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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은 별개의 독립분류번호인 기독교 신자(42), 불교 신자(43), 천주교 신자(44) 부여하여 특별 감시 대상으로 지목하였다. | ||
[일요주간=소정현 기자] 해방 후에 김일성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은 기독교를 부정하는 반(反)종교주의 노선을 채택해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진영에서는 조선기독교연맹이 주도적으로 이 노선의 확장에 기여하였는데, 김일성의 외친족이자 신앙교육의 은사였던 강양욱이 조선기독교연맹의 중앙위원장이 되어 김일성의 反기독교 노선에 가장 활발하게 부역했다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 김일성 부모들은 ‘모두 기독교인’
당시 조선기독교연맹의 강압적인 활동으로 많은 목회자들이 신앙적 자유를 찾아 월남하게 되었으며, 북한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하는 신앙적 변절을 통해 살아남았다.
기독교 신앙 탄압에 절대성을 부여한 김일성 왕조의 뿌리가 기독교에서 근간한다는 것은 대미스터리이다. 신앙적 이력만 살펴보면 김일성의 가정은 한국의 초대교회에서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계보의 뿌리가 깊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부친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 사이에서 출생했다. 삼형제 중 장남인 김일성은 초등학교까지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며 비교적 신앙생활에 충실한 것으로 알려진다.
먼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기독교 신앙을 알아본다. 김형직은 1911년 평양에 있는 기독교 계열의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졸업한다. 당시 숭실학교는 미션스쿨로 기독교를 전파할 지도자 양성의 교육기관이었는데, 김형직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숭실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가 이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김형직은 1918년에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조선국민회는 평양 숭실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로 기독교계통의 애국계몽운동 전통에서 벗어나 무력항쟁 노선으로 전환한 민족운동단체였다.
김형직의 친구이자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한국의 농촌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배민수 목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우리는 항상 눈물로 기도하였다. 어떻게 조국을 해방시킬 것인가 하는 것만이 우리의 관심사이자 희망이었다.”며 김형직이 신실한 기독인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김일성의 모친 역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어머니 강반석은 평안남도 대동군 칠골에서 당시 창덕학교 교장이었던 강돈욱 장로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 '반석'은 성경에서 베드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반인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 이름이다.
이름만으로도 당시 그녀의 가정이 얼마나 신실한 기독교 가정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녀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여자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기독교 신자로 고향 칠골교회에서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던 그녀는 1908년 이웃마을에 살던 김형직과 결혼하여 만경대로 이주하게 된다.
강반석의 아버지 강돈욱은 장로였고, 강돈욱의 육촌동생인 강양욱은 목사로 해방직전까지 감리교인 평양 암정교회에서 목사로 활동했다. 김일성은 가족이 만주 무송으로 이주한 후에도 초등학교 5학년을 전후한 2년 동안은 평양에 사는 외할아버지 강돈욱의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때 외할아버지 강돈욱이 김일성에게 신앙교육을 시켰으며, 강양욱도 김일성에게 기독교 교육을 하면서 깊게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 기독교, 북한정권 최대악 간주
북한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관한 공산권의 3대 금기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의 머리는 공산당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교회의 머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둘째, 공산주의 사회가 급속도로 발달해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세계가 곧 도래한다. 따라서 예수의 재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언급해서도 안 된다.
셋째, 두 번째와 연관하여 요한계시록 강해를 금하고 있다. 계시록엔 이 세상은 끝이 나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종말론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공산정권 수립 초기 당시 헌법 제14조에서 모든 인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 거행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1972년에 개정된 헌법 제54조에도 모든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하여 형식적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묵인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완전 딴판이다.
북한에서의 기독교 탄압정책은 공산정권 수립 후 토지개혁을 통한 교회 재산의 전면적 몰수, 사상과 검토 사업을 포함하는 회유와 협박 및 신체상 억압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1960년대 초에는 김일성 통치의 확고한 근간이 된 주체사상(유일사상)의 체계가 확립되어 외형적으로 기독교는 소멸해 버렸다.
