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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남기는 조선족의 대부로서 중국 전역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 ||
조남기는 문화대혁명으로 1968년부터 5년 동안 모든 관직에서 해임되었다가 1973년 길림성내 시(市) 단위인 퉁화군구(通化軍區) 정치위원(사단장급)으로 현역에 복귀할 때까지 세월이 가장 큰 시련기였다.
1976년 3월, 심양군구의 영도에 따라 연변에 ‘군관회’(軍管會)가 설립되면서 조남기는 부주임이 된다. 1977년 7월에는 길림성 군구의 정치부 주임이 된다. 이어 1978년 조남기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서기 겸 연변군분구(延邊軍分區) 제1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79년 7월 1일, 조남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으로 자리를 바꾼다. 새로운 사업이 또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조남기는 연변에서 세 번이나 사업한 연륜과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기에 연변의 상황을 손금 보듯 장악하고 있었다.
조남기는 연변의 경제가 하루속히 진보하려면 필히 현실에 입각하여 담대하게 개척하고 쇄신해야 한다며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지방자치조례부터 제정하여 법에 의거해 연변의 경제사회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1980년 봄부터 조남기는 ‘연변조선족자치주자치조례’를 초안한다. 길림성의 제6차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14차 회의는 이 조례를 승인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전국의 민족자치지역 가운데서 제일 처음으로 자치법을 세운 곳이 되었다. 또한 조남기는 ‘연변조선족자치주임업관리조례’를 제정한다.
1983년 3월, 조남기는 다시 연변을 떠나 길림성당위 부서기로, 그 후에는 길림성군구 정치위원(군단장급)으로 임명되면서 1985년 ‘인민해방군 총후근부 부장’으로 영전할 때까지 서기 직무를 맡으면서 동시에 길림성 전역의 농업까지 겸해 헌신하였다.
조남기가 농업에도 온갖 심혈에 박차를 가하는 사이 길림성의 농업은 획기적 발전을 가져왔다. 길림성을 농업 관련 전 부문 전국 1위로 끌어올렸는데, 전국에서 ‘양식 연간 증가폭 제1위’, ‘평균양식 점유량 제1위’ 등등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조례’ 입안 태평세월의 초석다져
두번이나 ‘총후근부장? 상장’…군개혁 깊은 인상남겨
정협 부주석 당시 삼림보호와 생태환경 개선에 혼신
조남기 혈육 ‘충북 창원군 거주’ 2000년에 금의환향
● 조남기 인생의 ‘최고 전성시대’ 만개
조남기는 67세 때인 1980년, 군수부문 총책임자인 해방군 총후근부장으로 다시 부활하여 인생의 절정기를 맞는다. 1957년 조남기는 이미 이 자리에 오른바 있다. 23년 전의 보직을 다시 맡게 된 것이다.
또한 조남기는 1955년에는 한국전에 참전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미 상장(上?)에 임명된바 있다. 조남기는 1988년 9월 14일, 인민해방군의 폐지된 계급제도가 부활했을 때 다시 상장에 임명됐다. 중국 인민해방군 사상 총후근부 부장과 상장에 2번이나 임명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출중한 역량과 함께 6.25 참전 당시 맺어진 끈끈한 인연이 큰 보탬이 되었다. 2006년 11월 20일 북경에서 세상을 떠난 훙쉐즈(洪學智) 중앙군사위원 겸 총후근부 부장과 조남기와 인연은 하나의 전설이다. 이 일련의 과정들을 소급하여 알아본다.
조남기가 군에서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은 훙쉐즈 장군의 각별한 총애 때문이기도 하다. 조남기의 상관인 훙쉐즈는 한국전 당시 인민지원군 사령부에서 참모로 일했던 조남기를 각별하게 챙겼다. 훙쉐즈는 야전군사령관을 맡고 싶다는 조남기의 간청을 물리치고 군수 전문가로 키웠다.
조남기가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의 손으로부터 훙 장군의 목숨을 구한 것은 중국 군부에서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훙 장군의 가족이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하자 훙장군의 두 아들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이들을 살리게 되었다는 비공식 후일담도 전해온다.
