런데 인사 한번 드리지 못했네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그 때 노고에 치하 드릴게요. 그리고 내가 그대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고자 하는데 들어주실 수 있겠어요?”
“어느 분의 말씀이라고 거역을 하겠습니까.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겠어요. 제 서방님, 수양대군의 후처가 되어주세요!”

여인의 눈이, 곁에 서 있던 김 상궁의 눈동자가 동시에 벌어졌다. 그뿐만 아니었다. 두 여자가 잠시 충격에 휩싸였는지 정희의 시선을 피해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니 되겠어요!”
“대부인 마님, 아니 되고의 문제가 아니옵고 하도 갑작스러워.......”
“나를 도와서 나의 서방님, 수양대군을 모셔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 하는 정희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뚫어져라 정희를 바라보았다.

“내 그리 알고 이만 자리를 뜨겠어요.”

말을 마치기 마자 방향을 바꾸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정희의 모습을 바라보는 무희의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현실인지 꿈속의 일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곁에 있던 김 상궁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정희의 돌연한 행동에 멍해있던 김 상궁이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뒤를 따라 나섰다.

“대부인 마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야기 한 대로 그대로지요. 무슨 말은.”
“하오면?”
“이제는 대군에게도 후처를 들일 때가 온 듯해요. 그리고 그런 경우라면 내가 나서서 일처리 함이 옳지 않겠어요.”

한확의 딸

친정을 향해 길을 나섰다. 어머니와 함께 한확 대감의 집을 방문하기로 약조해 놓았던 터였다. 친정에 도착해서 어머니와 잠시 한담을 나누고는 길례를 앞세우고 한확 대감댁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머니, 정말 고마워요.”
“나에게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네 아버지께 하거라. 나야 네 아버지 말씀대로 움직이니 말이야.”

아버지 윤번.
지난 몇 년 동안 풍병으로 고생하시다가 다시 판중추원사라는 힘든 직책을 맡아계셨다. 나이가 드시면서 서서히 졸도와 경련 등 풍병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에 관직에서 물러나 계시다가 어느 정도 안정의 기미를 보이자 다시 중추원의 최 고위직인 판중추원사에 부임하셨다.

중추원은 왕명을 출납하고 병기, 군정, 숙위를 담당하는 중요한 부서로서 한시도 한눈을 팔 수 없는, 그야말로 다른 어떤 일보다도 힘든 부서였다. 특히 연로하신 아버지께 중추원의 최고 책임자라는 직책은 감당하기조차 힘든 직책이었다.

그런 아버지께서 한확 대감과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셨다. 중추원 근무도 그러려니와 관찰사 등 서로 업무가 중첩되는 부분이 많아 개인적인 측면을 떠나서도 서로가 서로의 공적인 업무를 도와주고는 하는 가까운 사이였다.

“아버지 건강은 어떠세요.”
“건강을 떠나서 나이를 거스를 수 있겠니. 아마 오래 사시지 못할 것 같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아버지의 의도, 연로하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딸을 위해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아시고 그리고 당신과 가까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대신하도록 하신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어머니, 그럼 아버지를 이만 쉬시도록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지. 그런데 네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위인 수양대군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 없다고 하셔. 당신의 사위를 봐서라도 더욱 열심히 일을 하셔야 한다고 하시니......”

사실 아버지께서 여건에 비해 빠르게 출세하신 부분에 수양대군의 힘이 알게 모르게 많이 작용했었다. 혼인하자마자 지방에 근무하던 아버지를 한양으로 모실 수 있었던 부분도 알고 보면 다 수양대군의 도움이었다. 그러니 그를 잘 알고 계시는 아버지께서 사위 낯을 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 제가 수양대군에게 이야기해서 아버지 이제 그만 쉬시도록 할게요.”
“그러겠니. 그렇게 해서라도 쉬시도록 해야지. 이러다가 진짜 조만간에 세상 하직하실 것 같구나.”
“그건 그렇고요, 어머니!”
“왜?”
갑자기 대화의 방향을 바꾸어가는 정희를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아들 장은 한확 대감의 여식과 혼인을 시킨다고 하고요. 그러면 우리 딸 의숙인 어쩔까요?”
“그렇지, 딸 아이 의숙이의 혼처도 한 번 생각해야지.”
“그래서 아들의 혼처를 정하는 마당에 딸아이의 혼처도 정하고 싶어요.”

어머니께서 잠시 생각에 골몰하는 듯하다가는 표정을 밝게 했다.

“네 아버지와 가까운 분 중에 집현전 학자로 오래 계셨던 정인지 이조판서 대감에게 의숙이와 딱 알맞은 사내아이가 있는데.”
“정인지 대감댁 자제요!”
“그 댁의 아들이 아마도 의숙이와 같은 연배일 터이니 수양대군과 함께 의논해보도록 하거라.”

