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조정의 어른이 누구신가?”
“그야…… 인수대비 아니십니까.”
설준이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아닌가요?”
“물론 그분도 맞네만 그분 위에 대왕대비(정희왕후)께서 건재하고 계시네. 게다가 현재로서는 그분이 모든 실권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지.”
“그러니까 스승님은 두 분이 건재하시는 동안에는 별 탈은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이신지요.”
“하지만 신하들은 나이 어린 전하께 지속적으로 불교탄압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간언하겠지.”
“신하들이 왜 그런답니까?”
“성리학 운운하지만 결국 자기 밥그릇 빼앗길까봐 지레 겁먹고 그러는 거 아니겠는가.”
순간 서거정이 떠올랐다.
“혹시 그 일에 서거정 선배도 앞장서고 있는지요?”
“지금은 누구누구라고 딱히 말할 수 없네. 잠복기니까 말이야. 그러나 유사시에는 몇몇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신하들이 불교를 향해 칼을 들 걸세.”
시습이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님께서 수락산에 터를 잡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이제는 설준 스님을 보필하시며 어리석은 저희들을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시습이 남효온의 얼굴을 바라보며 설준의 이야기를 정리해보았다.
조선은 유교국가로서 불교는 늘 암암리에 박해 대상이었다. 그러나 몇몇 임금의 개인적 성향으로 왕가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조선 창업 이래 벌어진 살육의 광기, 즉 왕자의 난·계유정난·단종복위 사건 등으로 왕가 형제들 뿐 아니라 훈구대신과 고명대신들이 제물이 되었다.
거기에다 천벌인지 세조의 두 아들이 단명하였다. 마음이 번거로운 왕실은 그 원혼들을 달래고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 궁전 내에 내불당을 세우고 불경을 간행하는 등 불교에 의지하였다.
그간은 이런 이유로 왕실의 특혜와 비호를 받아왔는데 상황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본궤도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했다. 시간이 문제였다. 불교박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에 이르니 시습의 마음이 갑갑해졌다. 그저 속으로 나무관세음보살만 되뇌었다.
담판
만득을 설준 스님께 부탁하고 수락산으로 돌아온 시습은 농사일을 하는 틈틈이 한양을 드나들었다. 이야기했던 음울한 분위기가 현실화된다면 그 중심부에 있는 스승님의 안위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설준의 말대로 아직은 공식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면 밑에서 부글부글 끓는 기운의 강도가 점점 강해지고 있음을 쉽사리 감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간원의 사간들을 중심으로 불교에 대한 특혜시비가 일면서 조선의 정체성에 대한 언급이 서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연 물망에 오른 사람은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설준과 신미 등이었다. 설준의 경우는 퍼뜨려놓은 정업원주지 해민스님과의 염문을 통해 이미 공격의 빌미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업원주지로 해민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설준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했는데 그 부분을 꼬투리삼아 둘 사이를 치정의 관계로 몰아갔다.
그날도 오후가 되서 한양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느 때처럼 그저 분위기를 파악하려는 의도에서 내친 걸음이 아니었다. 우참찬으로 있는 서거정을 만나 작금에 조정에서 형성되고 있는 형체 없는 실체에 대해 직접 들어보기 위함이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서거정의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곳저곳 배회하다 불시에 찾은 것처럼 일부러 어둑어둑해져서야 대문을 두드렸다. 기별도 주지 않고 찾아온 시습을 서거정이 경계하고 있었다. 그를 직감한 시습이 방으로 들어서자 더욱 태연스럽게 행동했다.
“아니 왜 그런 눈초리로 바라보십니까? 긴장 푸십시오, 오랜만에 선배님과 곡주 한잔하러 왔으니까.”
서거정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이 늦은 시간에 어인 일이신가?”
“무슨 일은요. 먹고 살자 싶어 이러지요.”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먹고 살려면 조정에 들어야 하고 그러자면 선배님 같은 고관에게 먼저 잘 보여야 한다, 뭐 이런 말이지요.”