1985년, 3월 7일, 조남기는 총후근부의 부부장 겸 부정치위원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1987년은 조남기에게 인생에 또 하나의 분기점 이었다. 그해 10월 열리는 중국 공산당 제13기 전국대표대회를 계기로 대대적 군부 인사이동이 단행될 시점이었다. 훙쉐즈는 당시 총후근부 부장을 8년 동안 한 데다 나이가 74세의 고령이었다.
세대교체가 예고된 만큼, 훙쉐즈의 심복이었던 조남기는 해방군의 3대 요직인 총후근부장(군수사령관)의 유력한 승진후보였다. 훙쉐즈는 후임자로 조 장군을 적극 천거했다. 당시 소수민족에 군 주요 보직을 맡긴다는 이유로 주변의 질시가 많았으나 훙쉐즈는 이를 물리쳤다.
후일이지만 훙쉐즈는 총후근부장 자리를 물러난 이후 1990년 국정자문기구인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맡았다가 이 역시 1998년 조남기 상장에게 이 자리를 넘겨준 뒤 은퇴했다. 그만큼 조남기와 훙쉐즈는 각별한 인연을 넘어 험준한 산령을 넘는 생사고락의 일심일체 관계 그 이상 이었다.
그러나 조남기가 총후근부장 직책을 확정하기에 앞서 크나 큰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다.연변의 퇴직간부가 익명으로 중앙군사위원회에 '조남기는 자신의 동생이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것을 숨기는 등 그동안 한국의 간첩으로 일했다.'는 투서를 넣었다.
이 차제에 억울한 누명을 털어내는 것이 급선무인 것을 간파한 조남기는 서둘러 베이징으로 올라가 양상쿤(楊尙昆) 당시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찾아가 그동안 얽힌 가족사의 내력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조남기는 단순 구두해명으로는 불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중앙군사위원회에 한국 간첩 혐의에 대한 엄중한 조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중앙군사위 지시로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조사반이 장춘과 연길로 파견되어 철저한 내사 끝에 일혹일점의 의혹도 없다는 '무혐의 판정'을 이끌어냈다.
조남기는 익명 서신의 ‘간첩 혐의’ 풍파에서도 정신을 흩트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함으로써 그의 언행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조남기는 1987년 10월 북경에서 열린 공산당대표대회에서 양상쿤 부주석의 부름을 받고 총후근부 부장에 임명됐다.
조남기가 부장의 중책을 맡았을 때는 군사비용 지출이 가장 곤란한 때였다. 양상쿤 부주석은 군비가 이미 솥바닥을 드러냈다고 표현하였을 만큼 상황은 긴박하였다. 심사숙고 끝에 조남기는 전군에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한다.
조남기의 고강도 개혁의 강도와 범위 및 조치의 세밀함, 집중성은 군대의 후근부 역사상 교본으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조남기는 생활은 보장하고, 장비를 보장한다. 또한 기본건설규모는 축소하고, 각종 공비(公備) 지급도 축소하고, 사회집단구매력도 축소하는 ‘양보삼압’(兩保三壓)의 원칙을 밀어붙였다.
조남기는 특히 주둔환경이 어렵고 힘든 부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조남기는 신강(新疆)과 서장(티베트)의 두 군구 책임자를 특별히 찾아 부대의 부식품공급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토론했다. 조남기의 과감한 혁신에 부대생활은 스스로 보완하는 능력이 많이 향상되었고, 부식관리도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1991년 조남기는 군대주거시설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군의 퇴직간부가 군대 내에 거주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난제에 종지부를 찍게 한 조남기의 공로는 언제 어디서든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 ‘정협 부주석’으로 황혼을 아름답게
한국전에 참전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5년에 상장(上?)에 임명된 바 있는 조남기는 1988년 4월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됐다.
이어 조남기는 1988년 인민해방군의 폐지된 계급제도가 부활했을 때, 동년 9월 14일 33년 만에 인민해방군 상장으로 다시 임명됐는데, 당시 17명 고급 장성중에 유일한 소수민족 출신이었다.
