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역사소설 - 女帝 정희왕후⑬

황천우 작가 / 기사승인 : 2013-07-10 16: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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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러면 운명이 그러하다고 치고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절을 하는 어린 인수의 모습이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어 보이는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정희의 혼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차마 그 모습을 바라보기 힘이 들었던지 고개를 어머니에게 돌렸다. 어머니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소저 인수라 하옵니다.”

예를 마친 아이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가까이 다가와 보겠느냐.”

오히려 정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사뿐히 몸을 일으킨 인수가 그렇게 사뿐하게 다가 앉았다. 자세히 인수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티 하나 없이 맑은 눈동자, 곧게 선 콧날, 앙다문 입술하며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어보였다.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인수의 모습을 어디선가 꼭 한 번은 보았음직했다.

운명

아침에 수양대군이 입궐하자마자 길례가 찾아왔다.

“대부인 마님......”

채 말을 끝맺지 못한 길례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감을 받았다. 아버지와 관련한 일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길례가 찾아온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어제 저녁 궁궐에서 돌아오시고는 바로 의식을 잃고 자리에 누우셨다는 전언과 함께 이제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는 어머니의 첨언도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듣자 자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서러움이 복 바치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눈물이 멈추기를 바랐지만 생각뿐이었다.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상황에서 서두르기 시작했다.

친정으로 향할 준비를 마친 정희가 청지기 임운을 불러 수양대군에게 기별을 고하라 하고는 먼저 길을 나섰다.

아버지와 며칠 전에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신의 생명이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았고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품고 있는 마음을 딸에게 반드시 이야기하고 가야겠다는 아버지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예야, 네 어머니에게 대략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아비에게 상세하게 말해줄 수 없겠니?”

물론 어머니를 물리고 단 둘이 하는 자리였다.

“모두 말씀드릴게요.”

자신이 점집을 다녀 온 경위 그리고 시어머니 소헌왕후에게서 들은 모든 이야기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상세히 말씀 드렸다. 정희 자신의 경우도 왕의 기운이 있다는 점괘 역시 감추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는 아버지의 표정에서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너와 네 남편 수양대군의 운명이 그렇다면 받아들여야지.”

그 말씀을 하시면서도 역시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아마도 아버지께서는 이미 정희가 이야기한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하고 계신 듯했다.

“아버지, 저에게 좀 알려주세요. 어떻게 해야 환란을 피해갈 수 있는지 말이에요.”
“애초부터 일이 잘못 되었어, 애초부터.”
“애초라고 하면요?”
“세종임금께서 현제의 왕세자를 세자로 삼는 일이 아니었어. 암, 그렇고말고. 그러니 환란은 이미 예고되어 있지.”

그래서 아버지는 운명이라고 말씀하신 모양이었다.

“아버지, 시어머니께서도 얼핏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요.”

아버지께서 잠시 사이를 두고 정희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예야, 한 나라의 임금 자리는 그냥 주워지는 자리가 아니란다. 그런 자리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니. 그런데 지금 세종임금님은 자신이 임금이 된 사연을 무시하고 있고 오로지 당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세자를 지명하셨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 힘에 겨운지 잠시 호흡을 고르셨다.

“설령 남의 손에 의해 임금으로 등극을 한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니. 임금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통솔할 힘이 없다면 그가 언제까지, 무슨 수로 임금에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겠어. 바로 시간의 문제지. 그런 의미에서 임금이라는 자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고 또 유지해야하는 고단한 자리야.”

“그러면 지금의 왕세자는 그런 의미에서 임금의 자질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임금이라는 자리의 문제다. 설령 지금의 왕세자가 세종임금의 후광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한들 그게 오래갈 것 같니. 거기에 더하여 세자의 건강 상태로 보아 그리 오래 살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야.”

아버지의 말씀이 서서히 시어머니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아니?”
아버지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해갔다.

“임금이 임금다워지지 않게 되니 그게 문제지. 정희야, 네 시조부인 태종임금의 경우를 생각 해 보거라.”

태종임금의 경우 수양대군만큼이나 야심이 크고 남자다운 남자였다. 그래서 수양대군을 태종임금에게 비유하고는 했었다.

“태종임금께서 왜 그리도 당신의 처가와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했는지 아니? 바로 왕의 권리 주장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후세의 임금들이 그 왕의 권위를 가지고 자기의 소신대로 일을 하라고 그리하신 거야.”

아버지의 말씀을 곱씹어 보았다. 태종임금이 자신의 부인인 원경왕후의 형제들을 모두 죽였고 심지어 세종임금의 비인 소헌왕후의 아버님까지 가차 없이 죽였다. 그 이면을 살펴보았다.

