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곳에 도착하자 수양대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 아버지께서 부인에게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모두 물렸으니 한번 들어가 보구려.”
그리 말하는 서방님의 표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심려 마십시오, 대군.”
문가에 기립해있던 상궁이 문을 열자 안에 있던 내의원들이 정희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방을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세종임금에게 예를 올리고 가만히 자리를 잡았다.
“상왕 전하, 소저 낙랑부대부인입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목소리에 쇳소리가 심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니, 가래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목소리로 보아 마지막 혼신을 다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정희가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고개를 들어 세종임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며시 눈을 감고 있는 그 모습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었다. 아버지께서, 소헌왕후께서 운명을 달리하실 때의 그 모습, 아무런 사심이 없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그런 상태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이상하게 서러움이 받쳐 오르고 있었다.
“마마, 힘을 잃지 마십시오!”
세종임금의 감겨 있는 눈이 살며시 뜨이는 듯 보이다가 이내 실낱같은 한숨 소리가 조용한 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가슴이 덜컹거렸다. 정희도 한번 가느다랗게 심호흡을 하고 세종임금의 입을 바라보았다.
“이미 소헌왕후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것으로 알고 있다.”
바로 그 이야기였다. 소헌왕후께 들었던 차기 왕위 계승 문제, 그 문제에 대한 생각을 듣고자 정희를 찾았다.
“며늘아이야, 너의 생각은 어떠냐. 아마도 수양에게는 전혀 내색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마마!”
“우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도록하자.”
“마마, 운명을 믿고 계십니까!”
“운명이라.”
“네, 운명말입니다.”
“운명이라고 하면?”
“시대의 요구지요.”
“시대라.”
슬그머니 어금니를 깨물었다.
“현재의 조선 왕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바마마께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기셨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이 조선은 부족합니다. 따라서 굳건한 반석위에 올려놓아야하는 일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제왕의 자질이라 생각합니다.”
세종임금의 입에서 깊고 깊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면 그 적임자가 바로 수양과 며늘아이란 말이냐?”
“그 부분까지는 차마 답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운명이라면 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가슴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왜 일처리를 그리하셨습니까? 상왕 전하의 본심도 그것이 아닌 것을 어찌하여 저에게 그리도 커다란 짐을 떠넘기시려고 하십니까?’
“상왕 전하, 아니 아바마마......”
정희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야기 해 보거라.”
“그리 하겠습니다. 무엇이 진정 이 조선을 위하는 길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로 옳은 방식인지,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세종임금의 얼굴에서 살짝 경련이 일어났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손을 뻗어 세종임금의 손을 잡았다. 살아있는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나무토막처럼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상왕 전하, 편히 잠드시옵소서. 남아 있는 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길을 가십시오.’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정희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기를 잠시 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문이 열리면서 수양대군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버지와 며느리의 기이한 행동에 잠시 머뭇하던 수양이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지 급히 세종임금에게 다가서서 진맥을 잡아보았다. 맥박소리가 희미하게 잦아들고 있었다.
수양이 정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다가 몸을 그대로 수양에게 기울였다. 흐느적거리는 정희를 부축하고 나서면서 수양이 내의원들을 불러 자리를 지키라 하고는 밖으로 나가 며느리에게 정희를 인계했다.
“어머니!”
정희를 부축한 인수가 간절하게 시어머니를 불렀다. 천천히 기운을 차리며 자세를 바로하고 인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또 다른 정희의 모습이 그 얼굴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굴욕
세종임금이 돌아가시고 왕세자가 보위에 올랐다. 보위에 오른 시기는 세종임금께서 돌아가신 연후지만 이미 전부터 왕세자가 실질적인 왕의 위치에서 일처리를 했었다. 세종임금은 오래전에 상왕으로 물러나고 왕세자의 신분이면서 임금의 역할을 하고 있던 터였다.
