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국가에서 다수당이 주권자인 양 행세하는 무지의 시대에는, 아무리 무도하고 어처구니없는 법이 만들어져도 사람들은 좀처럼 의문을 품지 않는다. 다수라는 숫자가 곧 정의인 것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산업화의 시대에 집권자는 헐벗은 국민을 위해 옳은 결정을 내리고 선행을 베풀었지만, 국민은 그 대가를 요구할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시대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최악으로 치달을 때 우둔한 대중은 잘못을 보지 않으려 하고, 잘못을 보았더라도 모른 채 지나간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왜 이 법을 만들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 만드는가. 이 법으로 인해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피해를 보는가. 그리고 지금 이 법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국민에게 얼마나 충분히 설명했는가.
법을 만드는 일은 단순히 조항을 만들어 통과시키는 일만이 아니다. 다스리는 사람 스스로를 깨우치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법의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판단을 절제하며, 모든 사람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것 역시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보편적 덕성이다.
나는 공동체 사회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며 분별 있고 절제된 민주정체가 자리 잡기를 많은 국민이 바랐다고 생각한다. 국가 안에서는 누구도 자신이 법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가 밖의 어떤 논리나 힘을 끌어와 그것을 국내의 법으로 강요하는 것 역시 신중해야 한다.
새로 제정하는 법이 아무리 훌륭한 뜻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국민의 상당수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국가의 근본은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국민은 의회 안의 모든 공동체가 입법권을 함께 나누는 국회를 바라며 기대하고 있다.
관념적인 계획이나 단순한 정치적 필요에 따라, 모순투성이의 즉흥적인 발상을 법으로 만드는 일은 결국 부실한 법을 낳는다. 그리고 그 부실의 대가는 언제나 국민이 치른다. 국민이 국회에 부여한 권한은 그만큼 신중하게 행사되어야 한다.
최근 여야가 충돌하는 정치의 한복판에서 이진숙 의원의 5·18 관련 발언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예민한 영역이다. 그렇기에 더욱 사실과 주장, 기억과 평가를 차분하게 구분하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정치가 서로 다른 생각을 설득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대를 배제하고 단절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특정 발언에 대한 비판과 정치적 책임을 묻는 일과, 정적을 법으로 제거하려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김민석 대표가 이진숙 의원을 겨냥해 "법을 만들어 대한민국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면, 그 말 역시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여당의 책무는 국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고 민생을 책임지는 데 있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법을 만드는 것이 여당의 책무일 수는 없다.
법이 장난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배제하기 위해 마음대로 만들고 시행해도 되는 것이 법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법의 이름만 빌린 정치적 수단일 뿐이다. 법의 적용과 집행이 형식적으로 정당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인간 세상에 정의가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말을 쓰면서도 ‘확실치 않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법과 정의 사이에는 언제나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쪽 둑을 막으면 다른 쪽 둑이 무너질 수 있다. 한곳을 꿰매면 다른 곳이 터질 수도 있다. 터진 자리를 다시 꿰매면 또 다른 문제가 흘러나올 수 있다. 인간 사회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봉합되지 않는다.
《논어》 위정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법망을 빠져나가려 할 뿐 부끄러움을 모른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써 다스리면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 바르게 된다.”
법에 의해 인간의 땅 위에 정의를 구현하려는 생각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정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법으로 판단할 수 없는 수많은 양심과 관계와 책임이 법의 바깥에서 매일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민주적 법치국가의 현실이다.
법은 필요하다. 그러나 법만으로 세상을 바로 세울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의 세계는 본래 완전하지 않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르고 법이 정교해져도 인간은 이 불완전성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와 이념을 깃발처럼 높이 들고 자신의 옳음만을 외치며 세상을 재단하는 사람은 오히려 조심해야 한다.
불완전한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만으로 그 불완전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의 불완전성을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은 인간과 세상을 대하는 마음에 겸손과 조심스러움을 갖게 된다. 정치는 특히 그래야 한다.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에도 내가 틀릴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 내가 가진 권한이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는 것, 다수의 힘을 가졌을 때 더욱 신중해지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절제일 것이다. 겸손과 조심스러움을 잃은 권력은 자신이 정의라고 믿기 시작한다.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권력은 그 반대자를 악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악으로 규정한 상대를 제거하기 위해 법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때 법은 정의를 지키는 울타리가 아니라 권력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 우리는 이것이 인간이 불완전한 세계 위에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그 지옥의 이름은, 파시즘이다.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ch258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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