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우회 재건등 한일아나키즘 운동 공동전선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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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심창(元心昌)’ 의사 | ||
그의 어린 시절 우리나라는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보다도 더 가난했던 그 때는 먹을 것과 입을 것도 마땅치 않았다. 나라가 일제의 압제아래 신음할 때, 뜻있는 많은 청년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지만, 13살의 나이에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섰으니 이는 가히 놀라운 일이다.
원심창 의사는 1906년 12월 1일 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당시 충청남도 평택군 부용면) 안정리 175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이명은 원훈(元勳)이다. 3형제 중 막내인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의협심이 강하였다.
9세 때인 1914년 3월 평택공립보통학교 입학해 4년만인 1918년 2월 졸업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지 1년만인 1919년 3월1일 3·1운동이 일어난다. 평택군의 3·1운동은 1919년 3월 9일 계두봉을 시작으로 4월10일까지 전 군내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3·1운동의 경험은 원심창에게 평생 민족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평화적인 시위에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일본군을 어린 그는 목격하게 되었고,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행패에 힘을 잃어가는 조국을 보고만 있을 수만은 없었다.
1920년 3월 원심창은 서울의 중동학교(창설자 최규동)에 입학했지만 2년 후 중퇴한다. 그 후 1923년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도쿄로 유학을 가서,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한다. 이 기간 중, 원심창은 무산학생학우회 임원으로 활동했으며, 또한 동경조선무산자동맹에서도 활동한다. 학비를 조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2년이 못돼 대학을 자퇴한다.
이무렵 그는 신사상에 관심을 갖고 아나키즘 사상의 대표자인 크로포트킨(1842~1923)의 ‘상호부조론’, 오스기 사카에(1885~1923)의 저서를 탐독하며 아나키즘 사상에 공감하였다.
원심창에게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을 걷게 한 계기는 1923년 9월1일 도쿄대지진 와중에 벌어진 ‘박열사건’이 아닌가 싶다. 그는 흑우회에 가입하고 1926년엔 흑우회 재건을 위한 활동에 참여한다. 1926년 7월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자살 때 진상조사에 착수했고, 11월에는 흑색운동사를 ‘흑색전선연맹’으로 변경, 일본의 아나키스트 단체회의 개최를 담당하는 한편,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해 한일아나키즘 운동의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아나키스트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목숨을 내놓고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서 치열한 항일운동을 벌였지만, 의열단·남화한인청년연맹 활동·일본천황 암살사건 등 총과 폭탄에 의한 투쟁에 주력했다는 이유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원심창선생 역시 아나키스트, 반공사주의자, 반독재 통일운동가라는 이유 때문에 그에 대한 관심은 등한시 되었었다.
이후 그는 베이징, 상하이, 도쿄 등을 오가면서 무정부주의 운동에 진력하였다. 1930년 원심창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일본을 떠나 조선을 경유해 북경으로 망명한다. 이듬해 상하이에 도착하고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총본부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한다. 북경의 원로 이회영과 류자명, 만주를 탈출한 정화암, 백정기, 엄형순, 이달 등이 모였으며, 원심창은 백정기, 박지성, 엄형순 등과 함께 한방에서 지냈다고 한다.
원심창은 항일구국연맹의 흑색 공포단에 가입하여 활동에 적극참여 하였으며, 1931년 10월부터 서기를 맡아 각종 정보와 연맹원에 대한 보고 및 연구회의 개최를 담당하고, 항일 아나키즘 선전 등 중책을 맡았다. 또한 그는 흑색공포단의 구파 백정기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함께 중국의 일본군 사령부에 폭탄을 투척했으며 친일분자를 색출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는 일제의 기관파괴 및 요인암살, 친일분자 숙청, 배일전선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대였다.
1932년 12월 원심창은 유기석, 이용준과 함께 천진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위력이 크지 않아 벽돌담 외측 하부만 파괴시켰다. 천진 일본군사령부 파괴사건은 일본신문에도 대서특필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33년 3월 17일 상하이에서 일어난 ‘상하이 육삼정 의거’는 백정기(폭탄), 원심창(차량), 이강훈(수류탄, 권총) 등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이 홍커우구(虹口区) 자푸루(乍浦路)에 위치한 요리집 ‘육삼정’에서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를 폭살하려다 거사 직전 실패한 의거였다.
그들은 3월14일 연회장소인 육삼정을 답사하고, 3월17일 육삼정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원심창은 미리 준비했던 폭탄과 권총을 백정기에게 건네주고 최종 연락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실행직전 경찰에 탐지돼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거사는 불발에 그쳤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상해와 북경·남경 등 각 신문에 일제히 이 암살계획이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상해의 국제 흑(黑) 테로단’이라고 크게 대서특필돼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육삼정 의거가 민족의 자긍심을 높임과 동시에 일제와 중국 국민당 친일파의 협잡도 세상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의거는 황포탄 의거(1923) 윤봉길의사 의거(1932)와 함께 상하이 3대 의거이자 일제 강점 이후 해외 3대 의거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정신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체포된 그들은 7월10일 일본으로 압송돼 원심창과 백정기는 무기징역형, 이강훈은 15년 구형을 선고받는다. 원심창과 함께 이 거사를 이끌었던 구파 백정기 의사는 복역 중 모진 고문으로 1934년 6월 5일 39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다.
백의사는 원심창 선생에게 “나는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 동지는 몸이 건강하니 자중자애 하라. 자네가 출옥한 후에도 만일 독립이 안됐으면 나를 조국 땅에 묻지 말고, 독립이 됐으면 나의 유해를 조국 땅에 묻어주어 무덤위에 꽃 한 송이만 꽂아주기 바란다.”는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백정기 의사의 유해는 해방 후 김구, 안재홍, 조소앙, 정인보 선생 등의 노력으로 윤봉길, 이봉창의사와 함께 1946년 국내로 봉환돼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함께 의거했던 이강훈 의사는 1960년대 이후 혁신활동과 광복회장을 지내며 순국선열 정신 선양에 노력한 인물이다.
원심창의사는 1946년 박열과 함께 신조선 건설동맹을 창설해 부위원장에 피선된다. 10월엔 재일조선인민거류민단을 창설 초대 사무총장을 맡고, 통일조선신문 창간 및 대표, 한국민족자주통일동맹 일본 본부 결성 및 대표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71년 7월4일 66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친다. 유해는 1976년 10월2일 철원군에 모셨으며, 1977년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그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놀랍다. 일제 식민통치시절에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해 청춘을 바쳤고, 천추의 한을 가슴에 품고 옥살이를 하신 그 고통의 나날을 어찌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나가사키 시로 압송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모진 고문을 견디며 1945년 해방의 그날까지 13년간 옥고를 치른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맛보았지만, 곧 조국의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품은 뜻을 다 펼치지는 못했다.
그는 독립 후,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11, 12대 단장을 지내며 재일동포 권익증진에 앞장서다 1973년 세상을 뜨셨다. 나라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며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3살 때부터 남기신 원심창의사의 정신과 업적이, 희망을 잃고 방황하던 식민지 백성에게 커다란 횃불이 되었듯이, 오늘날 길을 잃고 헤매는 청소년들에게도 큰 소망의 빛이 되길 간절히 바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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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실 박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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