1992년 10월 22일 조남기는 중국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 원장으로 부임하여 1995년까지 중책을 담당한다. 조남기는 과학연구인원들이 마음 놓고 편안하게 업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특히 과학연구 인원의 차량사용과 주거문제에 많은 힘을 쏟았다.
한편, 조남기는 1982년부터 1997년까지 3차례(제12기, 제13기, 제14기)나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중앙위원은 총서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 총리 등 수뇌부, 중앙 정부의 주요 부장(장관)급 간부, 성·직할시·자치구의 최고 지도자로 꾸려진 구성된 실질적 통치 엘리트 집단이다.
조남기는 1998년 3월 13일 제9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 제9기 1차 회의에서 부주석 중 한 명으로 선출됨으로써 72세의 노익장을 과시하였다. 정협부주석으로 당선된 후 조남기는 몸에 배인 심사숙고와 심층 조사연구를 거쳐 사업의 중점을 사막화를 퇴치하며 삼림을 보호하고 생태환경을 개선하는데 주 초점을 두었다.
1999년 조남기의 제의로 전국정협, 전국녹화위원회, 국가입업국, 국가라디오텔레비젼영화총국, 중국녹화기금회, 중화전국신문사업일군협회에서는 공동으로 ‘삼림을 관심하자’는 조직위원회를 설립하고 그가 친히 주임책임을 맡았다.
조남기는 새로운 역할을 또다시 시작한 것이다. 남방의 여러 성에서 주류생산을, 길림성에서는 생태농업을, 서북지방은 민족문제를, 산동에서는 농업산업화경영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조남기는 2003년 3월 공직에서 은퇴하였다. 2003년 전국정협 리서환주석은 조남기부주석을 “당신은 역사에 영원히 남을 아주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 공로를 높이 치하했다.
● ‘정협 부주석 자격’으로 금의환향
조남기는 정협 부주석 자격으로 2000년 4월 24일부터 5월 3일까지 열흘간 한국을 방문한바 있다. 조남기는 고향인 충북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를 방문해 마을 주민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12살이던 1938년에 독립운동가인 조부 조동식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간 뒤 62년 만의 금의환향이었다.
조부, 어머니, 맏형의 묘소에 차례로 참배한 조남기는 부친인 조용구 묘소도 이곳 선영으로 이장할 것이라고 밝힌바 있다.
조남기의 친인척 중에는 육사 18기생으로 기무사령관과 교육사령관 등을 지낸 조남풍 예비역 장성이 있다.
조남기의 동생 조남원은 1945년 해방 직후 세상을 떠나기 전에 고향의 품에 묻히겠다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조남원은 30년 이상 헤어진 가족들이 너무 그리워 애타게 찾기 시작했다.
동생 조남원은 1979년 12월, 동아일보 홍콩 특파원이 쓴 ‘조남기가 연변조선족 당서기로 있다.’는 기사를 접하였으며, 이듬해인 1980년 음력설 무렵에는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나와 형님 조남기를 찾기도 했다.
당시는 한중수교 이전이라 조남기 역시 이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신분의 민감성을 감안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원회와 길림성 당위원회에 상황을 보고하고는 일체 동생과의 연락을 취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동생과는 2000년 한국 방문 때 처음 만났다.
1987년 총후근부 부장 진급을 앞에 둔 시점에 조남기를 ‘한국 간첩’이라고 고발하는 투서가 날라든 것은 조남기 장군의 이러한 가족사와 연관된 것이다. 조남기는 한국의 두 번째 방문을 맞아 2004년 6월 8일 한양대에서 명예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 장군의 박사학위 수여는 한중 무역교류 증진, 중국 내 철강 및 제약산업을 비롯한 한민족 경제교류 발전협조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뤄졌다.
혁명사업의 제1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조남기는 87세의 고령인 오늘까지 여전히 여러 직책을 맡고 있다. 비록 직무가 변했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실사구시의 개척과 혁신의 정신으로 존경과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는 조남기! 그는 오늘도 아름다운 석양을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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