원경왕후의 형제들이 자꾸 왕권을 넘보고 있었다. 왕의 고유권한인 세자 책봉 문제까지 개입하고자 했다. 또한 소헌왕후의 아버지를 죽인 부분, 그 부분에도 그런 소지가 있었다는 판단 하에 일처리를 하신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두개의 사안이 별개가 아니었다. 바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왕의 권위의 문제였다.

“그러니 이제 세종임금이 돌아가시고 왕세자가 왕이 되고 하면 환란은 피할 수 없어. 왕과 왕의 주위에 포진해 있는 세력들, 또 그 세력들 간에도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작은 세력들 간에 한판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불가피 하지.”

아버지께서 다시 가벼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 전쟁이 멈추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혼돈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리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 세종임금의 판단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다. 특히 네 남편 수양대군을 보거라. 수양대군의 성정에 신하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겠다고 날뛴다고 하면 가만히 두고 볼 사람 같으니?”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정희와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다른 사람이, 특히 대신들이 자신의 권리를 빼앗고자 한다면 결코 회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연유로 아버지께서 운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그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장기적인 대책에 대해서 조언을 받아야 할 듯했다.

“아버지, 그러면 운명이 그러하다고 치고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희야, 그것이 너만의 문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꾸 너 혼자만의 일로 몰아가니 문제로구나.”

정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아버지의 지적에 어깨가 움칠거렸다.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정희 자신은 그 순간까지 그 모든 일이 자신의 몫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일이란, 특히 보위에 관한 일은 자신만의 일일 수 없었다. 자신의 편협함에 순간적인 부끄러움이 찾아들었다.

“정희야!”
“네, 아버지.”
“그렇게 막중한 일을 너 자신만의 일로 간주하는 그 생각이 너무 어설픈 면이 보이는구나. 수양대군과 너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을 바라 보거라. 유사시에 너희 부부와 명운을 함께 할 많은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보라는 이야기다. 거기에 더하여 한확 대감의 경우도.”

아버지께서 한확 대감을 거론하며 말을 끊으셨다. 그 부분을 생각해보라는 의미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를 가만히 새겨보았다. 정희 자신은 별개로 하더라도 수양대군과 정희를 둘러싸고 있는, 고려시대를 열 때 이 나라의 주축세력을 유지했던 파평 윤씨 문과 이 나라의 생성 초기부터 존재했던 유서 깊은 청주 한 문의 두 거대 문벌만으로도 커다란 후원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우리야 방법이 없다. 그리고 한확 대감 댁과 연이 맺어진다고 한다면 그 댁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 문제에 대해서 네가 그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울러 네 경우 좀 더 신중하고 사려 깊게 일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항상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야.”

정희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갔다.

“너무 심려하지 말거라. 네 남편 수양대군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일이 이 시대의 운명이라고 생각해 보거라. 그런데 현실이 자꾸 그 시대의 운명을 거슬러 가려고 한다고 말이야. 지금 이 조선 왕조를 보거라. 아직 기반이 확고하게 잡히지 않은 마당에 세종임금께서 너무 안일하게 판단하셨어. 그러니 환란이 일어난다고 하면 궁극적으로 누구의 책임이겠니. 아마도 훗날의 역사가들은 세종임금의 오판에 대해 준열하게 비판을 가하리란 생각이 드는구나.”

힘에 겨워서 점점 잦아드는 아버지의 말씀도 소헌왕후께서 하신 말씀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서방님 수양대군이 왕의 자리에 올라야함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운명이라고 말이다.

수양대군과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자신의 일처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일을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정희 자신만이 그 일에 있어 책임을 지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일이 잘못된다고 한다면 자신과 연을 맺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운명도 함께 한다는 사실을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서둘러 친정집에 도착하자 벌써 곡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아버지의 살아계신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벌써 임종을 하신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었다.

순간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 가득 차분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버지께서 정희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 눈물과 함께 아우러졌다.

혼사

저녁 늦게 궐에서 나온 수양대군이 내당으로 들어 정희와 자리를 마주했다. 오랜만에 내당으로 든 일도 그러려니와 얼굴 표정으로 보아 용무가 있는 듯했다. 그런 서방님의 얼굴을 미소를 머금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왜요, 대군. 박 씨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한번 은근하게 마음을 떠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박 씨를 후처로 들인 이후 덕중을 멀리하는 일은 좋았는데 한동안 그녀에게 빠져 얼굴 보기가 전과 같지 않았다.

“부인이 해주고서는......”
“제가 그 여자에게 빠져 지내라고 그랬나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양대군이 말을 하는 도중에 정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순간 정희가 농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너털웃음을 짓고는 정희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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