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 86] 유효 기간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6-06-22 10: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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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 기간

은이정




부부형 20년 완납했다는 상조 회사 메시지

남은 한 개 빨리 쓰라는 거냐

화분에 물을 주던 어머니 창문 열어 서운한 빛 들이고

배롱나무 잎이 될지 묘지기 발자국이 될지 바쁜 아버지

나비 한 마리 날아들자 들어오시게?

식탁까지 따라오는 희디흰 빛 닫힌 세상 비집고

제 그림자 비친 잔소리 제풀에 식고 맺힌 것 없이 풀
어진

하마터면 좋은 사이처럼 허공의 나비 따라갈 뻔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 시 감상 ) 우리는 보통 쿠폰이나 포장지 또는 계약서에서 유효 기간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20년 완납”이라는 기간을 가족의 시간 위에 올려놓지요. 그 순간부터 시는 삶의 만료일에 관한 질문으로 읽힙니다. “부부형 20년 완납했다는 상조 회사 메시지”는 완납을 마친 가벼움보다 서운함이 담겨 있지요. 언제부턴가 현대인의 불안은 문자 알림창에 먼저 도착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화분에 물을 주던” 어머니는 살아 있는 것들을 계속 살게 하지요. 반면 아버지는 “배롱나무 잎이 될지 묘지기 발자국이 될지 바쁜” 사람입니다. 아직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흙의 기색을 품고 있는 존재처럼요. 특히 이 시의 아름다움은 빛을 다루는 방식에 있지요. 식탁의 “희디흰 빛”과 “서운한 빛”은 가족들이 말하지 못한 감정의 빛이 머무는 곳이니까요.

“들어오시게?” 무심히 나비를 들이는 아버지처럼, 시인은 설명 없이 집 안의 풍경만 보여줍니다. 하지만 행간마다 살아 움직이는 감정들이 읽히지요. 우리는 가끔 삶의 남은 의미를 손꼽아 보기도 하지요. 마치 유효 기간이 정해진 것처럼요. “하마터면 좋은 사이처럼 허공의 나비 따라갈 뻔.” 이 아찔한 문장처럼, 휴대전화 알림창에 삶의 고비를 담은 우리의 풍경이 머물 것만 같습니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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