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품질경영' 선포, 이재용 체제 위한 대리전인가

박현군 / 기사승인 : 2013-11-14 13: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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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건희 新경영 20주년 진단(2)-신경영, 이병철 가신들과 전쟁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Newsis
이병철 ‘양적경영’…이건희 ‘질적 경영’…이재용 ‘품격경영’시대 도래


[일요주간=박현군 기사] 삼성그룹의 지난 20년에는 자랑스러운 순간과 잊혀지기만을 바라는 치욕적인 순간이 있다. 영광의 순간은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의 신경영 선언이다. 삼성그룹은 오늘날 초일류 삼성의 영광, 이건희 시대의 성공은 당시 신경영 선언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모든 이들이 대부분 공감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2008년 삼성비자금 관련 재판과 이건희 회장 일가의 퇴진은 삼성에게 있어서 치욕적인 순간이다. 두 사건은 삼성의 오너경영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닮은 꼴인 셈이다.

삼성그룹의 영화는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의 신경영 선언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삼성그룹은 지난달 신경영 2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신경영 선언은 문민정부의 군사독재 타도와 문민개혁 드라이브와 맞물려 크게 주목받았고 이건희호가 본격적으로 출항하게 됐다. 반면 이건희호의 위기와 어두움은 지난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진행된 삼성 비자금 사태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사건으로 인해 삼성그룹은 대한민국 내 공공의 적으로 치부되며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두 사건은 후계체제 확립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신경영 선언, 구세대 일소 위한 기획

삼성그룹은 오늘날 삼성전자 중심으로 세계 초일류 삼성그룹의 시작을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라고 설명한다. 삼성그룹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우리에게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이 말은 이 회장이 마누라인 홍라희 여사와 자식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을 제외한 모든 인사들과 삼성의 모든 시스템을 전면 개혁하겠다는 폭탄선언이기도 했다.

삼성그룹은 신경영 선언의 계기를 이 회장에게 동 월 전달된 비디오테이프라고 설명한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 5일 일본출장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는 도중 하네다 공항에서 비디오테이프를 전달받았다. 이 테이프는 이 회장의 지시에 의해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 내 사내방송팀에서 생산공장의 전 과정들을 몰래 촬영한 것이다.

이와 관련 이 회장은 당월 15일 프랑크푸르트 회의 도중 “오늘 아침 삼성전자의 불량을 담은 테이프를 보았습니다. 테이프 내용 자체가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위기의식을 가지라는 뜻에서 홍보팀을 시켜 구석구석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라고 해서 나온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 테이프 내용에는 삼성 세탁기 뚜껑 조립라인이 담겨져 있었다. 세탁기 뚜껑 여닫이 부분의 플라스틱 부품이 규격보다 약간 커서 조립에 문제가 생긴 장면이었다. 원래는 이같은 일이 발생할 경우 조립라인을 세운 후 해당 부품에 대해 오류를 수정하여 재설계를 하고 그에 맞춰서 금형을 다시 제작한 후 새로운 부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비디오테이프에는 현장 직원들이 손 칼을 사용해 눈대중으로 2mm쯤 깍은 후 조립해서 내보내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이건희 회장, 취임 후 첫 5년 동안 조용한 행보 보이며 내부 권력 투쟁
경영 복귀 후 이재용 부회장에 투쟁 과정 없이 오너십 물려주려는 모양새

프랑크푸르트 회의, 구세대 경영진 퇴진 촉구

그리고 이 회장이 삼성그룹에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가장 첫 번째 타킷은 이병철 세대와 함께 했던 구세대 경영진들이었다.

이 회장의 이같은 의중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진행한 회의 발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어떤 집단에 가 봐도 주체적으로 열심히 일해서 집단을 살리는 5%와 그냥 남의 공에 편승해서 거저먹는 5%가 있다. 어떤 부류가 출세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95%가 따라간다”, “인간은 65세 전후면 노망기가 든다. 절대 실무를 맡으면 안된다. 65세가 넘으면 젊은 경영자에게 넘기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나야 한다”, “과거 10년 간 한 인생이 얼마나 구차 치사하게 되어야 하는지 경험해 보았다”라는 발언을 했다.

이는 당시 고(故) 이병철 선대회장으로부터 임명받은 삼성그룹 사장단과 임원진들을 향해 ‘노망기’라는 모욕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노골적으로 물러나라고 말한 것이다. 이미 구세대 경영진의 구심점이었던 이병철 세대의 2인자 소병해 전 비서실장은 삼성생명 회장으로 발령해 그룹 경영에서 제외시킨 후였다.

그리고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는 이 회장의 선언 이후 첫 번째 희생자는 이수빈 당시 비서실장이었다.

이 비서실장은 이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연설에 대한 소감에 대해 “회장님 아직까지 양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질과 양은 동전의 앞뒤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이 말을 들은 이 회장은 티 스푼을 테이블 위에 내동댕에 친 후 벌떡 일어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것이 삼성 내에서 유명한 티스푼 사건이다.

당시 일각에서는 이 회장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나이 많은 창업공신과 노신들을 향해 ‘노망’이라고 말하는 등 극단적인 모욕을 주면서 물러나라고 해야 했을까에 대한 비판이 일부 제기된다.

그러나 당시 삼성그룹 상황에서 이 회장 체제가 확고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그 같은 극약 처방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회장은 이병철 회장이 사망하고 삼성그룹 회장직을 승계 받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그룹 경영에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사실상 무늬만 회장인 상태였다. 당시 그룹 계열사 사장과 경영진들은 모두 이병철 선대회장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이고 그들을 통해 그룹이 경영되어졌다.

