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 79] 풍요와 빈곤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6-04-20 11: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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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와 빈곤

한창옥



폐기된 세상이 500개의 컨테이너에 실린다

고장 난 텔레비전. 오디오 장비들이 산더미처럼
수출이라는 이름으로 지구의 반대 나이지리아로 향한다

주파수가 달라서 쓸모없는 것들은
지구 위 중력 없는 물체가 되어
구리를 찾아내기 위해 태워지는 불더미가 된다

생계로 굶주린 라고스의 아이들은
전자제품이 쓰레기 더미에서 독하게 반항하는
수은, 납, 카드뮴의 검은 연기에 파묻혀

시커멓게 끄스른 얼굴에 어린 이빨이 하염없이 희다

장갑 없는 상처투성이의 작은 손은
구리, 알루미늄, 쇠붙이를 골라내는 보물 상자다

세계인들은 편하게 쓰레기를 처리하고
재활용에 빈곤한 우리의 환경 쇼윈도를 본다

수명을 다한 매립지는 쥐들의 왕국이 되어
밤낮 전염병을 되돌려 주는 신나는 놀이터

그렇게 수억 년의 푸른 물을 검게 덮쳐가고 있다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 시 감상 ) 우리는 쓰던 물건이 낡으면 서랍 속에 넣거나 수거함에 버리지요. 그리고 곧 잊습니다. 이 시는 우리가 버린 것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누구의 손을 거쳐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기록합니다. “500개의 컨테이너”라는 숫자로 시작하는 시. 숫자는 정확하고 건조해 어떤 위로도 담지 않습니다. 이어 쓸모를 잃은 것들을 먼 땅으로 밀어내는 과정을 수출이라는 용어로 포장하지요.

쓸모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요. 누군가에게 불필요한 것이 다른 누군가의 생존 조건이 되는 세계, 이 시는 그 기울어진 구조를 꿰뚫지요. “시커멓게 끄스른 얼굴에 어린 이빨이 하염없이 희다” 이 검음과 흰색의 선명한 대비는 단순한 색채 묘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편하게 처리한 풍요의 잔해에서 비롯된 검음과 그 풍요가 만들어낸 흔적이 아이 얼굴에 드리워져 있지요.

시인은 매립지를 터전으로 생활하는 아이의 삶을 보여줍니다. “보물 상자”라는 상처투성이 맨손과 전염병이 들끓는 매립지를 “신나는 놀이터”로 표현 한 시 속에 아이러니를 숨긴 채요. 이 달콤한 언어 뒤에 숨은 냉소는 어떤 비판보다 마음속에 오래 남습니다. 누군가의 생존이 우리가 버리는 폐기물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시. 시인의 「풍요와 빈곤」은 그 불편한 진실을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버린 것은 정말 사라졌습니까, 라고요.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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