교회 사료가 밝히는 바에 의하면, 원래 해방 전 북쪽에는 일제 강점기의 극심한 신앙탄압에도 불구하고, 1230개의 교회와 30만 정도의 신도가 있었다 한다. 인구가 40만이었던 평양에만도 2만 명 정도의 기독교인과 70개에 달하는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괴뢰 정권 수립 후 교인들의 구심점은 뿔뿔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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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 지하교회 성도들이 수기로 쓴 성경 필사본! 북한의 선교는 북의 통치체제 고찰이 필수적이다. | ||
여기에서 과거에 종교를 가졌던 자를 별개의 독립분류번호인 기독교 신자(42), 불교 신자(43), 천주교 신자(44) 부여하여 특별 감시 대상으로 지목하였다. 이외에도 지속적인 북한의 종교 통제는 1946년 11월 28일 창설된 조선기독교도 연맹에서 관장하고 있는데, 이 조직의 의장을 평양 시장인 평양시 행정 위원장이 겸임함으로써 교회는 인민 정권의 직속 하에 있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에 북한의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심화시킨 유일사상을 기독교와 대치시키며, 그 이상으로 교리화 시켜 놓았다. 경제적으로 국영화가 완성된 1960년대초 주체사상이 확립되고, 1970년대에는 주체사상 이론을 실천적인 면으로 발전시킨 유일사상이 북한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1974년에는 유일사상 10원칙이 공포된다. 이중 핵심 개념을 도출하면, 위대한 사상 이론가인 김일성 동지 외에는 그 누구도 섬길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과 관점을 가져야 한다.(3원칙 1항)
위대한 수령의 사상을 자기의 뼈와 살 즉, 유일한 신념으로 만들어야 한다.(4원칙 2항) 이처럼 북한의 주체사상(유일사상)은 북한 동포들에게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되는 강한 배타성과 비타협성을 갖는다.
● 北 宣敎-중국 조선족이 지렛대
북한이 전 세계에서 기독교인을 가장 심하게 박해하는 나라로 평가된다. 미국 국제기독선교단체인 ‘오픈도어스’는 1월 8일 공개한 ‘2013 월드워치 리스트’에서 기독교 신자를 박해하는 것으로 평가한 50개 국가 가운데 북한이 1위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지구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살기 어려운 나라”라며 “얼마 남지 않은 공산국가 가운데 하나인 북한은 어떤 종류의 종교도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기독교인이 체포와 구금, 고문을 당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공개 처형 대상이 되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런 심각한 억압에도 약 40만-50만명으로 추산되는 기독교인들이 지하교회와 전도를 통해 그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이중 7만~10만 명은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북한 정권이 확실하게 붕되된다 할지라도 북한 선교의 앞날은 절대 낙관적이지 못하다. 더욱이 사상적으로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공산화된 사회주의국가 어느 나라에서도 단 한 사람의 기독교 선교사를 정식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부연하면 아직도 전 세계의 66%가 통제를 받고 있는 사회 속에 살고 있으며, 국가의 정치적 목적이나 자국의 종교적 가치 때문에 전도자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지역의 인구가 31억으로 증대된 실정이다.
다만 변화가 있다면, 최근 기독교에 대한 적대 관계에 있어서 긴장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 자유진영에서 수행해야할 책무는 비록 통제와 제한된 종교 활동 여건 하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고수하려고 분투하고 있는 이들에게 효율적인 선교지원의 문제가 급선무라 할 수 있다.
특히 북한 기독교 선교에 대비하여 북한 공산주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신학적 탐구에서부터 교회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연구가 대중화되어 구체적인 선교 방법론이 합의되어야 한다. 이에 병행해서 북한의 정치체제와 매스컴의 독재체제 및 북한 주민의 문화적인 특징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이와 연관하여 북한을 중점으로 하여 구체적인 선교 전략에 대해 파악해 보도록 한다. 아래의 내용은 공산권 사역자들과 전문가들의 입체적 진단을 청취한 것이다.
▼ 홍콩 중국 교회 연구센터(CCRC)의 창설자 죠나단 차오(Jonathan Chao)는 단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중국과 북한의 제반 여건은 시기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요인들이 있다. 역사적 실례를 살펴보아도 초기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1882년 중국의 산동 미션에서 선교사 장밀이라는 사람이 복음을 유입시킨 이래 평양에서 활성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북한 상황은 개혁의 전초시기인 1972∼76년의 중국 정세와 흡사한 면이 있다. 따라서 한말과 일제시대에 만주를 위시, 중국지역으로 이주한 200만 명의 조선족에게 지속적 선교전략이 체계화되면 의외로 북한 선교의 문은 용이해질 수 있다. 그래도 중국과 북한의 왕래가 그 어느 나라 국민보다 가장 자유롭기 때문이다.
▼ 공산권 특수선교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열린 문’(open doors) 선교부의 창시자인 '브라더 앤드류'(Brother Andrew)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직업과 함께 복음을 심을 때 많이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현재도 중국 당국은 자국의 현대화 정책에 기여할 수 있는 화교 기술자들을 최상의 예우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개방되면 누구보다도 자국의 개혁에 핵심적인 기술자들을 선교 사명의식을 갖고 대대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벌써 30년 전인 1987년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우리는 북한 북부지역의 24개 마을의 상당수가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에 크게 놀랐고, 북송 재일 교포에 의해 희미하게나마 기독교 명맥이 유지된다는 사실에 무척 고무되었습니다.