정인지 대감의 자제라면 당연히 의논해 보아야했다. 아니, 의논이고 뭐고를 떠나서 바로 정해야할 듯했다. 한확 대감과 거기에 더하여 정인지 대감까지 사돈이 된다면......
정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왜, 마음에 드냐?”
“마음에 들다 뿐이겠어요!”

흡족하게 생각하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께서도 그 자체만으로 흡족한 모양이었다. 잔잔한 미소로 자신의 속내를 딸에게 건네고 있었다.

어머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정희 자신의 집만큼이나 웅장한 집에 도착했다. 대문에 서서 가만히 집을 바라보았다. 수양대군이야 임금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일개 대신으로서 그러한 집을 지니고 산다는 자체만으로도 그 위용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길례가 대문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대문이 활짝 열리고 그 대문을 들어서자 정희 나이 또래의 여인과 이미 기별을 받고 그곳에 와있는 한확 대감의 딸이면서 정희와 동서가 되는 계양군 부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지요, 대부인 마님.”
“어서 오세요, 형님.”

온 몸에서 기품이 흐르고 있는 중년의 여인에게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나왔다. 아울러 안색이 조금은 창백한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 뵙습니다. 부인.”
“오랜만입니다. 부인.”

어머니와는 구면이었지만 정희는 초면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야기를 통해서 서로를 알고 있었던 관계로 자연스레 인사를 건넸다. 어머니 또한 정희의 동서 되는 계양군 부인에게 미소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어머니께 오기 전에 이야기를 들었다. 한확 대감의 부인은 아쉽게도 이미 세상을 하직했다고 했다. 유서 깊은 남양 홍 씨 집안의 귀한 여식으로 자라나고 가문과 또 자신의 소양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한 여인인데 8남매를 낳고 기르다 바로 몇 해 전에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고 했다.

따라서 한확 대감의 큰 며느리가 집안의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홀로 된 시아버지 환확 대감과 자신의 서방님 그리고 나이 어린 시동생들과 자신의 자식들을 건사하느라 그 고생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안내로 별채로 인도 되고 자리를 잡자마자 간단한 상이 들어왔다.

“대부인 마님, 소인이 한확 대감의 큰 아들, 한치인의 안사람 되는 백천 조 씨입니다.”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또박또박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투에서 그녀만의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는 조 씨 부인이 밖을 향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가서 인수, 막내 시누이를 모시고 오너라.”

정희가 보고자 하는 아이, 아버지께서 강력하게 추천해주신 한확 대감의 여식의 이름이 인수라고 했다. 가만히 ‘인수’를 되뇌었다.

“대부인 마님께서 저희 가문을 그리도 생각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급히 조 씨 부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부인, 너무나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오히려 저희가 간곡하게 바라는 바입니다.”
잡힌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이내 조 씨 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의 막내 시누이가 조금은 당돌한 구석이 있......”
“당돌하다니요?”

조 씨 부인이 순간 아차 하는 듯했다.

“일찍 어머님을 여의고 또 집안의 모든 귀여움을 받고 자라서 조금은 당찬 구석이 있답니다.”

계양군 부인이 대신 말을 받았다.

“부인께서는 별 걱정을 하십니다. 한확 대감님의 여식인데 어련하겠습니까?”
“그리 생각해주신다면 고마울 따름입니다.”

조 씨 부인의 이야기였다.
인수의 아버지 한확 대감과 그의 어머니 홍 씨 부인 또 큰며느리 조 씨 부인의 면면만을 보더라도 인수라는 아이에 대해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했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 거기에 더하여 여자로서의 덕목으로 무장한 홍 씨 부인의 여식, 나아가 자신의 또래인 듯 보이면서도 중후한 맛을 풍기고 있는 조 씨 부인, 정희가 흡족한 마음으로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큰 올케, 소녀 인수이옵니다.”

또랑또랑한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순간 두 목소리가 한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단지 세월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원래는 하나의 목소리였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이상한 느낌이 찾아왔다. 자신이 선을 보고자 찾아온 것이 아니라 선을 뵈려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주객이 전도 된 느낌이었다.

정희와 어머니의 시선이 방문으로 집중 되어졌다. 잠시지만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다. 방문이 열리자 환한 기운이 절로 방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티 하나 없이 맑고 환한 얼굴이 방안으로, 정희의 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습만이 아니었다. 그 짧은 순간의 행동 하나 하나에 그야말로 절제된 절도가 배어있었다.

“수양대군 마님의 부인되시는 낙랑부대부인 마님이세요. 인사드리도록 하세요.”

조 씨 부인이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인수에게 큰 절 올리라는 주문을 주었다. 인수가 잠시 정희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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