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 역사장편소설 女帝 정희왕후 ⑱

황천우 작가 / 기사승인 : 2013-08-20 0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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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목을 나에게 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시누이에게 이야기는 하고 있으나 정희에게 하는 소리였다. 인수가 자신의 올케의 마음을 확실하게 읽은 듯했다.

“아버님께서 어떻게 일처리하신다고 하세요?”

정희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며느리를 만류하는 행동을 취했다. 그러나 인수가 시어머니의 본심을 알고 있었고 조 씨 부인 역시 정희의 마음을 읽은 모양이었다.

“아버님께서 고모님들에게 편지를 쓰시기로 하셨어요. 아울러 고모들과 구면인 사람을 이번 사은사 행렬에 동행하도록 할 것이고 말이에요. 그러니 모든 일은 아버님에게 맡겨두어도 될 듯합니다. 그리고......”

그를 놓칠 인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뭐예요?”

조 씨 부인이 정희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시누이는 이 일이 시누이만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즉 수양대군과 정희 가족의 일만은 아님을 그리 이야기 했다. 자신의, 한확대감 집안 전체의 일도 될 수 있음을 돌려서 이야기했다. 정희가 가만히 조 씨 부인의 손을 잡았다.

“부인, 정말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대부인. 어차피 저희 시누이도 그렇거니와 저희 집안의 명운도 걸려있는 만큼 저희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는 취해야지요.”
“속 시원하게 아버님께서 어떻게 조취를 취할지 귀띔이라도 해주세요. 그래야 저나 시어머님이나 궁금해 하지 않지요.”

조 씨 부인이 잠시 시선을 문가로 주었다.

“대군 마님의 일정에 따라 명나라의 주요한 사람이 함께 동행 하도록 하셨어요. 그래서 유사시에 그 분으로 하여금 전면에 나서도록 조처를 취하셨지요.”

정희의 머리가 맑아지고 있었다. 현 조정에서, 명나라를 끔찍이도 생각하는 왕족이나 조정 대신들이 명나라의 고관을 상대로 다시 말해 명나라를 상대로 모험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미 그 부분에 대해 사돈어른께서 훤히 꿰뚫고 있었고 그에 조처를 강구하셨다. 정희가 다시 한 번 조 씨 부인의 손을 잡았다.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챈 조 씨 부인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대부인 마님, 어차피 저희 집안도 대군 마님의 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대부인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고 차근히 일을 진행시키세요.”
“물론입니다, 부인. 그리고 며늘아이도 친정댁의 이러한 고마움을 절대로 잊어서는 아니 된다.”
“네, 어머니.”

다소곳이 대답을 한 인수가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차를 그리고 다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우리 시누이가 대부인 마님과 대군마님께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간 일전에 이야기했던,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 당돌한 구석이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 정희가 그 이야기를 생각하며 대답 대신 인수를 바라보았다.

“부인, 이런 말씀드리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우리 며느리를 보면 마치 지난날의 제 모습을 바라보는 그런 느낌이 드는군요.”
“저도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제 생각도 바로 그러하옵니다.”

형부의 동행

저녁이 다 되어 여염집의 아낙처럼 수수한 복장을 갖추고 임운을 찾자 인수가 다가섰다.

“며늘아이는 그냥 집에 있거라, 내 임서방과 둘이 다녀올 참이야.”
“어머니, 어디를 가시려는지요.”
“친정엘 좀 다녀오려 한다.”
“친정에요?”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나 해보고 싶구나.”

작금에 진행되고 있는 시아버지의 사은사 문제로 친정을 방문하고자 함임을 짐작했는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 순간 부름을 받은 임운이 다가서고 있었다.

“마님, 채비를 놓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느니라.”
“하옵시면......”
“그냥 둘이서 다정하게 길을 나설 일이야.”

그 말을 들은 임운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이 발개지면서 호흡까지 가빠지고 있었다.

“임서방이 평소에 나에게 흑심을 품고 있으렷다.”

정희의 말에 임운이 기겁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마님, 행여라도 대군마님 계시는데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소인 목은 그 순간에 날아갈 것입니다.”

옆에 있던 인수가 슬며시 웃었다.

