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부친과 삼형제도 독립운동에 참여

그 후 6.25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린 이 나라에 가난과 서러움을 안고 태어나, 소위 양색시가 된 이민자들의 공로로 무척 크다. 말도 안 통하는 남편을 따라 물설고 낯선 이국 만리까지 가서 가난한 친정과 동생들을 살려보자는 일념으로 그 많은 서러움을 안고, 시골의 모든 식구들까지 초청한 국제 결혼한 사람들의 희생도 높이 평가 되어야 한다.
또한 독일의 뜨거운 땅속 1000미터를 뚫어야 하는 목숨을 건 광부들의 희생과, 소름끼치는 시체를 씻어야 하는 직업을 마다 않고 달러를 벌어 한국으로 보낸 선조 간호사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독일인들은 용감한 한국인 광부들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간호사들을 칭찬하는 글을 거의 매일 신문에 싣곤 하였다.
해외 독립운동가 중 많은 활동을 했던 강영소 선생은 1886년 2월 18일 평안남도 증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및 가정생활과 어린 시절은 문서로 소개가 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그가 18세가 되던 1905년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가 독립운동을 활발히 한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분의 부친과 삼형제도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가난해서 먹을거리도 없었던 그 옛날! 감리교 소속의 인천 내리교회(內里敎會) 교인들 102명이 1902년 12월 제물포를 떠나 그 이듬해 1월 3일 하와이 호놀룰루의 사탕수수밭에 도착하면서 우리의 이민 역사가 시작되었다.
청년기의 강영소는 하와이에 도착한 해인 1905년 5월 3일 정원명(鄭元明), 김성권(金成權), 윤병구(尹炳求), 이만춘(李萬春), 김규섭(金圭燮)등 10여명과 함께 한겨레가 서로 도와가며 이국땅에서 살자는 목적으로 '에와친목회'를 만들었다. 이는 하와이 오아후도(島) 에와농장에서 조직되었다 해서 이 친목회의 명칭을 에와친목회라고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이미 에와에는 이보다 앞서 1905년 4월 30일 한인예배당 헌당식이 있었는데, 이것이 오아후도에서는 최초로 한국인이 건축한 예배당이었다. 에와친목회는 이 한인예배당을 중심으로 2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이들의 사업목표는 항일독립운동을 최대의 사업으로 정하고 일본 화폐의 배척과 동족상합(同族相合)에 두었다.
1906년 5월 8일부터 에와친목회의 창립 1주년을 기념하여 속쇄판(速刷版)으로 ‘친목회보’를 발행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단체통일운동 후원에 큰 공헌이 있었는데 월보(月報) 형식으로 약 1년 정도 발행하였으며, 이는 문맹퇴치와 교민의 적극적인 단결만이 국권회복에 밑거름이 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1906년 12월 강영소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호놀룰루에서 공진회(共進會)도 결성하고, 1909년 1월 미주지역의 통일된 독립운동 단체로 국민회(國民會)를 결성하였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는 등 우리나라 국권은 기울어져만 갔다. 정미조약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예비조처로 체결한 7개 항목의 조약으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도 부른다. 이에 하와이의 대표적인 단체인 공진회, 자강회, 의성회, 국민동맹회 등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결성하게 된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는 190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용만, 이승만, 안창호 등에 의해 주도된 미국 내 재미한인교포 친목단체였다. 당시 미국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의 연합으로 창설되었던 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대동보국회와도 연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였다.
하와이 ‘국민회’의 총서기를 맡아 활동하던 강영소 선생은 1910년 10월 美 본토로 이주하여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미 본토로 이주한 후에도 강영소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서기, 샌프란시스코지방 대의원, 신한민보사 사무원 등을 역임하면서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로 일하였으며, 1916년에는 북미 국민총회장(北美 國民總會長)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강영소 선생은 1913년 안창호 선생과 함께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여 활동하는데, 안창호 선생님 주도 아래 강영소는 경기도 홍언(洪焉), 강원도 염만석(廉萬石), 충청도 조병옥(趙炳玉), 황해도 민찬호(閔燦鎬), 경상도 송종익(宋鍾翊), 평안도 강영소, 함경도 김종림(金宗林), 전라도 정원도(鄭源道) 등의 8도 대표 25명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자신의 집에서 흥사단을 창립하게 된다.
흥사단이란, 사회교육·국민훈련 기관으로,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수양단체였으며,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 지부를 설립하여 항일 운동 및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한 단체였다. 그들의 원래 목표는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기본적인 민족부흥운동으로의 발전이었다. 첨언하면, 흥사단의 전신은 1909년 2월 국내에서 창립된 청년학우회이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독립운동의 연락과 행동 통일을 위해 강영소와 황사용을 하와이에 파견하였다. 하와이에서의 특파 활동을 마친 강영소는 다시 미 본토로 돌아와 북미지방총회장으로서의 미주지역 한인사회를 헌신하였다. 이 같은 강영소의 애국적인 활동과 동포사회를 위한 노력에 대해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22년 1월 '국민회 훈장'을 수여한바 있다.
이후 강영소는 시카고 지방으로 이거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1934년 8월 별세하였다. 국가보훈처는 2011년 제92주년 3?1절을 맞아 미주지역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등으로 활약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강영소 선생에게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부친 강명화 선생도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간부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자금을 지원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남동생 강영문과 강영각도 2012년과 1997년에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과 건국포상을 받아, 아버지와 3형제 4부자가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는 영예를 가졌다.
해외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쏟은 땀과 피 눈물 때문에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더욱 뜻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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