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내려놓고 나를 비울 때에 진리는 그 자리를 채운다"

김선국 박사 / 기사승인 : 2019-04-03 10: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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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박사 김선국의 노자(老子) 이야기(35)

[일요주간=김선국 박사] 진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언제나 있다. 얻어질 것도 밝혀질 것도 없다. 진리는 발견하는 자들의 몫이다. 그런데 안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들어온다 한들 받아들여지지 않고 머무르지도 않을 것이다. 종교와 철학, 윤리와 도덕, 이념과 관념에 의해서 지배되는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은 진리가 받아들여질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것이다.



然而不可者 无佗也 (연이불가자 무타야)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中无主而不止 (중무주이부지) 마음 속에 도를 받아들지 않으면 머무르지 않고
外无正而不行 (외무정이불행) 밖으로 올바름이 없으면 실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由中出者 不受於外 聖人不出 (유중출자 불수어외 성인불출) 마음속에서 나가는 것이 밖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성인은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由外入者 無主於 中聖人不隱 (유외입자 무주어중 성인불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을 마음속에 담아두주지 않기에 성인은 그것을 기대하지 않다.

나를 내려놓고 나를 비울 때에 진리는 그 자리를 채운다.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내 마음에 들어올 것이 없다.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함에서 오는 감정과 생각들이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에고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숨겨져 있다. 자신의 생각을 비우고 내려놓고 놓아버릴 때에야 신성의 진리와 우주적 지혜가 흘러들어와서 나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지혜를 말하는 것이 성인이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말라고 한 예수의 말은 수많은 에고들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서 슬기롭게 에고의 자기 중심성을 상대하는 법을 알려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진리에 이를 수는 없다. 마음이 열린 사람만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고 그것은 진리에 대한 헌신과 더불어 세상에 대한 연민을 가진 혼들에게만 밝게 드러날 것이다. 아래의 은 인과 의를 세상에 펼치는 공자에 대한 비판의 내용이다. 그 얘기를 들어보자.

名 公器也 不可多取 (명 공기야 불가다취) 명예는 공공의 기관으로 많이 취하면 안 되며
仁義 先王之蘧廬也 (인의 선왕지거려야) 인의는 옛 왕들의 여인숙으로
止可以一宿而不可久處 (지가이일숙이불가구처) 하루밤 머무르는 것은 좋으나 오래 묵을 곳은 되지 못하니
覯而多責 (구이다책) 오래 머무르면 오히려 책망만 많아진다.

이 세상에서 삶의 목적을 이야기하라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고들 이야기한다. 또한 정치가들은 그런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잘 먹고 잘 살려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공자는 세상 사람들이 잘 살려면 인과 의가 필요하다고 믿었고 그런 인의에 바탕한 세상을 꿈꾸면서 수레를 타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의 마음 속에는 세상에 대한 연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인과 의가 비록 하룻밤의 여인숙 정도의 가치는 있지만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인과 의의 세상이 펼쳐지고 대동사회가 펼쳐져서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꿈꾸어 보지만 이 세상이 그런 세상이 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라는 에고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나는’, ‘나를’ 이런 단어들이 나타내는 그 ‘나’가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인의를 외쳐도 결국에는 ‘나들’이 펼치는 생존경쟁의 이 전쟁터에 진정한 인의는 올 수 없음을 노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많은 종교가 지상낙원을 이야기하지만 지상낙원이 되려면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지상낙원은 서로가 서로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서로를 최고의 존재로 인정하고 배려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온갖 종교와 가르침들이 있어왔지만 그것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에고’가 나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이 변화하기를 기대하고 그들의 못난 점을 비판하지만 스스로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에는 게으르다.

그래서 세상의 문제가 저 밖에 있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 세상의 문제는 저 밖의 인정머리 없고 몰상식하고 무지한 군상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얼마나 비우고 내려놓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나를 바꾸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때에만 나는 진정한 구원과 깨달음의 의미를 알 것이고 세상이 나부터 시작해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 하늘 문

하늘의 문은 아무에게나 열리지 않는다. 에고의 마지막 잔재를 다 버린 후 내 마음이 한 없이 가난해져서 온 우주의 진리를 담고 우주와 하나가 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것은 모든 인위적인 것을 놓아버리고 하늘의 도가 저절로 펼쳐질 때 가능하다.

구원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단어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삶과 죽음을 넘어서서 하늘과 같아질 때에 비로소 하늘의 문이 열리고 우리는 하늘에 본래의 나로 돌아간다. 여기서 노자는 공자에게 정치하는 자의 자세를 말하고 있다. 정치하는 자가 권력에 사로잡혀서 제대로 정치를 못할 때 하늘이 벌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古之至人 假道於仁 (고지지인 가도어인) 옛 지인은 인에서 도를 빌리고
託宿於義 以遊逍遙之處 (탁숙어의 이유소요지처) 의를 주막 삼아서 노닐며
食於苟簡之田 立於不貸之圃 (식어구간지전 입어부대지포) 조그만 밭에서 먹고 채소밭 빌리지 않고 살았으니
逍遙无爲也 (소요 무위야) 무위에 거닐었소.

지인은 지극한 경지의 도에 이른 사람이다. 그는 지극한 도에 이르으나 그것을 세상에 펼쳐 보여줄 수가 없다. 어찌 번데기가 나비의 깊은 뜻을 알겠는가? 나비는 넓고 높은 세계를 이야기하나 들을 귀 있는 사람들이 없다. 그래서 도 대신에 인仁을 잠시 빌려쓰고 도 대신에 의義를 잠시 빌려서 주막처럼 잠시 묵으나 그것이 도道는 아니다. 그는 인仁과 의義 조차도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무위를 벗 삼아서 살아간다.

苟簡 易養也 (구간 이양야) 구간은 쉽게 살아가는 것이고
不貸 无出也 (부대 무출야) 빌리지 않으면 나가지 않으니
古者謂是采眞之遊 (고자위시채진지유)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진리를 캐는 놀이라 하였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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