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노예공화국 북조선 탈출’의 한봉희 한의사(上篇)

소정현 / 기사승인 : 2019-09-13 20: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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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 출간된 아버지 수기 17년만 한국 소개
북한인권특별상 수상 추석맞아 부친 영전 헌정

탈북후 한의사자격 내과의사 모친 지대한 영향
남편도 한국에서 한의학을 전공한 선후배 사이

 

▲ 2019년 5월 도전한국인운동본부의 2019문화예술 창조경영인 대상 수상


● 북한에서 부친은 과학기술 엘리트인 엔지니어이고, 모친은 의사 신분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부모님에 대해 회상해 달라.

▼ 아버지는 철도운수학교와 펄프전문학교, 함흥화학공업대학을 졸업한 기계공학사입니다. 학창 시절 공부를 무척 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조선인민군 후방총국 직속 길주팔프련합기업소에서 설계원으로 35년간 근무하며 수많은 발명과 기술혁신을 했어도 그에 대한 표창은 대부분 간부들이 갈취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국기훈장 2급 2개, 국기훈장 3급 3개, 그리고 과학기술발명권2개, 신기술등록증 3개, 창의고안증 35개를 받을 정도로 능력 있는 분이셨습니다.

헝가리·독일에 파견되는 기술견학단 단원과 소련·중국의 기술대표단 단원후보로 꼽혔지만 출신 성분 때문에 번번이 최종 명단에선 낙선했습니다.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행방불명 된 것과 큰할아버지가 국가보위부에서 처형된 것, 또 비교적 넉넉하게 살던 외할아버지가 전쟁 시기 국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매번 불합격됐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45살에 겨우 노동당에 입당했습니다.

어머니는 철도국병원 내과의사였습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의료기기를 챙겨 왕진 다니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출신 성분 때문에 늘 감시받던 아버지는 사회적 명예와 직위로 인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어렵더라도 우리가 참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어머니는 북한체제에 매우 비판적인 분이셨습니다.

 


● 북한 인권 실태를 폭로한 아버지 한원채 씨의 수기 ‘노예공화국 북조선 탈출’로 얼마전 북한인권특별상을 받았다.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은데.

▼ 9월 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한반도인권과통일을위한변호사모임(상임대표 김태훈) 주최 제2회 북한인권상 시상식에서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가 본상을 받았고, 아버지께서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수기는 부제 ‘1급 설계원·보위부 비밀요원의 자유·인권·민주주의 향한 여정’ 그대로 아버지께서 몸소 겪으신 북한의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인권 실태를 폭로하는 내용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세 번째 납북되기 직전 저에게 “저 어둠의 세계, 북조선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 북녘 주민 모두가 자유를 찾고, 노예에서 해방되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내가 대한민국에 못 가더라도 이 글만은 반드시 출판되어 북조선 사람들이 김일성 부자의 잔인한 독재체제에서 얼마나 많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고, 신음하며 살고 있으며,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지 알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책을 내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유언이 되어버린 부탁을 들어드리게 돼 기뻤는데, 북한인권특별상이라는 글자 그대로 특별한 상까지 받게 돼 추석을 맞아 아버지 영전에 바칠 수 있게 됐습니다. 아버지께서도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 ‘노예공화국 북조선 탈출’은 2002년 ‘脫北者(탈북자)’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먼저 출간됐는데, 여기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 달라.

▼ 두 번의 탈북과 두 번의 북송 후 겪은 감방 체험을 글로 쓴 아버지는 원고를 일본 민간단체 북조선난민구원기금 대표이자 기자인 가토 히로시(加藤博) 대표를 통해 일본으로의 밀반출에 성공했고, 자녀들의 안전한 한국행 이후 출판과 선인세를 조건으로 출판계약을 했습니다.

5,000달러(약 600만원)를 받아 그 돈으로 저와 언니, 남동생은 브로커를 통해 2001년 대한민국으로 무사히 입국했고,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출판사인 만성사(晩聲社)는 아버지의 수기를 일본어로 번역해 2002년 ‘脫北者’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3쇄까지 출판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 작가 무라카미 류(村上龍)는 2005년 노마문예상과 마이니치문화예술상을 받은 장편소설 ‘반도에서 나가라’(윤덕주 역, 스튜디오본프리, 2006)가 아버지의 이 수기가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지난해 연말 일본을 방문해 아버지한테 원고를 직접 받은 가토 히로시 기자와 출판에 도움을 준 번역작가 이산하(李山河) 님, 이미 고인이 된 출판사 사장의 사모님을 만나 뵙고, 아버지께서 가토 히로시에게 넘겨준 가족사진 등 귀중한 자료를 받아왔습니다.

