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 역사장편소설 女帝 정희왕후 (23)

황천우 작가 / 기사승인 : 2013-10-10 01:5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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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 지금이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아무 생각 마시고 오로지 일을 이룰 생각만 하세요!”
수양이 자리에 앉자마자 무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수가 당황스러운지 바로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대군께 보고 들은 그대로 전하도록 할 것이야!”

정희가 은근하면서도 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무수가 몸 사래를 한번 치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근자에 들어서 안평대군의 사저에 조정의 대신들이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고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어본 바 10월 하순에 거사를 일으키고자 한다.’

“10월 하순에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대군 마님.”

답을 하고 있는 무수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이 놈들이 죽지 못해서 환장했군!”

뒤에 선 홍윤성이 예의 걸쭉한 소리로 눈에 불을 튀겼다. 한명회의 가느다란 눈썹이 한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갑주

점괘에 따른 시각, 마침내 10월 10일이 밝아왔다. 여느 날보다 일찍 일어나 곁에서 자고 있는 수양대군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날이 어두웠다.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가 집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잠시 후 중문을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무나 조용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하인들도 아직 잠 속에 빠져 있는 듯했다.

대문으로 가서 가만히 문기둥을 만져보았다. 서리가 내렸는지 차가운 기운이 감지되었다. 고개를 돌려 집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집안이 너무나 고요했다.

마당을 가로질러 내당의 뒤뜰로 들어서자 한쪽에서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가만히 그곳으로 움직였다. 희미한 물체가 머리를 숙이고 손바닥을 비비면서 뭔가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발소리를 죽여 가며 가까이 다가갔다.

며느리 인수가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너무나 경건하게 기도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자 코끝이 찡해왔다. 철저하게 숨은 일꾼으로서 오늘을 있게 한, 정희에게는 가장 가까운 아군이자 자신의 며느리였다.

며느리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 말을 건네는 일조차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정희 자신도 기도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이 마침내 결심했다. 양녕 백부 등의 종친과 소외당하고 있는 일부 대신들과 힘을 합쳐 농락당하고 있는 사직을 바로 세우고 태조대왕께서 조선을 건국하신 왕도정치를 복원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나이 어린 임금의 주위에서 그를 현혹하고 있는 무리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지난밤에 거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랑채에 모여 최종점검을 마쳤다.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아니 될 터였다. 실패는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그런 연유로 거사를 실행함에 있어서 제거해야할 사람들의 명단까지도 미리 작성해두었고 차후의 문제까지도 세세하게 계획을 세웠다.

“어머님!”

며느리가 정희의 존재를 알아챘다. 그 소리에 가만히 고개를 들어 인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며느리의 담담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네가 너무 심려가 크구나.”

인수를 며느리로 맞은 이후 정희는 인수가 잠자리에 들어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항상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보다 먼저 일어났고 또 모두가 잠자리에 들면 그제야 하루를 마감하고는 했다.

자신에게 철저하게 엄격했고 시부모 또 자신의 서방님에게 열과 성을 다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다.

“어머님, 송구하옵니다.”
“내가 진짜로 복이 많은 여자야. 이런 며느리를, 아니 내 딸이라고 해도 이만 못하지......”
“어머님!”
“그래, 우리 이제 조용히 기다려보자꾸나. 신령님이, 부처님이 반드시 우리의 뜻을 헤아리시고 좋은 결과를 주실 것이야.”
“그래요, 어머님.”

며느리와 어깨를 같이 하고 앞뜰로 와서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곤하게 자고 있는 수양대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만히 갑주를 쓰다듬었다. 지난 저녁 수양대군의 갑주를 손질하고 치워두지 않았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사내들이 하나 둘 씩 명례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희가 대문가에서 일일이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아들 장은 그들을 사랑채로 안내하고 있었다. 며느리 인수는 순임만을 대동하고 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정희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 조정에 밀고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다른 하인들은 일찌감치 자신들의 거처로 들어가게 하고 금족령을 내렸기에 모든 일을 아들 내외와 청지기 임운 그리고 순임과 처리하고 있었다.

권람, 한명회, 홍윤성, 홍달손, 양정 등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는 그들의 얼굴에 비장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얼추 모두가 도착했음을 감지한 정희가 대문 밖으로 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경복궁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고요했다. 고개를 돌려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는 아들 장으로 하여금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게 하고 며느리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 부엌으로 이동했다.