서거정이 싱겁다는 듯 가볍게 웃어넘겼다.
“왜요, 내 말이 믿기지 않습니까?”
“자네의 그 말을 곧이들을 사람이 조선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시습의 너스레에도 서거정은 여전히 경계의 끊을 놓지 않았다.
“나는 뭐 먹지도 않고 살 수 있답니까?”
“물론 먹지 않고야 어찌 살겠는가. 그러나 자네는 원하기만 한다면 그 입 하나쯤은 비지 않을 터이니 하는 말 아닌가.”
“그러면 날 보고 손을 벌려 평생 빌어먹으라는 말입니까?”
“누가 손을 벌리라했는가, 다 자네 것이거늘.”
서거정의 꺾이지 않는 강수에 시습이 피식하고 웃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면서 주안상이 들어왔다. 상이 채 놓이기도 전에 시습이 능청떨며 다가앉았다.
“오랜만에 회포나 풀어야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왔는가?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세.”
“그것 참, 선배님과 소승은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느닷없는 시습의 말에 서거정이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잔을 채웠다.
“우리 둘이 무엇이 그리 닮았는가?”
“첫째는 둘 다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맞는 말이네. 다음은?”
“둘째는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지요.”
“그것도 맞는 말일세. 그 다음은?”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아낀다는 점입니다.”
“물론이지. 또?”
시습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직하게 말했다.
“둘 다 어려서 두각을 나타냈었지요.”
서거정이 즉각 되받지 않고 잠시 망설였다.
“그 말도 맞는 말이네만 내가 자네만 했겠는가. 어림도 없었지.”
“무슨 겸손의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다섯 살, 나는 여섯 살이었지 않은가.”
시습이 다섯 살에 세종임금을 비롯하여 조정대신들을 탄복시킨 일과 서거정이 여섯 살에 시를 지어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킨 일을 지칭함이었다.
“다섯이나 여섯이나 그게 그거지요.”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고맙군. 그리고 또 있는가?”
시습이 대답 대신 앞에 놓인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그에 질세라 서거정도 단번에 잔을 비워 내려놓았다.
“그것만 해도 닮은 데가 많군요.”
순간 잠시 풀렸었던 서거정의 눈에 다시 경계의 빛이 감돌았다.
“그만인가?”
“그만이라니요. 많이 있지만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합니까.”
서거정이 말장난의 요체를 감지한 듯 묵묵히 빈 잔을 채웠다.
“자, 그만 돌고 본론으로 들어가 봄세.”
“내친 김에 선배님과 제가 다른 점도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서거정이 가벼이 혀를 찼다.
“그리하세. 어차피 늦었으니.”
“선배님과 저는 출신 성분에 차이가 있습니다.”
“출신성분이라.”
“선배님은 화려한 배경에서 태어났지만 저는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지요.”
서거정의 경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고위직에 있었고 최항은 그의 자형이었다. 또 어머니는 양촌 권근의 딸로서 그야말로 명문가에서도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에 반해 시습은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명색만 양반인 집안 출신이었다.
“후배가 그리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그리고 또?”
“선배님은 욕심이 많은데 반해 소승은 욕심이 없습니다.”
시습의 느긋한 말투와는 달리 서거정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졌다.
“예끼, 이 사람아. 그게 무슨 소린가?”
“그럼 욕심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서거정이 답은 하지 않고 술잔을 들었다. 그를 유심히 지켜보며 시습도 천천히 잔을 기울였다.
“이보게, 설잠.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우리가 언제 흉금을 감추던 사이였던가. 내 다 말할 터이니 속 시원히 말해보게.”
“선배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내 이실직고 하리다.”
“그러세. 내 들음세.”
시습이 자신의 빈 잔을 천천히 채우고는 서거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요즈음 한양 공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무슨 공기 말인가?”
“새로운 왕이 보위에 오르면서 전과는 다른 음험하면서도 살벌한 기운이 하늘과 땅을 서서히 뒤덮고 있다, 이 말입니다.”