또한 한정적이긴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과 북한 주민들은 하루 평균 1백여 명의 왕래가 있으며, 암거래에 의한 교역도 실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선교적 측면에서도 북한 인접 지역의 중국의 조선족은 북한을 포위할 수 있는 거대한 선교적 동력원이므로 이들에 대한 제반 관심을 공유해야 합니다.
● 유일사상에 침투한 '기독교 思想'
김일성 자신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북한체제에 기독교적인 성격의 통치체제가 변형된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한의 수령제와 유일체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김일성 중심의 유일지도체계로 전환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북한체제 내에 자리 잡고 있는 기독교적 연관성을 조명하는 것은 북한의 체제를 이해하고, 더 북한의 선교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과정이다.
우리에게 무척 주목을 끄는 다음의 항목을 깊이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전적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종교라 함은 초월적 존재로 믿어지는 신과 그를 경배하는 의식과 사제, 그리고 신앙 공동체의 토대가 되는 교단 등의 요소가 복합되어, 인간 내적 욕구를 관조하고 해결하는 정신문화로 서술된다. 그런데, 위의 주체사상(유일사상)이 외형상 기독교 교리와 유사점이 있어 관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적 새 인간의 창조는 얼핏 구원(중생)과 흡사한 측면이 있으며, 주체사상과 김일성은 각각 성경 교리와 그리스도에 유사하게 대비된다. 민중집회에서의 비판과 토론은 예배와 교제에 해당되며, 당(당원 양성)은 교단과 비교된다.
북한 주민들이 성지순례 하듯 이른바 만경대 학습을 의무적으로 받는 것과 김일성이 어린 시절 전쟁놀이를 했다는 군함 바위 등 김일성의 사적지는 예루살렘 및 성경유적지와 유사한 면이 있다.
또한 북한에는 그들이 스스로 反종교혁명주의라 칭하는 성황당이라는 연극이 있다. 이 연극은 1986년까지 계속해서 1,500여회를 상연했다고 보도된다. 그 연극의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구상에는 160여 나라에 50억 가까운 인구가 있지만 종교와 미신이 완전히 없어진 나라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뿐이다."
다른 사상이 침투할 틈이 전무하여 사상의 혼탁 같은 것은 일절 존재하지 않으며,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벗겨 내면 그 심성은 지극히 원시적인 순수 상태로 남게 된 즉, 백지와 같고 옥토와 같은 저들의 마음속에 기독교의 본질을 심기가 무척 용이하리라는 낙관적 전망 또한 우세한 편이다.
만일 북한에 개방, 복음 전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어 위의 특성을 적절히 고려하여 역으로 주지시키는 선교활동을 편다면, 의외로 복음을 용이하게 전파할 수 있는 상황도 충분히 예견된다 하겠다. 따라서 두려움을 단호히 떨쳐 버리고 어느 계층이든(학생·사업가·외교관) 직접 침투(penetration) 해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 국가발전에 위태롭지 않다는 확신
종교가 국가발전 모델에 절대 위태롭지 않다고 하는 전세계의 발전 모델을 북한 당국에게 꾸준한 인내로 알려주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북한 기독교 상황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이다. 현재 우리나라만도 공산권 선교모임이 21개나 되고 있지만 그 역할과 기능은 미미한 편이다.
일례로 1960년대에 시작된 홍콩의 중국교회연구소는 모든 자료가 컴퓨터를 이용할 만큼 축적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연구원도 25명이나 되는 국제적인 규모로 알려지고 있다. 공산당의 교회에 대한 비밀문서까지 입수해서 분석하고 있다.
북한의 문호가 개방되어 개인에까지 허용되는 단계에 이르면, 제일 먼저 북녘의 땅으로 상경할 사람들은 당연히 세 그룹의 유형이 선두에 서게 된다.
첫 번째는 실향민으로서 반백년 동안 잃어버렸던 땅,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밟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할 것이다. 두 번째는 상공인들이 풍부한 지하자원과 노동력이 있는 우리 민족의 땅인 북한에 들어가서 많은 사업 계획을 추진할 것이다. 세 번째는 순교적 자세로 무장할 사역자들이 북녘 땅을 찾을 것이라는 점이다.
공산권 선교회에서 발간한 조그마한 세계지도 카드에는 지구촌의 기독교 전파 현황이 그려져 있는데, 아직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지역으로는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와 소련과 중국의 일부 지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녘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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