“어머님과 즐겁게 산보하고 오도록 하세요. 아버님께는 제가 잘 말씀 드릴 테니까요.”
“두 분 마님, 너무 심하십니다. 차라리 소인더러 죽으라고 하십시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인수에게 미소를 보냈다.

“내 다녀오마. 임서방은 어서 길을 잡으시게.”

임운이 어정쩡한 자세로 길을 잡자 정희가 바싹 다가섰다.

“같이 사이좋게 산책하자니까.”
“마님,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어깨를 같이 하지는 못하지요. 남들 눈이 있지 않습니까.”
“뭣이라, 부부사이라!”

말을 마친 정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큰소리로 웃었다. 그리고는 아차 싶었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정희와 임운에게 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을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임운에게 눈을 돌렸다.

임운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눈을 부라리다가 얼른 표정을 바꾸며 정희를 향해 눈을 찡끗거렸다. 부부사이인 만큼 저만큼 뒤에 서서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장난이 지나쳤던지 임운에게 한 방 맞은 꼴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지라 걸음을 빨리해 임운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런데 우리는 부부사이가 아니렷다. 그러니 어깨를 나란히 해도 괜찮지 않은가.”

어깨가 떡 벌어지고 야무지게 생긴 임운이 당황했는지 순간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보시게, 임서방!”
“네, 마님.”

임운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이러면 남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닌가. 그러니 사이좋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세.”
“마님, 지금 이 모습이 남들에게 더 이상하게 보이지요. 차라리 제가 뒤에 서겠습니다.”

말을 마친 임운이 뒷걸음질 쳤다.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사이를 두고 뒤에 설 테니 자네가 앞장서도록 하게.”

결국 임운이 앞서고 한걸음 정도 뒤에서 정희가 임운을 따라 가는 형국이 되었다.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는가?”

임운이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마님, 부탁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그냥 하라 하시면 무엇이든 해야지요.”
“아니야, 내가 진정으로 자네에게 부탁하고자 하네.”

정희가 임운에게 다가서서는 임운의 손을 잡았다. 임운이 놀란 자라새끼가 목을 감추듯 기겁을 하고 손을 뿌리치려 하자 정희가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마님!”

임운이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이 행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임운이 다시 정희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보시게!”
“말씀하십시오, 마님.”

임운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네 목을 나에게 줄 수 있겠는가?”
“제 목이요!”
“그러네. 자네 목숨 말일세, 목숨!”

임운의 손에 땀이 차기 시작하자 우악스런 손을 잡고 있는 정희의 손에도 땀이 배기 시작했다.

“마님, 제 목숨은 이미 대군마님과 마님의 것이거늘 새삼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여하튼 이 손을 이만 놓아주십시오.”

떨리는 음성으로 정확하게 자신의 심경을 밝힌 임운이 진정인 듯했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슬며시 손을 놓았다.

“고맙네, 진정으로 고마워.”
“마님, 그런 말씀 다시는 하지 마십시오. 소인 대군마님과 마님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이 한 목숨 버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그렇다면 내 자네를 굳게 믿을 것이야. 그러면 길을 한계미 대감 댁으로 잡으시게.”
“한계미 대감 댁이라 하시면 마님의 언니 되시는 분 말씀이시옵니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마님!”
“말해보시게.”
“이 하찮은 목숨을 어디에 쓰시려 하시는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아무리 덧없는 인생이라 해도 죽을 때는 그 이유를 알아야겠지. 그런데 미안하지만 지금은 나도 아무런 대답을 해줄 수 없다네. 언제 어떻게 소용이 될지 모르니까 말이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저야 그저 마님과 대군마님께 필요가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이옵니다.”

가식 없는 임운의 말에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고맙네. 항시라도 대군 곁에 머물면서 대군의 손발이 되어주게.”
“소인, 마님 말씀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임운이 비장한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조용히 임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희 자신에게 인수가 있듯이 서방님에게도 인수와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했다. 아니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서방님이 겉으로는 호탕하고 당당한 사내대장부로 보이지만 일면으로는 한없이 여린 구석이 있었다.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슬그머니 꼬리를 말아버리는 묘한 습성이 있었다.

습성이라기보다 천성이었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일종의 한계였다. 그래서 유사시에 그 순간을 대신해 줄 누군가가 반드시 있어야 했고 조금은 냉정해보이지만 서방님과 자신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그림자처럼 따르는 임운이 제격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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