그리고 사장단은 이 회장의 지시보다 소병해 회장 비서실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 회장이 질 경영, 미래에 대한 투자 등을 역설할 때는 그룹 경영진에 의해 “철모르는 생각”이라며 무시되기 일수였다.

2008년 4월 퇴임, 이학수 경질의 절호 기회

이 회장은 1993년 승부수를 던진다. 이병철 선대회장의 가신그룹을 모두 일소하고 그룹 경영권을 장악한다. 당시 소병해, 이수빈 등 쟁쟁한 경영진들이 모두 2선 퇴진 후 삼성을 떠났다. 그리고 이 회장은 이학수 당시 비서실 차장을 중심으로 세대교체를 통해 자신의 사람을 심기 시작했다.

이같은 점에서 2세대 삼성그룹 영광의 시작인 1993년은 삼성의 아킬레스 건인 2008년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2008년은 이 회장이 삼성그룹의 편법과 불법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난 해이다.

이 회장은 2008년 4월 22일 기자회견을 통해 삼성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삼성그룹 회장직을 반납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 사태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자신과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 이재용 전무 등이 동반퇴진한다고 선언했다.

이 회장은 삼성 내 모든 직함에서 아예 손은 뗀 채 대주주로만 남아있고 이학수 부회장은 삼성물산의 고문으로, 김인주 사장은 삼성카드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문직이란 결국 예우차원일 뿐 사실상 기업의 의사결정에 아무런 실권을 행사할 수 없는 직위이다. 그리고 당시 이재용 전무는 쫓겨 나는 형식으로 러시아 지사장으로 출국했다.

2010년 복귀, 이재용 걸림돌 제거

그리고 2010년 이 회장이 삼성전자 회장으로 경영일선에 다시 복귀하고 미래전략실을 신설하면서 삼성그룹 경영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8년 삼성 사태의 책임을 지고 동반 퇴진했던 인사들이 선별적으로 경영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재용 전무는 삼성전자에 복귀해 현재의 삼성전자 부회장으로까지 승진했다.

또 김인주 사장은 삼성카드 고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마지막으로 부여받은 삼성카드→삼성생명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 해소 임무를 완수한 공으로 삼성선물 사장으로 다시 복귀했지만 그룹 전체 경영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삼성그룹의 무소불위 2인자로 통했던 이학수 부회장은 2010년 그의 개인 회사인 L&B인베스트먼트와 L&B타워에 대한 실체가 드러나면서 삼성물산 고문을 끝으로 삼성그룹을 떠나야 했다.

사실 삼성그룹 이건희호 성공의 일등 공신은 이학수 전 삼성물산 고문이었다. 1998년 메모리 반도체 증설 등 이 회장이 간간히 던지는 승부수도 이학수 부회장이 삼성그룹 2인자로 중심을 제대로 잡아줬기에 가능한 측면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 회장도 자신의 개인 통장, 개인 인감, 개인 재산 등 일체를 이학수 부회장에게 맞기고 자신 명의로 보낼 격려사, 하례금 등도 알아서 명의 도용하도록 지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학수 전 고문은 포스트 이건희 체제의 삼성그룹 오너십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회장이 그룹 1987년부터 5년 간 소병해 비서실장으로 인해 그룹 경영에서 외면당했듯이 차기 삼성그룹 회장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리고 2010년 10월 신설된 미래전략실은 이건희 라인 중에서도 삼성그룹 내 이재용 라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재용 시대, 투쟁 통해 열어야

최근 이 회장은 품격경영을 강조했다.

지난달 신경영 20주년 기념식에서 이 회장은 “품격경영의 시대가 되야 한다”고 강조했다.

품격경영은 신경영 이후 이건희 체제의 핵심 원칙으로 자리매김한 질 경영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이는 자신의 사 후 삼성그룹의 경영기조에 대한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즉 이병철 시대는 양적경영의 시대라면 자신의 시대는 질적 경영의 시대였다. 그러나 자신의 사후 즉 이재용 시대에는 품격경영의 시대가 되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 당시 청년 이건희는 이병철 회장의 그늘, 즉 소병해라는 바윗돌을 스스로 거둬냈고 자신의 시대 경영철학과 이학수라는 경영 파트너를 스스로 찾아냈다. 이는 이병철 회장의 뜻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병철 회장이 이건희 시대를 제대로 열어주려면 소병해 비서실장과 가신그룹을 퇴진시켰어야 한다. 그리고 이 회장이 부회장의 직위로 후계자 수업을 받는 10년 동안 이건희 라인을 만들어 경영 일선에 포진시켜줬다면 이 회장은 첫 5년 동안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병철 선대 회장은 이건희 라인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 회장은 지난 5년 동안 조용한 행보를 보이며 내부 권력 투쟁을 벌였고 결국 5년 후부터 자신의 친정체제를 확립해 지금은 삼성의 확고한 주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이 회장은 자신이 투쟁해서 일군 모든 경영권과 권리를 이재용 부회장에게 투쟁의 과정 없이 물려주려고 하는 모양새다. 그리고 질경영이 아닌 3세대 경영철학인 품격경영도 이재용 부회장이 아닌 이 회장이 제시했고, 전자, 반도체 등 IT가 아닌 이재용 시대 미래 먹거리 산업도 이재용이 아닌 이건희 시대에서 찾아 물려주기 위한 노력을 진행 중이다.

이 회장과 오늘날 삼성의 성공이 이병철 선대회장의 냉혹한 후계자 교육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회장의 미래 삼성그룹에 대한 걱정이 이재용 시대의 기초체력 저하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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