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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라고 하면.”
“뿌린 사람이 거두어들여야지요.”
“내가 말이요?”
“아니지요. 바로 시아버지 세종임금이시지요.”
“아버지께서!”
“비록 전하의 손을 빌리지만 결국 아버님의 일이지요.”
“아버지라.”
서방님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빈 잔을 채우고는 한 번에 비워냈다. 얼굴이 독한 술기운 때문인지 고통의 모습이 진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인, 내 부인의 말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어찌 내 손으로 어린 조카를 내치라는 말이요.”
정희가 입만 댔다가 내려놓은 잔을 들어 한 번에 잔을 비워냈다. 그 모습을 서방님이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여기서 마침표를 찍도록 하십시오!”
수양에게서 가벼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하, 더 이상 피를 흘려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니 여기서 마침표를 찍으시라는 이야기입니다!”
한잔의 술 때문인지 정희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전하, 나이 어린 조카가 살아있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습니까! 그 많은 사건으로 인해 정작 전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에 제동이 걸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러려고 임금의 자리에 앉으셨습니까!”
술이 정희의 목을 열어놓은 듯했다. 거기에 더하여 눈물샘도 열어놓은 듯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서방님이 정희에게 다가앉아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 부인이 하라는 대로 하리다.”
“전하, 임금의 자리가 아무나 하는 자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누구나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리도 많은 피를 흘리고 보위에 오르겠습니까! 앞을 바라보아야지요. 이 나라의 내일을 바라보아야지요. 그런 차원에서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과거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입니다, 전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서방님의 팔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전하, 이제는 일을 하셔야합니다. 이 나라를 굳건하게 세워 놓으셔야합니다.”
목으로 들어간 술기운이 자꾸 밖으로 나가려고 입을 닫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분노의 칼
마지막 광풍이 지나가자 그 어느 때보다 평안했다. 정희에게 있어 이제는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을 보듬어 안는 일이 중요했고 그를 위해 궁궐과 산사를 오가며 부처님의 공덕에 지난 시간을 치유하는데 전념하고 있었다.
잠시 산사에서 궁궐로 돌아와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에 시동생인 임영대군과 조카 귀성군이 기별도 없이 찾아왔다.
“마마, 아니 형수님. 이놈, 아니 제 자식놈을 살려주십시오!”
내당에 들자마자 임영대군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대뜸 입을 열었다.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고 또 이준을 바라보았다. 귀성군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이 평화로운 시기에 무슨 일이기에......”
이준이 자신의 아버지 임영대군에게 고개를 돌렸다. 임영대군이 헛기침을 하고 가느다랗게 숨을 쉬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마, 소용 덕중이라고 아시지 않습니까!”
덕중이라는 말에 미간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왜요, 소용이!”
임영대군이 대답에 앞서 혀를 찼다.
“그 소용이 제 아들놈을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에요.”
“무엇이라고요!”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고 가만히 눈을 감으며 나무관세음보살을 되뇌었다. 임영대군과 귀성군의 얼굴 역시 다시 곤혹스럽게 변해갔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뜨고 귀성군에게 다가 앉았다.
“준아, 무슨 일인지 차근히 이야기해다오.”
이준이 답은 하지 않고 서찰을 내밀었다.
‘오매불망 사랑하는 임에게.’
순간 눈을 감았다. 그런데도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덕중,
사저에 있을 때 하인이었던 순임의 딸로서 서방님과 관계를 가지고 아이까지 낳았었던 여종이었다. 천하디 천한 여자였건만 순임을 생각해서 궁에 들어올 때 데리고 들어왔고 소용이란 직책까지 준 아이였다.
‘밤마다 대감 생각에 밤이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
언제까지고 기다릴게요, 덕중 올림.’
가만히 색기가 절절 흐르던 덕중의 모습을 떠올렸다.
“준아, 네가 네 죄를 알고 있으렸다.”
임영대군과 귀성군의 눈이 마주쳤다.
“준이 네가 남자답게 잘생긴 탓이니라. 그러니 그것이 너의 죄란 말이다.”
“형수님!”
“백모님!”
“너무 심려 마십시오. 이 문제는 제 손에서 처리할 테니까 아무 심려 마세요. 그리고 아무러면 전하께서 당신이 끔찍이 사랑하는 조카를 해하겠습니까?”
그 말에 귀성군이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아버지 임영대군을 바라보았다.