서거정의 표정이 사뭇 어두워졌다.
“소승이 상상하는 일이 맞는지요?”“맞고 안 맞고는 자세히 말해야 알지 않겠는가.”
“조선이 창업초기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는 느낌입니다.”
“자네 지금 불교와 관련하여 일고 있는 일을 말하는 겐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그 간단한 이야기를 무에 그리 어렵다고 몇 바퀴나 돌리는가.”“제 말도 그 말입니다. 선배께서 이미 훤히 알고 있는 문제를 왜 그리 선뜻 내놓지 않으시고 딴청이셨는지 그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서거정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느낌이 맞네. 지금 조정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자네 말대로 창업초기로 돌아가자며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고 있네.”
“본격적으로 불교를 탄압할 것이란 말이지요?”
서거정이 손을 내젓고는 마른기침을 해댔다.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시습이 그의 모습을 주시하며 잔을 들었다. 손이 살짝 떨렸다.
“지금 당장 본격화되지는 않을 걸세.”
“본격화라니요?”“물론 시도가 없을 거라는 뜻은 아닐세. 근근이 작은 일부터 실행하겠지만 그를 본격적으로 전면에 드러내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네.”
“무슨 뜻입니까?”
“전하께서 아직 성년이 아니시지 않은가. 이십이 되기까지는 대왕대비전하께서 대리청정을 하고 계시지.”“그렇지요.”
“대왕대비전하께서 워낙에 불교를 옹호하시니 그분이 정권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그 어떤 시도도 공공연하게 하지는 못하리라 보네. 윤허하지 않으실 테니 말이야.”
“그 이후에는 어찌 진행됩니까?”
“그 이후는 아무도 장담 못하네. 신하들이 강력하게 간언하면 전하께서도 어쩌지 못하실 거라 생각하네. 그분이야 불교에 대해 남다른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시습이 속으로 나무관세음보살을 되뇌었다.
“혹시 설준 스님이 걱정되어 그러는가?”
시습이 대답 대신 들었던 술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후배로서는 스승이니 당연히 그렇겠지. 그러나……”“그러나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설준 스님은 피해가기 어려우리라 보네.”
“무슨 연유에서 그런답니까?”
“정령 몰라서 묻는 겐가?”
“물론이지요.”
물론 모를 리 없었다. 그저 서거정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자신의 생각이 어긋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본보기 차원이지, 본보기!”
“세조임금의 성은을 입은 일이 역으로 독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보아야지.”
서거정이 짧게 말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자 그를 바라본 시습의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데 선배님!”
“뭔가?”
“선배님도 설준 스님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서거정이 대답 대신 혀를 차며 잔을 채웠다.
“이 사람아,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인가?”
“무슨 상관이라니요?”“조정 전체가 들고 일어선다면 낸들 무슨 수로 버틸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앞에 나서야 하는 일이나 생기지 않기를 바랄뿐이라네.”
사실 그도 모를 일이었다. 서거정이 어떠한 직책을 맡고 있느냐에 따라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행동이 정해질 터였다.
“선배께 한 가지만 부탁하겠습니다. 내 낯을 보아서라도 절대 설준 스님을 탄핵하는 데는 나서지 말아 주십시오.”
서거정이 답은 하지 않고 멍하니 있다가 잔을 들었다.
“그리고 선배님!”
시습이 낮지만 분명한 투로 서거정을 불렀다.
“말해보시게.”“수락산에 터를 잡았습니다.”“수락산에!”
“일전에 수락사를 방문하였는데 그곳 벽에 선배님의 자취가 있더군요.”
“허허, 그게 아직까지 있던가.”“그것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디다. 그래서 바로 옆에 화답해놓았으니 언제 시간되면 한번 들러보십시오.”
“뭐라. 화답을!”
시습이 서거정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허허, 자네 내가 죽을 때까지 따라붙을 작정이구만.”
“그러니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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