“음식은 모자라지 않았느냐?”
“네, 어머니. 그런데 술이 조금 부족한 듯해요.”
“되었다. 술은 나중에 일이 끝난 연후에 마시게 하고 이제 그만 올리도록 하거라.”

술을 마시다 보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몰랐다. 거사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후의 일도 그만큼 중요했다. 행여나 술에 취해서 일시적인 안도감에 사로잡히면 모든 일이 헛것이 될 수도 있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 될 때까지 맨 정신을 유지하고 있어야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뒤를 부탁하고 잠시 방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건만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자 정희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막상 담담하게 그 순간을 맞이하리라 다짐을 하고 또 했건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가슴이 자꾸 미어져오고 또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순간 아스라이 인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거사 시간을 알리는 인종소리였다. 그 소리가 들려오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도 요동을 치던 가슴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담담하게 변해갔다. 마지막 인종 소리가 끝났을 때에는 그냥 평상시의 상태로 돌아갔다.

가만히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당연히 감지되어야 할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불안한 생각이 들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중문으로 향했다. 중문 가까이에 이르자 아들 내외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왜들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냐?”
“어머님, 잘 오셨어요. 방금 전에 한 분이 들어와서는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 해서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며느리 인수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잘못되어 가다니!”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늘 거사에 대해 다른 대신들이 눈치를 챘다는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에요.”
“눈치를 채!”

급하게 말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서 갑주를 들고 중문으로 나섰다. 중문을 나서자 수양대군과 장졸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장아, 어서 네 아버지를 부르거라!”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아들 장이 급히 무리 중간에 있는 수양대군을 불러냈다. 정희가 의아해하면서 다가오는 수양대군에게 갑주를 건넸다.

“대군, 왜 머뭇거리십니까!”

얼떨결에 갑주를 잡아 든 수양대군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지금 수하 한 사람이 와서...... 우리의 거사 계획이 발설되었다고 해서 그 문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오.”
“대군, 누가 그리 약한 소리를 합니까! 거사 계획이 새나갔다면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한가히 자리를 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이 좋은 기회를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노릇입니까!”
“아버님, 기우이십니다. 정녕 저들이 거사 계획을 사전에 알아챘다면 이곳부터 치고 들어와야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며느리 인수가 거들었다. 수양의 시선이 정희, 아들 장, 며느리 인수의 얼굴을 오고갔다. 그리고는 지그시 어금니를 깨무는 듯 안면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정희가 수양대군의 손에 들려있는 갑주를 뺏어 들고 손수 수양에게 갑주를 입혀주기 시작했다.
그 동작에 인수가 합세했다.

“대군, 지금이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아무 생각 마시고 오로지 일을 이룰 생각만 하세요!”

정희의 목소리가 크게 갈려있었다. 수양 대군이 갑주를 입혀주고 있는 정희의 팔을 잡았다.

“부인, 내가 잠시 뭔가에 홀린 듯하오.”

갑주를 차려 입은 수양이 무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부터 행동을 개시하겠다. 이 시간 이후 절대 딴 소리는 허용하지 않겠다. 오로지 각본에 짜여있는 대로 그대로 행동하라!”

누군가가 어물쩍거리는 모양이었다. 즉각 수양의 불호령이 튀어나갔고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일사천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새 아들 장이 아버지의 검을 들고 나와 두 손으로 공손하게 수양에게 건넸다. 수양이 장의 모습 그리고 정희와 인수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순간 달빛이 칼날에 부딪쳐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청지기 임운은 어서 대군 마님을 모시도록 하라!”

정희의 추상같은 명령에 따라 집안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정난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막상 수양대군에게 갑주를 입혀 보내기는 했지만 일이 각본에 의한 대로 움직여 줄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청지기 임운만을 대동하고 김종서 대감댁으로 향한 수양대군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만에 하나 저들이 거사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다면 오히려 수양대군이 당할 터였다.

곁에 있는 아들, 장을 바라보았다. 집안의 건장한 하인들을 대동하고 현장을 찾아보라 할까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행여나 아군들이 장 일행을 적으로 오인해서 주살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이 어머니의 얼굴을 주시했다. 바로 어머니의 불안해하는 모습의 원인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장이 어머니의 만류를 물리치고 날랜 하인 둘을 대동하여 급히 대문을 빠져나갔다.

장이 밖으로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하인들이 소식을 전해오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전한 하인이 다시 장에게 합류하러 밖으로 나가고 또 다른 하인이 소식을 전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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