“형수님,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으니 문제지요.”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형수님이 그동안 궁궐을 떠나 산사를 오가셔서 궁궐의 사정을 잘 모르시나 본데...... 이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하면!”
“전에도 이런 일이 발생해서 전하께 주의를 받은 적이 있으니 하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 힘들 듯해서 그래서 이리 급하게 형수님을 찾아뵌 거 아닙니까!”
“전에도요!”
임영대군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께서 산사를 오가실 때에도 이런 일이 있어서 형님인 전하께 고하였었지요. 그리고 형님께서 제 아들놈을 끔찍이 생각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정희의 얼굴이 볼만했다.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쳐 죽일 년을 보았나! 이 년이 정녕 죽음으로써 복수를 하려는 겐가!”
정희의 생각으로는 복수였다. 서방님을 생각해서 덕중을 멀리하게 하려고 근빈을 들였다. 서방님이 정희의 의도대로 덕중을 기피하자 기어코 틈을 보다가 여의치 않자 죽음을 불사하고 정희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형수님, 그는 또 무슨 말씀입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일이 준의 일이 아니군요. 내가 형님인 전하께 그 여자를 멀리하라고 하자......지금 이 년이 나에게 복수하려고 작정한 듯해요!”
임영대군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천하디 천한 계집아이가 너무 색만 밝히고, 그예 서방님의 건강이 걱정되어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니까......”
“아니, 형수님.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이에요?”
“어허 참.”
허탈한 지 물끄러미 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결국 이 년이 전하와 이 백모가 가장 아끼는 준이를 목표로 삼고 겁 없이 덤벼들었던 게요!”
“벡모님!”
“준이는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아예 이번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일처리를 할 테니 말이야.”
“백모님, 고맙습니다.”
“아니다, 이 모든 일이 나에게 비롯되었으니 당연히 내가 처리해야지. 그러니 대군께서도 그리 알고 심려하지 마세요.”
임영대군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면 저희는 마마만 믿고 있겠습니다.”
“당연히 그리 하셔야지요.”
둘이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급히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지체할 수 없지요.”
말을 마친 정희가 최 상궁에게 급히 전하를 알현하겠노라고 고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전마마, 상감마마 듭시옵니다.”
순간 임영대군과 귀성군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갔다. 비록 종친이지만 내전에 남자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 될 소지가 있었다.
“나도 오랜만에 전하를 뵙니다. 우리 가족 간에 정을 한 번 나누어 봅시다.”
정희가 둘의 상태를 눈치 채고 부드럽게 말을 건네자 다소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서 수양을 맞을 수 없는 노릇인지라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문가로 다가섰다. 방에 들어선 세조가 둘의 모습을 보고는 멈칫했다.
“어, 아우와 조카가 이곳에......”
“어서 오십시오, 전하. 제가 하도 우리 준이를 본 지 오래 되서 일부러 불렀습니다.”
“그래요? 그러게 좀 궁궐에 붙어있지 않고 절만 찾아 돌아다니니......아니 그러냐 준아.”
“전하, 오랜만에 이렇게 만났는데 한번 종친 간에 우애를 나누어 보시지요.”
정희가 머뭇거리는 이준 대신 말을 받자 세조가 개의하지 않고 자리를 잡았다.
“그야 여러 소리가 필요 없지요. 아우, 어서 편히 자리하게나, 그리고 준이도.”
모두가 좌정하고 정희가 산사를 다녔던 행적에 대해 세세하게 이야기를 풀어 놓는 중에 주안상이 들어왔다. 정희가 술병을 잡아들었다. 세조에게 먼저 술을 따르고는 임영대군을 바라보았다.
“마마, 아니옵니다. 제가 따라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곁에 있던 세조가 임영대군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이 사람아, 술은 여자가 따라주어야 맛이 나는 법이야. 그리고 형수가 시동생 한 잔 따라 주고자 하는데 그걸 마다하면 될 일인가.”
“그래요, 형수가 따라주는 잔은 잔이 아닌가요.”
“마마, 황공하옵니다.”
임영대군이 말을 그리하고 잔을 들어 술을 받고는 있지만 얼굴에는 곤혹감이 가득 들어찼다. 그를 모른 체하고 이번에는 조카 준에게 술잔을 권했다.
“백모님, 아니 마마!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고. 지금 속이 많이 상해있을 터인데 한잔 쭉 마시고 그만 잊어버리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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