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정답은 없어도 명답은 찾을 수 있다

최철원 논설위원 / 기사승인 : 2024-08-12 15: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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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2024년 대한민국의 여름은 최장 열대야로 천지가 화덕 속이다. 파리 올림픽 낭보가 더위에 지친 심신을 즐겁게 했지만, 정치권의 소식은 듣는 이로 하여금 짜증 나게 한다. 지금 국회는 증오와 독선으로 무장한 정치 언어들이 죽기 살기로 백병전을 치르는 염천지옥이다. 지옥에선 정치적 언어의 인식기능과 소통기능은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다. 나는 이 지옥의 이른바 특검과 탄핵을 외치는 정치 행위가 배고픈 민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지옥의 본질은 적나라하고도 파렴치한 권력투쟁일 뿐이라고 믿는다.

여의도는 대의정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국회는 무한대치의 전장 터로 변했다. 겸손도 없고 사양도 없으며 정치마저 없다. 절제가 없는 정치는 여ㆍ야가 상대방 죽이기 악순환의 늪에 빠졌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직이불사(直而不肆) 광이불요(光而不燿)는 절제의 경구로 꼽힌다. "곧으나 방자하지 않고 빛나되 눈부시게 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정치에는 절제가 없다. 폭주와 전횡, 오만과 독선, 편향과 극단뿐이다.

22대 국회가 개원하기 전부터 특검과 탄핵으로 비롯된 야당의 전방위 권력투쟁은 처음부터 사실관계를 규명하려는 노력보다는 여론몰이의 방식으로 전개되어왔다. 증인으로 불려나 온 장군들은 법사위원장의 고압적인 회의 진행에 주눅이 들었다. 그들의 혐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입증되기 전부터 법사위원장이 초등학생 체벌하듯 10분 퇴장 명령을 내리며 제복 입은 장군들의 기강 잡기에 열중했다. 나라를 지키는 장군을 이래도 되는가? 나는 국가가 위급 시 군인이 나라를 지킨다는 상식은 알지만 정치인이 나라를 지킨다는 소리는 들어본 바 없다.

여ㆍ야 법사위원 간에 서로 적대적 언어를 쏟으며 부딪쳤다. 그 두 개의 적대하는 여론은 발생한 여론이라기보다는 이미 조성된 여론이다. 사실의 기초가 미비한 이 적대하는 여론군(群)은 신기루처럼 보인다. 야당은 이 신기루 속으로 또다시 여론을 끌어들이고 있다. 여당보다 숫자가 많고 여당보다 공격적인 여론을 끌어들이는 쪽이 이 싸움에서 이긴다는 싸움의 방식을 적대하는 진영들은 공유하고 있다. 다들 격렬한 연설을 한 바탕씩 토해낸 다음 "국민이 이 청문회를 보고 있다"라는 협박을 후렴으로 달고 있다. 어떤 나라 국민이 보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 말은 내 편이 더 많다는 전략적 선전에 불과하다.

이때의 국민은 허수아비와 같다. 죽은 망자를 두고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과 죽음을 정치화하지 않겠다는 반대편 세력들 공히 똑같이 국민을 허수아비로 전락시킨다. 대다수 국민은 정치인들의 유희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다 드러난 사실에 국민이 끼어든다면 경찰은 왜 있고 검찰은 왜 있으며 언론은 왜 있는가. "국민이 보고 있다"라는 협박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파시즘에 불과하다. 이 파시즘은 사실을 사실로 정립시키지 않고 대중의 정서 속에 은폐시킴으로써 정국의 고삐를 빼앗으려는 기만술에 불과하다.

국회에서 채상병 특검법이 3번째 발의되었다. 대통령이 특검법을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의 문제는 단순히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이해 당사자들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한국 정치권은 대체로 새로운 미래의 문제보다는 이미 있는 것들을 파헤치는 데 더 익숙하도록 훈련되어 있어 문제다. 미래를 여는 것보다는 과거를 헤집는 일에 더 익숙하다. 참으로 끔찍한 늪에 빠진 형국이다.

작금의 정치는 미래를 여는 시도를 하는 것보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따지는 일에 몰두해야 일 잘하며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이는 질문보다는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것과 연관이 있다. 대답은 이미 형성된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담아두었다가 누가 요구할 때 밷아내는 일이다. 이때 승부는 누가 더 빨리 뱉어내는가이다. 대답에 빠지면 사회 모든 문제가 과거 논쟁으로 빠지고 과거를 잘 파헤치는 일에 빠져야 진실한 삶을 사는 느낌이 들게 되어 있다.

질문의 바탕에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튀어나오는 일인데, 이 궁금증과 호기심은 본질적으로 아직 해석되지 않는 세계, 즉 미래를 향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질문하는 힘은 약하고 대답하는 능력은 매우 강하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에게는 과거에 갇히기 쉬운 경향이 있고 미래를 열기는 매우 어려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회에서 법사위원장이 여당 간사에게 공부 좀 하라는 면박을 주었다. 그걸 두고 저잣거리에서는 건국대 운동권 출신이 완장을 차니 서울대 모범생에게 공부를 운운했다며 비아냥이다. 이런 작은 헤프닝이 잠잠해지지 않고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국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안다고 말할 때의 앎은 어떤 것에 대하여 지식을 갖는 것이라 하나, 그것으로는 앎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앎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모르는 곳, 더 깊숙한 곳으로 넘어가려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앎은 지식이 아니라 더 깊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려는 발버둥이다. 이 발버둥은 아직 이해되지 않은 곳 알려지지 않은 곳을 향한다.

아는 자는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공부하고, 모르는 자는 이미 알고 있는 앝은 것만을 주물러 자기 성을 쌓는다. 아는 자는 미래를 열지만, 무지한 자는 멈춰 서서 과거의 것들을 주무른다. 제대로 공부한 지식인은 미래를 여는 정방향에서 궁리한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자신이 쌓은 성 밖으로 나서지 못한다. 성을 나서지 않고 성 밖의 변화에 반응하려는 삶은 힘든다. 무지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이 힘든 과정을 막말과 해괴한 논리로 풀어가며 그것을 열심히 사는 것으로 포장하거나 심지어 자신을 헌신하는 자로 각색한다.

이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올바른 의회 정치의 행보인가? 국민은 이러한 풍경을 보려고 야당에게 180여 석의 표를 몰아준 것일까. 스스로 무지함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정치가 국회 주요 상임위원장을 독식하며 의회를 온통 싸움터로 만들었다. 국민은 이런 '정치를 해고'하고 싶은 심정이다. 작금의 정치는 세계 10위 경제 대국에 1980년대 정치관을 대입하고, AI와 디지털 경제가 주역인 21세기에 30년 전 구태 정치 행위를 아무런 성찰 없이 들이댄 시대착오적 정치다.

흔히 인생과 정치에 정답이 없다 하지만 명답은 찾을 수 있다. 그 명답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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