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일본 '히든 챔피언' 몰락…중국 '작은 거인'이 세계 제조업 판 뒤흔든다

이수근 기자 / 기사승인 : 2026-01-07 13: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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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정신의 한계 넘은 중국 국가전략, 소부장 패권 이동 속 한국 산업의 선택은
중국판 강소기업 '전정특신' 1만 5천 개 돌파…국가 주도 성장 사다리로 공급망 장악
독일 제조 기업 파산 80% 급증의 비극…자동차 부품업계 '구조적 쇠퇴' 국면 진입
"한국판 히든 챔피언은 고작 23개"…취약한 중견기업 생태계, 소부장 산업 위기 경보
중국과 기술 격차 고작 2~3년…반도체·정밀 장비 등 한국 전략 산업 '턱밑 추격'
▲ (사진=픽사베이 제공)

[일요주간 = 이수근 기자] 한때 세계 제조업을 이끌던 독일과 일본의 강소기업 신화가 흔들리는 사이 중국 정부가 키운 ‘작은 거인’ 기업들이 글로벌 공급망을 장악하며 한국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에도 위기와 선택을 동시에 던지고 있다.

포스코경영연구원 소재인프라연구센터가 최근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과 일본은 오랫동안 ‘히든 챔피언’으로 불리는 강소 제조기업을 기반으로 세계 제조업을 주도해 왔다. 히든 챔피언은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특정 틈새시장에서는 세계 1~3위를 차지하는 기업을 말한다. 이 개념은 1986년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처음 제시했다.

이들 기업은 연 매출 50억 달러 이하의 중소·중견기업이지만 세계 시장 점유율 상위권을 유지하며 높은 기술력과 생존력을 자랑해 왔다. 독일의 립스틱 제조 기계 시장을 장악한 베커레, 애견 목줄 시장 점유율 70%의 플렉시, 일본의 반도체 소재 강자인 JSR와 신에츠화학 등이 대표적 사례다.

◇ 디지털 전환에 대한 늑장 대응한 히든 챔피언들 연이어 파산


이들의 성공 비결은 분명했다. 성장과 시장 지배력을 목표로 한 장기 전략, 좁은 시장에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 매출의 평균 6%에 달하는 연구개발(R&D) 투자, 고객과의 밀착 관계, 그리고 장기 재임 CEO가 이끄는 일관된 경영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 이 신화는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독일은 2023년 GDP가 0.2% 감소하며 2년 연속 역성장을 기록했고 2021년 이후 제조업 기업 파산은 80% 이상 급증했다. 특히 파산한 대기업 6곳 중 1곳이 자동차 부품업체일 정도로 충격이 컸다.

독일 자동차 산업은 이미 구조적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보쉬, ZF, 폭스바겐 등 대기업들이 대규모 감원을 발표했고 168년 역사의 자동차 도어락 업체 키커트, 벤츠 엠블럼을 만들던 게르하르디, 고성능 휠 제조사 BBS 등 전통적인 히든 챔피언들도 연이어 파산했다.

쇠퇴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소수 대기업에 의존하는 산업 구조, 디지털 전환에 대한 늑장 대응, 경직된 혁신 생태계,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까지 겹쳤다. 일본 역시 디지털 전환에서 뒤처져 2024년에야 정부 기관의 플로피디스크 사용을 전면 폐지했고 독일은 ‘디지털 오아시스 속 개발도상국’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 중국, 전문화·정밀화·특색화·혁신화 갖춘 중소기업 발굴해 집중 지원

반면 중국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중국은 독일식 히든 챔피언 모델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전정특신(專精特新)’이라는 중국식 전략으로 재설계했다. 이는 전문화·정밀화·특색화·혁신화를 갖춘 중소기업을 국가가 단계적으로 키우는 정책이다.

중국 정부는 이 전략을 통해 ‘혁신형 중소기업 → 전정특신 기업 → 작은 거인 → 제조업 챔피언’으로 이어지는 4단계 성장 사다리를 구축했다. 당초 2025년까지 ‘작은 거인’ 1만 개 육성이 목표였지만 2023년 이미 이를 넘겼고 2024년 말 기준 약 1만 5000개에 달했다.

이 같은 폭발적 성장은 미·중 기술 패권 경쟁과 맞물려 있다. 미국의 반도체·첨단기술 제재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은 핵심 부품과 소재의 국산화를 국가 전략으로 격상시켰다. 외국인 투자 감소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작은 거인’ 기업들은 중국 산업 생태계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정부 지원도 전방위적이다. 중앙정부는 매년 1000 개 이상의 작은 거인 기업에 3년간 약 11억 원을 지원하고 법인세율을 20%로 낮추며 R&D 비용의 200% 초과 공제를 허용했다. 금융 측면에서도 정부가 ‘인내심 있는 투자자’ 역할을 하며 대출과 펀드를 뒷받침했다.

그 결과 중국의 작은 거인 기업들은 전략 산업에 집중해 압도적인 R&D 역량을 갖추게 됐다. 이들 기업의 90% 이상은 반도체, 전자장비, 핵심 설비 등 ‘중국제조 2025’의 핵심 산업에 몰려 있다. 독일 히든 챔피언보다 연구 인력은 3배 많고 특허 보유 수는 224만 건을 넘어섰다. 글로벌 인수합병과 직접 시장 대체를 통해 세계 시장 장악력도 빠르게 키우고 있다.

◇ 중국, 바도체 등 분야서 한국 빠르게 추격...일부 분야 기술 격차 2~3년으로 좁혀져

포스코경영연구원 소재인프라연구센터는 “이 변화는 한국에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중국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정밀 장비 등에서 한국을 빠르게 추격하고 있으며 일부 분야에서는 기술 격차가 2~3년 수준으로 좁혀졌다”고 평가했다.

이어 “하지만 한국의 히든 챔피언은 고작 23개에 불과해 중견기업 생태계의 취약성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며 “한국이 중국처럼 양적 확대를 따라가기보다는 ‘질적 혁신’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전정특신 기업을 무조건적인 경쟁자가 아니라 전략적 협력 대상으로 보고 AI·첨단 반도체·센서 등 중국이 아직 취약한 분야에서 협력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한국의 반도체·배터리 기술과 일본의 소부장 경쟁력을 결합하는 한·일 경제 연대, 공급망 다변화와 기술 보호, 차세대 반도체와 신소재에 대한 선제 투자,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상생 구조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세계 제조업의 판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독일과 일본의 신화가 저무는 자리에 중국의 국가 주도형 강소기업 군단이 올라섰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 산업의 운명이 갈릴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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