왕세자가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자 그동안 세종임금으로 인해 숨을 죽이고 있던 신하들이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오래 동안 태종임금, 세종임금의 위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던 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런 요인에는 문종임금의 건강과 심적으로 유약함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일방으로 치우친 왕권에 대한 신권을 주장하기 위해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수순은 정해져있었다. 바로 왕을 향해 치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특히 있으나 마나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문종 임금은 그들의 목적이 아니었다. 바로 수양대군이 그들의 경계대상이었다.
왕과 지근거리에 있는 왕족, 특히 수양대군을 경계하면서 서서히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왕명을 빙자해서 노골적으로 수양대군을 경계하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경쟁에서 밀어내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었다. 점괘를 떠나서라도 막 기승을 부리는 세력에는 대적을 하지 않는 것이 방편이었고 또한 수양 쪽에서 그만한 기반이 갖추어 있지 않았다.
정희가 수양대군에게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위세에 절대로 맞서지 말고 잠시 동안 성정을 누그러뜨리고 지낼 것을 당부했다. 결코 동요하지 말고 지금은 때가 아님을 암시하고 바짝 엎드려 지낼 것을 당부했고 그를 새겨들은 수양대군 또한 고난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니, 소저 인수옵니다.”
“어서 들어오거라.”
방으로 들어서는 인수의 표정이 분을 삭이지 못하겠다는 듯 상기되어 있었다.
“밖이 아직도 소란스러우냐!”
“이제는 조용합니다. 모두들 물러가고 없어요.”
“그들이 누구라고 하더냐?”
“대부분 김종서 대감 집 하인들이라고 합니다.”
정희의 얼굴위로 가소롭다는 듯이 차가운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음대로 까불어들 보라지!”
“어머니, 언제까지 이렇게 참고만 계실 것입니까?”
“언제까지라.”
말을 끝맺지 않고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순임을 불렀다.
“임운을 불러 궁궐에 들어갈 차비를 준비하라고,”
말을 하던 중에 인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다, 그냥 놔 두어라.”
인수의 반짝거리는 눈이 정희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냥 내가 내처 갈 것이야!”
인수와 순임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장롱 깊숙한 곳에서 조그마한 함을 꺼냈다. 그리고는 비단으로 소중하게 싸서 인수에게 건넸다.
“가자!”
인수가 멀뚱하게 시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궁궐로 들어가자!”
“마님, 차비는......”
“되었다. 내 그냥 걸어갈 것이야!”
정희의 얼굴위로 다시 살기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본 인수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대문을 열고 저자 거리로 나서자 순임과 임운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달라붙었다.
“며느리와 단둘이 행차할 터이니 그리 알고 있도록 하게나.”
“마님!”
순임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정희를 바라보았다.
“나서지 말라고 하는데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느냐!”
“어머님 말씀을 따르도록 하세요!”
인수의 말에 임운과 순임이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정희가 그들에게 애써 미소를 보여주고는 휑하니 길을 잡았다.
저자거리에 나서자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 둘의 모습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고는 했다.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면서 걸어가기를 잠시 후 누군가의 입에서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 튀어나왔다.
“혹시 수양대군 안사람 아닌가!”
그 말이 신호였는지 모두의 시선이 정희와 인수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멍청한 대군의 안사람이란 말인가!”
“김종서 대감의 신하인 그 수양말인가!”
그와 동시에 주위가 웃음바다로 변했고 혹자는 가래침을 뱉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런 발칙한 것이 있나!”
인수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군중에게 나서고자 하자 급하게 제동을 걸었다.
“이 수모를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일이야!”
정희의 제지에 인수가 어금니를 깨물며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정희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명례궁에서 경복궁까지 가는 길이 그리 멀지 않은 길이건만 너무나 멀게 느껴졌고 궁궐에 가까이 이르자 뒤를 따르던 무리들이 멀어져갔다. 그들이 고개를 돌리며 가래침을 뱉는 일을 잊지 않았다.
“어머니, 그런데 궁궐에서 누구를 만나려 하시는지요?”
“혜빈을 만나서 목숨을 구걸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혜빈 마마를 말이에요?”
“혜빈이 지금 궁궐에서 가장 영향력이 막강하고 김종서 대감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만나서 목숨을 구걸해 볼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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