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어디에 있을까? 진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김선국 박사 / 기사승인 : 2019-03-25 15: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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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박사 김선국의 노자(老子) 이야기(34)

[일요주간=김선국 박사] <장자>는 내편, 외편, 잡편의 3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편 7편은 장자가 직접 저술하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천운편은 외편에 속하는 글로써, 제자들이 첨삭한 것이라고 한다. 이 글은 공자와 노자의 사상의 차이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기에 도움을 주고자 수록하다.
 

 

왕들의 여인숙

孔子行年五十有一而不問道 (공자행년오십유일이불문도) 공자는 51세가 되도록 도에 대해서 깨우치지 못했다.
乃南之沛見老聃 (내남지패견노담) 그래서 남쪽의 패로 가서 노담을 만났다.
老聃曰 (노담왈) 노담이 말했다.
子來乎 吾聞子 北方之賢者也 子亦得道乎 (자래호 오문자 북방지현자야 자역득도호) “선생께서 오셨습니까? 내가 듣기로는 선생은 북방의 현자인데 선생도 또한 도를 얻었습니까?”

孔子曰 未得也 (공자왈 미득야) 공자가 말하다.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老子曰 子 惡乎求之哉 (노자왈 자 오호구지재) 노자가 물었다. “선생은 어디서 그것을 찾았습니까?”
曰 吾求之於度數 五年而未得也 (왈 오구지어도수 오년이미득야)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도수에서 찾았으나 오년이 되어도 얻지 못했습니다.”
老子曰 子又惡乎求之哉 (노자왈 자우오호구지재) 노자가 말했다. “선생은 또 어디서 그것을 찾았습니까?”
曰 吾求之於陰陽 十有二年而未得 (왈 오구지어음양 십유이년이미득) 공자가 말했다. “음양에서 찾았으니 12년이 되어도 얻지 못했습니다.”

진리는 어디에 있을까? 진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노자는 공자에게 예를 갖추어 진리를 깨달았는지 묻고 있다. 그런데 공자의 모습은 초라하다. 5년을 도수度數에서 찾고, 다시 12년을 음양陰陽에서 찾았지만 찾지를 못했다.

여기서 도수는 천문과 역법 등을 이야기하고 음양은 주역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서 공자는 오랜 세월동안 진리의 세계를 찾으려 하으나 찾지 못하던 것이다. 논어에 보면 공자의 한탄이 나온다. “조문도朝聞道면 석사夕死라도 가의可矣”라고 공자는 이야기했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이다. 문聞은 단순히 듣는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번개가 스치듯이 번쩍하고 일어나는 깨우침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유와 우주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이다.

인간의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 대한 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설사 온 세상을 구한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공자는 북쪽의 노魯에서 멀리 남쪽의 패沛까지 찾아온 것이다. 공자는 비록 인과 의를 논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가르침을 펼쳤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이 세상은 과연 무엇이고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해답을 얻지 못한다면 그의 인仁 과 의義의 펼침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당시에도 근본적 진리에 대한 가르침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노자를 공자가 찾아온 것은 스승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자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老子曰 然 使道而可獻 (노자왈 연 사도이가헌) 노자가 말했다.
그러합니다. 도가 누구에게 바칠 수 있는 것이라면
則人莫不獻之於其君 (즉인막불헌지어기군) 사람이 그것을 그 임금에게 바치지 않을리가 없을 것이오.
使道而可進 (사도이가진) 누구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則人莫不進之於其親 (즉인막부진지어기친) 사람이 그것을 그 어버이께 드리지 않을리가 없지요.
使道而可以告人 (사도이가이고인) 만일 도가 남에게 일러줄 수 있는 것이라면
則人莫不告其兄弟 (즉인막불고기형제) 사람이 그것을 그 형제에게 일러주지 않을리가 없을 것이며
使道而可以與人 (사도이가이여인) 만일 도를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則人莫不與其子孫 (즉인막불여기자손) 그것을 그 자손에게 주지 않을리가 없을 것이다.

진리는 물건이 아니다. 또한 진리는 지식이 아니다. 물건이라면 건네줄 수 있겠지만 건네줄 수가 없는 것이다. 진리는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이라는 말은 객관의 반대이다. 객관은 보여줄 수 있고 확인할 수 있고 검증할 수 있다.

그런데 주관은 가진자 마음대로라는 의미가 아니라 가진 자의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어서 다른 방식으로는 전해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는 염화미소로 가섭존자에게 꽃을 전하다. 진리는 말하여 질 수는 있지만 전해줄 수는 없다. 수없는 논의와 토론을 거쳐서 진리의 겉모습을 묘사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사과의 맛을 만권의 책으로 묘사한들 한 번 맛본 사과 맛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사과의 유래와 화학적 분석과 온갖 요리 방법을 말한다 한들 사과를 직접 맛본 것은 아니다.

이것을 철저한 주관성이라고 호킨스 박사는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된 그의 책(I : Realty and Subjectivity; 호모스피리투스)에서 이야기한다.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자가 현상을 결정한다고 이야기한다. 관찰되는 세상은 객관의 세상이 아니라 관찰자의 마음에 의해서 왜곡된다. 이것에 관한 것은 유명한 ‘이중슬릿 실험’을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양자물리학이 보는 세상은 관찰자나 경험자의 세상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써, 진리에 대한 객관적 진실은 알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진실은 오직 그 사람의 수준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만 관찰자 내부의 에너지가 외부로 투사되어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오기에 악인은 악한 세상을 보고 선인은 연민의 세상을 보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도 마찬가지이다. 선한 이들은 스스로 천국을 만들어 내고 악한 이들은 그들 자신이 만든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예수는 “천국은 그대들 마음 속에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다. 천국이 어딘가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 천국을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합당치 않기에 스스로 선택한 수준에 따라서 나중에 각자의 역으로 간다. 그래서 성경에는 악인을 심판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악인은 스스로의 에너지에 의해서 멸망하고 그 자신의 의도에 따라서 합당한 곳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의 몫은 하늘에 있고 하늘은 머리카락 한 올도 세지 않고 넘어가는 법이 없다고 예수는 이야기하다. 진리는 객관이 아니라 주관이다. 나의 마음 속에 평화가 있으면 온 세상이 평화롭다. 나의 마음이 고요하면 세상이 고요하다.

즐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즐겁고 신나는 세상을 본다. 그래서 노자는 공자에게 진리의 세상은 보여줄 수 있는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진리를 알고자 하면 스스로의 세상을 변화시켜서 진리와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자신의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결단코 진리의 세계에 이를 수 없음을 노자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를 놓아버리고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초월해서 나아가지 않는한 진리가 바로 여기 이 자리에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볼 수가 없다. 진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그것을 보는 자들이 적은 것은 스스로의 주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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