수기를 전달받은 일본 기자가 세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빼돌린 위험한 상황, 그 후 중국 공안에 체포 돼 비밀리에 북한 보위부에 넘겨질 뻔했던 일, 부모님이 중국 공안에 체포된 후 끝까지 추적하여 그 소식을 ‘脫北者’ 후기에 담았던 이야기, 책이 출간되자 작가 무라카미 류가 출판사에 직접 찾아와 수기를 100권 사 가지고 갔고, ‘반도에서 나가라’가 출판된 후 그 옆에 가지런히 놓고 판매했다는 내용까지 제가 모르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 이 수기를 출판함에 있어 선인세를 받아 중국에 있는 가족이 한국으로 전부 들어온 후 출판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출판사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 어려운 시기 선뜻 응해주신 분이 만성사 사장님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작년에 고마운 은인들을 한자리에서 뵐 수 있어 늦게나마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 독서클럽에서 아버지의 책을 소개하는 한봉희 원장

● 일본에서 출간된 지 17년 만에 아버지의 수기가 한국에서 소개되었다. ‘노예공화국 북조선 탈출’은 현재 영미권 소개를 위해 영어로 번역 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 2001년 대한민국 입국 후 한의대 공부와 결혼, 세 아이 출산과 양육, 한의원 개원 등으로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2018년 여름께 지인이 우연히 국회도서관에서 일본에서 출판된 아버지의 수기가 국내 한 잡지에 소개된 자료를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수기 원본을 19년 동안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입국한 당시는 김대중 정부였고 북한의 현실에 대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한국 정부도 북한 인권에는 관심이 없어보였습니다.

늦은 감이 있으나 최근 북한 인권문제를 등한시 하는 한국 정부의 정책에 경종을 울리고, 북한의 거짓 선동에 현혹되지 않도록 북한의 실상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야겠다는 심정으로 책을 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북한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북한 주민들은 김정은의 폭압정치에 숨도 크게 못 쉬고 있으며, 김정은과 그 추종자들이 만든 노예제도에 갇혀 신음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 책이 나오자마자 여러 언론에서 관심을 갖고 소개해줬고, 덕분에 3주 만에 초판 2000부가 매진돼 금세 2쇄를 찍었습니다. 소문이 나 북한인권운동을 하는 국제단체가 관심을 보여 현재 영어로 번역 중입니다. 조만간 영미권에도 책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 ‘노예공화국 북조선 탈출’은 식량난이 극심했던 고난의 행군(1995~1999) 이후의 상황을 부친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 탈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

▼ 1993~1997년까지 대학에서 고난의 행군 시기를 보냈습니다. 대학은 어려서부터 꿈과 희망의 무대였고, 졸업 후 아버지처럼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는 기술자나 교육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은 그런 꿈과는 거리가 먼 정치사상의 단련장이었습니다.

등록금이 없는 대학은 대학생들에게 발언권이 없고, 국가에서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며, 개인의 생각과 주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고난의 행군 시기에 정치사상 공세와 통제는 더욱 더 심했고, 입학할 때와 달리 졸업할 때는 영양실조와 전염병, 극심한 식량난이 교수들과 학생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식량 공급을 멈추자 교수와 학생들은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 하루도 조직생활에 불참할 수 없는 북한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교수들은 굶어서 사망하였고, 대학생들은 방학을 이용하여 식량 구입에 나섰다가 열차 사고, 강도로 인한 사고 등으로 사망하거나, 영양실조로 졸업을 못하고 기숙사에 누워만 있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대학생들이 많았고, 집에 돌아가도 죽 한 그릇 먹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가끔 주말이나 방학이 되어 열차를 타려고 역전에 가면, 대합실 구석구석과 역전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영양실조에 걸려 갈 곳도 잃은 채 누워 있거나 숨이 거의 끊어져 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식량난은 감방이나 감방 밖이나 다를 바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서도 정복 입은 자들, 권력 있는 자들은 제 배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법을 몰랐습니다.

▲ 한의사인 남편 정일경 원장과 함께 TV조선 모란봉클럽에 출연

● 부친처럼 과학(전자공학)을 전공했는데, 한국에서는 한의사로 개원했다. 대대로 한의사 집안인 부군 또한 한국에서 한의학을 전공한 선후배 사이인데?

▼ 북한에서의 전공 선택은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배정되어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1지망, 2지망 등이 있지만 출신성분이 좋아야만 선택 가능합니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가 6‧25 때 함흥시 폭격으로 행방불명이셨는데, 월남자 가족으로 낙인 찍혀 아버지의 출세 등 모든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대학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물리학, 전자기이론 등에 관심이 많아 이 분야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탈북후 한의사가 되는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습니다. 한국과 달리 북한의 열악한 의료 실정에 환자들은 병원에 가기보다는 동네에 의사가 있으면 집으로 많이 찾아옵니다. 저녁에, 밤늦게, 새벽에, 쉬는 날도 없이 찾아오는 환자를 다 봐주고 왕진도 다니시는 걸 보면서 언젠가는 어머니처럼 존경받는 의사, 나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치료 해주는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 와서는 앞으로 한국에 가게 되면 꼭 전공을 바꾸리라는 결심을 했고, 부모님의 뜻이기도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착 교육시설인 하나원을 나온 후 대학을 알아보던 중 먼저 한의대에 입학한 남편의 도움으로 많은 정보와 조언을 받았습니다.

지금 당장 돈을 버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나중에 더 많은 부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에는 오직 공부만이 살길이라는 생각, 부모님이 원하셨던 대학공부를 꼭 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 입학에만 집중하여 학원을 다녔습니다.

학원에서 공부할 때는 좋은 분들을 만나 오래 동안 많은 후원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남편은 대학 입학 후에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조언을 주었습니다. 예과 1학년 말에 결혼하였고, 졸업할 때까지 두 딸이 태어났습니다. 출산과 휴학을 반복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며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교수님들의 응원과 동기들의 도움에 무사히 대학 과정을 마칠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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